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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궤도를 따라간다

by 신지승

연출부 생활을 할 때. 주인공이었던 스타 김혜자의 단풍 구경 장면을 찍기 위해 촬영팀보다 하루 먼저 카메라 감독과 광주 무등산으로 출발했다. 빡빡한 촬영 일정 탓에 다음 촬영을 하루 전에야 겨우 준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밤늦게 무등산에 도착하니 멀리서 산이 울긋불긋했다. "좋네" 촬영 감독이 흡족해하며 말했다.(당시는 촬영기사라고 호칭했다) 감독에게 단풍이 보기 좋으니 내일 서울에서 20명쯤 되는 연기자와 스태프가 내려오면 되겠다고 전했다. 마음 편히 둘이서 술 한잔 하며 광주의 밤을 보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다시 보니 단풍의 '단'자도 보이지 않았다. 밤사이 가로등 조명 불빛에 울긋불긋하게 보였던 것이다. 급히 다시 연락해 무등산행을 미루고 속리산으로 향했으나, 설상가상(雪上加霜) 전날 불어닥친 비바람에 단풍이 모두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쥐구멍으로 숨고 싶을 만큼 감독의 매서운 보복이 공포스러웠다 . 수많은 연기자와 스태프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열악한 인력 구조 탓에 닥치는 대로 온갖 일을 처리해야 했던 연출부 생활 동안 수많은 실수를 반복하며 오히려 자신을 연단(鍊鍛) (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만듦, 단련하고 연마함)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실수는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는 배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항상 존재했다. 어느 지방에서는 밤에 낮에 본 장소를 찾지 못해 대형 버스 두 대와 연기자 개인 차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헤매다 한 시간을 허비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연일 이어지는 촬영과 제작비를 위협하는 연기자들의 스케줄 때문에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촬영을 강행했다. 너무 졸음이 쏟아져 잠시 창고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붙였다. 10분도 채 자지 못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조명이 켜졌다. 다음 촬영 장소에서 졸다가 조명 테스팅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수시간을 농땡이 친 것처럼 몰아치는 스텝들의 눈초리에 마냥 부당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항변할 수 없는 법이다.


다시 속리산 이야기. 감독은 그 모습을 말없이 보더니 떨어진 단풍을 스카치테이프로 붙이라고 지시했다.

졸지에 관광지에서 투명테이프를 사서 촬영, 조명, 분장 스태프들 모두 나무에 단풍을 붙여야 했다. 지금 같으면 CG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심지어 유명한 연기자까지 나서서 떨어진 낙엽을 붙이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해야 했다. 감독은 클로즈업(close-up)이 아닌 풀 샷(full shot)을 찍겠다고 했다. 그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어설픈 나에게 '현실을 미장센하는 것에 불가능을 생각지 않는 태도를 가르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냥 단풍 떨어진 길이면 어떻고, 안 보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냥 대사 하나로 "어젯밤 바람이 세차더니 단풍이 다 떨어졌네"라고 바꾸면 그만 아닌가?

물론 그렇게 주인공의 캐릭터와 심리와 드라마의 흐름, 이후의 시간대 설정을 수학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 아닐 것이다

또 다른 변수는 그 작품이 당대 최고의 작가 김수현이었던 것이었다는 점이다. 아마 당시 감독은 내가 미처 계산하지 못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고려해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이른바 OS 샷(Over Shoulder shot), 즉 화면 전경에 걸리는 단풍잎의 색감이 주인공의 심리뿐 아니라 화면의 풍성함을 주는 역할도 해야 하므로, 단풍 없는 황량한 가지와 떨어진 낙엽은 맥락에 맞지 않았을 수 있다. 또 감독이 작품을 방송이나 극장을 통해 보여 주어야 하고 상업적 상품으로써의 이유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후에 나는 대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직성과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 시간과 경비 측면에서 오히려 큰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을영화로 인해 차라리 큰 주제와 화두에 집중하며 즉흥과 우연을 받아들이는 장자의 무념(無念)의 미학을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북한 김정일의 '영화 연출론'에는 감독은 총사령관의 역할을 통해 철학적 맥락을 관리하고 미장센이나 화면 구성은 조감독이 하는 사회주의 총사령관 역할론을 영화에 도입하기도 했다.

여하튼 그것이 약이 되었는지, 현장에서는 가장 부지런해야 했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빨리 촬영을 해야 하니 장갑을 구하거나 쓰레기받이를 가져올 시간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내 손으로 개똥을 치워야 했다. 그런 마당쇠정신으로 인해 방송국 미니시리즈 외부 조연출로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나의 또 다른 생각

베르히만, 로셀리니, 빔벤더스 같은 수많은 작가주의 감독들이 도대체 우리의 일상과 삶터에 무엇을 남길 수 있었을까? 한국의 6~70년대 농촌 주민들은 아이들을 키우고 먹고살기 위해 영화 한 편 보기도 힘들었다. 천막 극장이라 해도 면, 읍 단위까지만 왔지 작은 리 단위 마을에는 굳이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집살이하는 젊은 아낙들은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신성일도 농촌 시골 리 단위 시집살이하는 이들에게는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는, 당대의 문화와 동떨어진 예술의 그림자를 보게 되었던 충격은 컸다. 역사마저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한국영화전성시대, 천막극장 등의 거시사(巨視史)와 동떨어진 미시사(微視史)가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바늘만큼의 연관성도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전국노래자랑'이 전국을 다니지만, 그것이 면 단위가 아니라 읍, 군 단위에 펼쳐질 수밖에 없는 엄정한 현실의 문화와 역사에서 이동권이 없는 이들이 당시 농촌에서도 너무나 많이 존재했었다.

예술의 깊이를 맛볼 수 없는 이들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흔한 신성일 영화도 '물 위의 섬'같은 이들에게 예술영화나 작가주의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나의 작품 <서촌 일기>를 촬영할 때, 극의 흐름과 전혀 상반되는 극과 다큐멘터리를 결합한 작품을 만들었다. 상품이 아닌 자유롭게 상상하고 실험하는 과정의 작업을 한다는 것이야말로 연탄을 찍어내는 기능적인 작업보단 설레고 흥미롭다. 대본이나 시나리오라는 것은 작품의 궤도를 뜻한다. 어느 날 난 그 궤도 없는 기차에 대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영화는 어쩌면 그들과 무념하고 즐겁고 무한히 실험적인 궤도를 만들어 가는 창작의 자유를 만났다. 그게 서로에게 색다른 기쁨을 느끼도록 했다.

여하튼 이후 나는 드디어 방송국에서 '베스트셀러극장'이나 '미니시리즈'라는 당대의 장르에 대해 참여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당대 스타, 연기자들을 통해 '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떨어진 단풍 낙엽을 붙이는 스타의 한 장면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모두 단풍 구경을 하며 함께 즐기면서 영화를 만들 수 없을까? 그 자체로 서로 착취하지 않고 빠짐없이 누구나 행복한 궤도의 영화기차는 없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사건이 이어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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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보안여관 마당에서 영화'서촌일기'첫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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