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 편의 이야기를 나에게 주고 갔다. 1993년 금융실명제와 얽힌 억대 신용카드 사기사건. 미국 영주권자이며 신학교 졸업생인 그는 나를 바지사장으로 만들어 목적을 이루려고 했다, 2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독립영화를 꿈꾸던 나는 내 이름으로 개설된 통장에 든 돈을 발견했다.
신용카드가 막 한국 사회에 등장한 직후, 모방범죄를 우려해 언론에 소개되지도 못했던 그 사건. 1993년 실명제가 실시되던 바로 그날까지, 나는 내가 국내 최초의 거대한 카드 사기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는 걸 몰랐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비행기로 서울로 압송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살기 위해 추리를 해야 했다. 내 기억 속 그들의 사소한 대화, 농담 한 마디 한 마디로 유령들의 신원을 찾아야 했다.
종로 2가 YMCA 뒤 2평 남짓한 영화연구소 OFIA. 겨우 1년도 지나지 않아 주차장과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라 상대적으로 싼 임대료조차 버티기 힘든 날이 다가왔다.
시네마떼끄도 당시 문화학교 서울이라는 연극학원을 준비하던 한의원 선배(뒤에 한국시네마떼끄협의회장+문화학교서울 고 최정운 대표 -2022코로나로 돌아가심 )가 사당동 사무실로 들어와 함께 하자는 권유가 있었다. 하지만 매 달 전당포를 드나들며 버티더라도 내 힘으로 가는 게 맞을 것 같아 후배를 추천해서 문화학교서울이 시네마떼끄로 활동을시작했다.
1993년 . 지금은 흔한 단편영화제도 하나 없었다. 1994년 임순례감독의 단편 영화 <우중산책>이 제1회서울 단편영화제의 수상작이었으니까.독립영화라는 개념은 그 당시도 낯설었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홍기선 감독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 16미리 필름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사람들도 손에 꼽을 만큼 이었다 1993년은 그야말로 독립영화의 초창기였다.
'공유 오피스'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나는 그 좁은 사무실에 큰 책상 두 개만 더 놓고 같이 사용할 사람을 찾았다.
벼룩시장 광고를 보고 찾아온 이들. 한 명은 세련된 캐주얼 차림의 젊은 사업가라는 000이었다. 동갑이라는 이유만으로 금세 친구가 되었고, 또 한 명은 6·25 때 남한으로 내려온 60대 노인이었다. 그는 깔끔했고, 부지런했고, 자식보다 더 어린 나에게 깍듯했다. 30년이 지났지만 그 사람의 향기가 남아 있다.
000은 자신의 자가용을 은근히 자랑했다. 나는 그의 허세와 과시를 경계와 호기심 사이에서 관찰했다. 이것은 나의 직업적 습관이었고, 그를 통해 시나리오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과 육도삼략, 클라우제비츠와 사회주의 전략 전술론을 독파했다고 우쭐거리며 살았던 나는 결국 상상 초월의 꿈을 가진 000에게 내 상상을 초월한 억대 사기 사건에 연루되었다.
000은 두 달 후 갑자기 이 사무실은 좁다며 대방동에 사무실을 다시 냈단다. 그런데 내 사무실에서 잠시 아르바이트하던 여자를 직원으로 데리고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한 달 전 자신이 미국교포라 통장을 발행하지 못하니까 내 이름의 통장을 개설해 달라고 해서 조심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이름의 통장을 개설해 주었다. 차마 그가 어떤 사기를 칠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한 우둔함이었지만 몇 달 같이 있으면서 친해졌는데, 안 된다는 소리가 안 나왔다.
도장이 없다면 돈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나름 대책을 세웠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다 내가 아는 여자를 데리고 가니 그들의 대방동 사무실의 정보도 적절히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정보원이라고 생각한 여자가 그들의 편이 되어 나를 안심하도록 속였다. 곧 내 간자가 ‘반간(反間)’으로 전락한 상황이었기에 이미 승패는 당연한 것이다 .
그들이 대방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하고도 간혹 그 여자에게 안부전화를 핑계 삼아 그들의 사업 정체를 파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역으로 그들에게 나의 멍청함을 드러내기만 했다.
