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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바다를 향한 대항해시대

by 신지승


압구정 백화점 촬영장에서 스텝과 많은 엑스트라를 등지고 홀로 걸어 나왔던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하면 나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했다. 위로 상전 모시고 뻐기며 가기보단 차라리 16미리 단편 영화를 만들어 가는 고행의 길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1993년에서 1995년까지 3년 동안, 내 삶에 몰아친 수많은 사건의 소용돌이는 그야말로 폭풍이었다. 영화라는 바다를 향해 돛을 올린 갓 서른의 청년은 시작부터 너무 거센 폭풍을 맞이해야 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신용카드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금융실명제, 김일성, 사망지존파 사건, 성수대교, 붕괴삼풍백화점 붕괴라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고, 한강 헬기 추락 사건이 발생했다. 나 역시 그 역사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강 헬기 추락으로 떠나보낸 친구 성준 , 할머니의 꽃상여와 얽힌 국내 최초의 카드 사기 사건, 금융실명제가 불러온 예상하지 못한 운명,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쫓겨나던 날 그리고 삼풍백화점 문화센터기획실에서 강좌를 제안받고 미팅을 하기로 약속한 바로 그 주, 전두환 노태우 법정 재판 시국에서의 5개 도시 순회 영화제. 그 태풍의 배경에는 언제나 종로 2가 YMCA 건물 뒤 좁은 골목 2평의 공간이 있었다.

1993년, 종로 2가는 당시 랜드마크였다. 사람들은 약속을 잡을 때면 으레 YMCA 앞에서 만나곤 했다. 그러나 그 건물 뒤편의 작은 건물은 달랐다. 주차장도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종로라는 상징성에 비하면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그 덕에 2평 남짓한 공간에 내 첫 영화 사무실 ‘영화연구소 OFIA(Our Future In the Angle)’를 열었다. 그곳은 작가·기자·연기자들과 담배 연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아지트였다. 당시 미도영화사 제작 PD 성준부터 모 통신사 기자 0욱 낮 밤으로 사무실에서 마시고 놀았다. 지금은 너무 유명한 스타인 정0호도 간혹 찾아왔던 그곳은 시나리오 아이디어도 끄적이고, 앞으로의 영화제작비도 셈하기도 했다. 곧이어 그 제작비를 셈하던 메모가 범죄의 동기가 되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2평의 ‘시네마테크’로 변했다. 그 시절, 상업영화 일색의 극장가에서는 구로사와 아키라나 빔 벤더스 같은 작가주의 영화를 볼 수 없었기에 밤에는 빔 프로젝트를 대여해서 그런 영화들을 보곤 했다. (당시 소수 영화인을 대상으로 했던 '씨앙시에'나 '영화사랑'이라는 초기 씨네마뗴끄가 재정문제와 경찰의 불법비디오로 취급되어 압수수색등을 당해 문을 닫았던 상황이었다.) 그 모든 활동은 생활정보지 '벼룩시장'을 통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았다.'벼룩시장'애 상영 일정을 싣는 것조차 작은 전투였다. 몇 년이 지나서야 그런 문화적 활동이 여기저기서 축적이 되고서야 일간신문에 단신으로 소개될 만큼, 나의 시간은 한편으론 지난했다.

어쩌면 그 짧은 시간 , 영화라는 바다의 격정과 화려함과 더불어 그 속의 상처와 그늘을 함께 보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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