2006년 한 마을에서 마을의 아이들과 영화를 찍기로 했다.
가평군 설악면, 이곳이 통일교의 본부가 있는 마을이다 그런데 이 마을로 가려면 통일교 본부앞를
지나야 한다. 그것도 좁은 고갯길을 따라 급우회전 다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면 마을이 나온다.
5톤 트럭을 타고 가야 하는데 왠지 그 고갯길을 올라 오른쪽으로 우회전하는 내리막길을 2번이나 작은 차로 사전시뮬레이션을 해야 할 만큼 개인적인 운전 미숙으로 인해 약간 무서웠던 곳이다.
통일교 측은 " 본부 주변 경관은 전체적으로 모란꽃 형상을 한 세계적인 명당으로, 복귀되고 완성된 에덴동산을 상징한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지었던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잃어버렸으므로, 이곳 수백만 평 대지에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라고 밝혔었다.
그 산의 이름이 장락산이었다
이 마을의 초등학교 이름도 장락분교 전체 학생 11명의 아이들만 남았다
이 마을은 강끝 마을인데 통일교 건물의 형상이 백악관을 닮았는데 마을에서 보면 백악관 머리만 언뜻 보인다.
그 당시 아이들은 그 건물이 박물관 건물 정도로 알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그때 기준으로 한 달 뒤면 통일교의 에덴동산 선포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너무나 아름 다운 이 아이들의 끝마을,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그 마을이 어떤 변화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이곳의 아이들과 주민들의 일상과 생활 자연 속의 일상을 극화시켜 나가는 10여 일에 걸친 작업을 마쳤다. 당시 대안 학교 꿈틀과의 공동 작업도 있었다. 당시 이 프로젝트를 모 포털이 부분지원했는다. 공동제작이라는 명분 아래 제작비도 반분하기로 했다. 그런데 자기 프로젝트로 언론 홍보를 하고 미디어교육으로 알렸다. 애초의 약속은 공동 제작이라는 구체적인 과정이 중요했는데 심지어 내 이름도 없는 언론에 소개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그 포탈과의 제휴를 완전히 끝내 버렸다. 그래도 시골 아이들을 위한 미디어교육의 필요성을 나에게 사정해서 나는 빠지더라도 이후 공동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용인했다. 마음 한편으론 내가 할 일을 그들이 대신해 준다는데 나에게 멀리 보면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그들은 셀프 미디어교육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학교와 마을을 이어가고 마을의 서사를 전문가와 콜라보하면서 추진되는 나의 지향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당시의 내 생각에는 나도 감독류의 아이들의 영화놀이 이상의 연결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과 아이들의 잠재력은 예술가의 창의력을 뛰어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특히 농촌 아이들의 엄청난 예술적 잠재력을 폭발시켜 나가는 기쁨으로 살았던 나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기도 했었다.
이곳저곳 마을을 돌다 보면 그들 포탈이 미디어교육차원으로 지나간 곳의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광주의 한 보육원이었다. 우연히 근처의 마을에서 작업하다 아이들과 만났다. 나와 작업을 3일 동안 같이 해보고 난 뒤 보육원선생들의 반응은 "그들이 살아나는 것 같아요 "였다.
통일교 에덴동산 뒤편 마을에서의 시간은 그런 면에서 나로선 한국의 자본과 권력의 뒤편이나 다름없었다.
조선말, 해방전후와 전쟁을 거치면서 억압되었던 '정역'을 기반한 민족개벽종교와 맥이 닿아있는 통일교
당시 다양한 정치적 이념정파들의 빈틈과 한계를 분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억압되었던 민족종교가 기독교라는 종교와 결합하여 발전한 6.25 전쟁 당시 부산에서 태동한 종교라고 알고 있다. 민족 종교 저변에는 샤머니즘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2차 세계전쟁 전후까지도 샤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천황제를 통해 형식적인 국가통합을 기하였다
하지만 한국은 해방, 전쟁 후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기득권적인 정치, 종교가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혼란을 겪었는지를 통일교는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ai시대 어떤 정치도 종교도 한국의 극단적인 양극화와 집단 우울과 허무를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들도 기득권세력들과 연결되어 보수화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장락산 마을에서의 추억,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