뒤에 알게 된 사건의 전모는 그들은 내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냈다. 이제 막 시작한 한국의 신용카드가입 회원을 모아, 그 카드수령처를 신청자의 집이나 회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대방동 사무실로 조작 하였다. 카드회사에서 전화가 와 "000 씨인가요?"라는 확인을 하면 자기가 그 사람인양 전화를 받는다. 신청자의 이름과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카드회사의 전화담당자도 미처 확인하기가 쉽지 않도록 그 모든 것을 준비한 것이다. 아마 반복되는 전화번호를 일일이 파악하기 힘든 카드회사의 확인단계의 약점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카드들은 그들의 손에서 모아져서 카드깡 해서 현금화한다. 당시 카드사들도 그런 가능성의 상상을 미처 하지 못했는데 내가 000의 계략과 전략을 파악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정부에 의해 실명제가 실시된다.
졸지에 그동안 모은 돈 일부가 내 이름의 통장으로 들어와 있었던 거다. 돈을 빼려면 내 주민증과 도장이 있어야 한다.
"무슨 돈?" "사업자금! 좀 꺼내줘. 대가는 확실히 할게." 순간 놀랐다. 이 엄청난 돈이 어떻게 내 통장에 있지? "됐어. 돈은 안 받을래 " 그리고 난 뒤 000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있던 진주 고향마을로 형사와 카드회사직원들이 찾아왔다.
"그렇게 많이 해쳐먹고 장례식에 오냐? 대단하다."
이야기의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내가 당했다는 생각에 하늘이 빙빙 돌었다. 모든 친척들이 다 모인 그 자리에서 이런 사태를 당하다 보니 모두들 충격에 빠졌다.
그들과 아무 관련이 없다며 당당하였지만. 장례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그들은 나를 비행기에 태워 서울로 왔다. 그리고 어느 지하철 지하조사실에 가두고 심문을 시작한다.
"이름만 빌려주었을 뿐입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한통속인 걸 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게 가능하지 않지.
누구야? 그들은 어디 있어?"그가 사무실을 게약 할 때 제출한 모든 것은 가짜였다. 그는 누구인지 몇 살인지 얼굴을 보여줄 사진 한 장 없었다. 그는 유령처럼 와서 유령처럼 사라진 것이다.
사라져 버렸다. 깜쪽같이 얼굴도 안 남기고 어느 흔적도 없이 수억을 가지고 사라져 버린 이들을 어떻게 잡을 건가? 당시에도 은행에는 CCTV도 있었지만 얼굴을 가린 희미한 얼굴로는 날고 기는 경찰도 그들을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카드 사건으로는 그렇게 큰 사건이 처음이라 모방범죄로 인해 언론에도 통제한 사건.
나는 지하실에 갇혀 내가 살기 위한 추리를 해야 했다. 몇 달 동안의 000과의 대화, 농담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추리: 비 오는 날 신촌에서 하숙한다는 000. 그가 XYZ비디오를 빌려 보고 그 영화 이야기를 했었다. "신촌의 비디오방을 뒤져 몇 월 비 오는 날 XYZ라는 작품을 대여한 비디오 가게를 찾아 보세요."
경찰은 그 비디오방을 찾았고 뒤이어 그가 살았던 비디오 가게 근처의 하숙집을 찾았다.
그런데 그 하숙집에 살고 있었던 사람은 나였다. 내 이름으로 된 하숙집이었던 것이다. 비디오 방도 하숙집도 다 내 이름이었다.
두 번째 추리: 종로 사무실에 잠시 들렀던 젊은 친구 하나가 그들끼리 나누던 농담 하나가 생각났다.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했는데 쥐가 나오더라며 그들끼리 웃던 . 종로 일대의 지하실에 있는 노래방을 뒤졌고 최근 알바를 그만둔 한 사람의 신상을 확보했다. 그도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드디어 신원이 확인된 사람이 확보되었기에 그를 잡으면 000의 신원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알바가 잡히는 바람에 드디어 그의 신상이 드러났다. 교포라 재빨리 출국금지시켰다고했다.
이제 그가 잡히면 모든 게 해결되겠구나 싶었다.
