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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헬기추락, 한국영화의 그림자

by 신지승

한강에서 헬기추락사건이 났다

1993년 6월 14일 서울 한강 잠실 선착장 부근에서 영화 촬영 도중 발생한 대형 사고다. 이 사고는 영화 ‘남자 위에 여자’의 첫 장면인 선상 결혼식 장면을 촬영하던 중, 근접 촬영을 위해 헬기 고도를 매우 낮췄다가 갑자기 기우뚱거리면서 추락해 총 7명이 사망하고 1명이 구조된 참사였다.

당시 사람들이나 지금도 주로 연기자 변영훈의 죽음을 떠올리는 사건이다

그 참사 속에는 내 고등학교 동창, 성준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나와 친한 친구와 가까운 사이였을 뿐 이름만 알던 사이였다. 내 반은 지하실에 있어 다른 반 친구들과 교류가 적었고, 성준은 늘 멀리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무슨 일로 서울로 찾아온 친구들로 인해 성준과 몇 번 어울려 다녔다. 서울 모대학 영화과를 나오고 대기업 영화투자와 미도영화사를 오고 가며 투자 관리, 제작관리를 맡고 있었다. 그 일로 성준은 종로의 내 영화 사무실로 몇 번 놀러 왔었다. 예술영화에 집착하는 나를 안타깝게 여기던 그는 대중영화에 대한 자신감을 뿌듯한 듯 내보이기도 했다.

“나도 감독할 거야. 내가 잘되면 너한테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

아이러니하게도, 성준이가 마지막으로 맡은 그 영화는 내가 술자리에서 자주 어울리던 시나리오 작가 양○○의 작품이었다. 공모전에서 입상하며 주목받았고, 첫 성공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이 영화화된 것이었디. 아마 그 시나리오를 쓸 때가 줄곧 같이 홍대 거리를 다니며 술잔을 기울이던 시간이였을 거다.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들과 나는 며칠 동안 장례식장에 머물렀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했다.

큰 사고였기에 감독, 배우, 스태프 할 것 없이 충무로의 거의 모든 영화인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진짜로 장례식장을 떠받치던 이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60~70년대 한국영화의 단역들이었다. 그들은 설거지를 하고, 손님을 맞고, 청소를 하며 궂은일을 도맡았다.

영화를 많이 보지도 않은 나도 얼굴을 알만한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보조출연자들을 관리하는 씨스템이 없었다. 감독과의 개인적 인연으로 또 영화판의 단역 커뮤니티로 한국영화의 중경 혹은 원경의 배경을 장식했다.

충무로에 하루 종일 단역들이 모이는 다방이 있었다 한국영화의 단역이라고 하지만 사실 지금의 엑스트라 같은 역할만 하던 이들.특히 6-70년대의 군중씬을 도맡아 했다.

장례식장에서 그들과 인연이 있던 없던 , 감독이 나타나면 우르르 다가와 반갑게 맞이하지만 그들은 잠시뒤에 보면 그들끼리 구석에 몰려 있었다.

스타들은 오면 감독들과 희희낙락하다 바로 돌아가고 그들의 고생에 감사 인사를 나누는 이들은 없었다.

업력으로 보면 스타들은 그들에게 그야말로 까마득한 후배였지만 영화판의 질서는 그런 게 아닌 것이다.

그날 나는 너무나 충격적인 우리 사회, 영화, 삶의 축소판을 본 것이었다 그것이 너무 슬펐다

그들은 한국영화의 머슴 같은 희생양들이다. 솔직히 노예 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했다

스타는 감독과 자본과 함께 웃으며 정상을 꿈꾼다. 그러나 단역은 생존을 위해 감독에게 눈도장을 찍고, 내일의 하루 품삯을 기다린다. 결국 80년대를 지나 외주 시스템으로 바뀌자, 충무로 다방에 모여 있던 단역 공동체는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냉혹한 ‘물갈이’ 속에서 그들은 흔적도 없이 흩어졌고, 한국영화의 한 시대도 함께 막을 내렸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피라미드 위에 서기 위해, 살아 나아가야 하는 걸까?” 나의 큰 꿈의 오만한 30대 야망은 그걸 심한 수치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그 질문은 단순히 영화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 전체가 가진 정치적·경제적 구조와 다르지 않았다. 성공을 위해 누군가는 희생되고, 승자는 끝내 소수로 남는다.


나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 감독과 홍대 지하철역 술집에서 초저녁부터 단둘이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새벽 어느 지하도에서 다시 소주를 기울였다. 그는 술에 취해 자신이 겪은 수모를 털어놓았다. 제작사 사장에게 뺨을 맞고도 아무 말 못 했던 날, 그 모욕감을 잊을 수 없다고 아무도 다니지 않는 새벽의 지하도에서 울먹거렸다. “네가 내 동생이라면 영화감독질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는 그의 말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죽음 앞에서도 기고만장하는 감독도 일시적인 자본에 호가호위하는 제작자 앞에서 모욕을 받는 배후에는 과연 무엇이 버티고 있는것일까 모두를 자본의 질서에 종속시키는 하나의 거대한 위계 피라미드.

그 당시 한국영화는 투기판이 되었고, 연기자의 미래는 자본과 스타의 견고한 카르텔 안에서만 열릴 수 있었다. 스크린과 TV, 다큐와 예능, CF까지—온통 같은 얼굴들이 반복된다. 혈연, 학연, 지연, 사돈, 팔촌, 심지어 애완견까지도 그 질서 속에 편입된 듯하다.


그날 한강의 추락은 나에겐 큰 의미로 남게 했다. 한국영화와 우리 사회의 숨겨진 본질을 성준이가 내게 보여준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몇 년뒤 나는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아예 영화를 본 적도 없는 비포장도로의 시골 마을로 내좇겼다. 그 때 성준의 장례식장의 그 풍경이 숨어 있다가 나의 미래를 가리켰다.

별처럼 흩어진 이름 없는 얼굴들, 그들의 침묵과 그림자가 내 영화 인생에서 빛이 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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