드디어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서 노래방알바 공범과 000가 만나기로 한 날, 수많은 사복 경찰이 백화점을 둘러쌌다. 얼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나는 갤러리아 백화점 근처의 차 안에 수갑을 차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갤러리아 백화점이라니 참 내 인생이 얄궂다. 한 방송국에서 미니시리즈 조연출을 하고 있었던 때 갤러리아 백화점 1층 안에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감독이 나에게 준비상황을 재촉하며 고함을 치고 있었다. 수많은 보조 출연자들이 촬영을 위해 동선을 지시받고 있었던 그 시간, 나와 간혹 촬영이 쉬는 틈에 담배를 피우던 그 보조 출연자가 감독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 보조출연자는 나의 편을 들다가 욱해버렸던 것이다. 졸지에 백화점 안에서 둘이서 치고받는 상상 할 수 없는 사건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하늘이 노래지는 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래서 스텝들과 수많은 보조출연자를 뒤로 하고 떠나온 그 백화점앞에서 수갑을 차고 있는 내 꼴은 얼마나 드라마적인가.
드디어 000이 잡혔다.포승줄로 묶여 살벌하게 등장한 주범 000과 대면했다.
그런데 순진한 내가 그에게 궁금한 게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것이었다.
"그 돈으로 뭐 하려고 했어요?" 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질문이 수많은 형사들이 둘러싼 그 자리에서 할 말인가 싶다. 그도 피하지 않고 답했다
"교회 지으려고..."
그 후에 그가 신학교를 졸업했었다는 사실을 경찰에게 들었다.나는 그의 진심을 믿기로 했다.
형사대빵은 끝까지 나를 000과의 공범으로 보았다. 수갑을 풀고 지하철안의 은밀한 지하실을 나가는 내 등을 향해 그가 내뱉는 말을 아직도 선명하다.
"언제고 내가 너 잡을 거다. 내 감은 못 속여..."
범인을 잡은 것도 내 추리 때문인데도 그들은 나보다 영화를 더 많이 본 것 같았다.
"저런 사기꾼들은 보통 물귀신이다. 관련 없는 사람도 같이 붙잡고 가는 법인데 이상하다. 너 주범이지? 이런 고도의 지능범죄는 저 애 학력으론 안 돼!" 머리는 학력이 아니라 방향인 법인데도 집요했다.
멍청한 내 머리로는 꿈도 못 꾸는 것이라는 걸 그들은 모른다. 그들로부터 단 일 원도 대가를 받은 돈이 없었다는 것. 실명제가 시작되었기에 더욱 투명했다. 000 통장에서 돈을 찾을 때 난 그 대가를 거절했었다.
000주범이 나의 참고인 증인 신청을 원하지 않아 재판정에도 서지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간혹 000을 생각한다. 그는 교회를 지었을까?
2009년 나는 강원도 홍천 월운마을에 교회같은 마을극장을 만들려 했다. 5년 동안 그 마을 주민들과 "금광속의 송아지"라는 영화를 찍었다. 그 수많은 영상자료를 보관하고 마을이 만든 영화를 보는 공간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돈이 없어서... 마을극장으로 만들려는 창고 밖에 벽화만 그려놓곤 그만두게 되었다.
그 귀한 자료들은 보관되지 못하고 이후 많은 자료가 불이 인해 사라져 버렸다.
교회를 짓기 위해 초유의 신용카드 사기를 친 000과 나... 과연 누가 먼저 자신의 꿈을 이룰까? 그들이 빼돌린 돈은 회수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그는 미국 영주권자였으니 미국 어딘가에 신용카드교회를 지었을까. . 그 비상한 머리와 치밀한 전략은 그 목적을 이루기에 충분했다. 아마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완전 범죄의 가능성이 더 컸을 것이다 .
나는 오래전부터 100개의 마을영화 100개의 마을극장을 꿈꾸었다. 100개의 마을영화는 20년 만에 꿈을 이루었다. 아마 돈이 많았다면 그 꿈은 나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전 세계에 만개의 마을영화, 만개의 마을극장을 꿈꾸기 시작한다. 꿈은 오히려 없는 곳에서 피어난다 .돈 많은 이들은 이런 꿈을 꾸지 않는다. 돈 없음에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꿈으로 활용한다 . 난 손자병법과 육도삼략을 올바르게 공부한 사람이다 . 매번 이길 수 없지만 지더라도 지지 않는 전략은 알고 있다 . 나의 꿈은 내가 살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