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용문산 첫 동네 연수리로 들어왔다. 동시에 인터넷 포털의 시대가 막 열리던 시기였다. 다음 카페는 온라인 동호회문화를 만들어 냈다. 때 맞추어 나는 '창작 시나리오' 카페를 만들어 한국영화는 이야기를 넘어 시선과 해석의 창작단계로 진입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시나리오 온라인 공개 운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엄청난 반발과 비난의 포화를 받았다. 지금은 누구나 블로그와 SNS에 글을 올리지만, 그때만 해도 공개도 안된 시나리오를 온라인에 공개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하던 파격이었다. 시나리오를 공개한다면 혹 아이디어가 새어 나갈 까봐 전전긍긍했던 당시의 영화판 분위기와 개봉이라는 영화의 신비로움을 헤치고 작가의 저작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해 오랫동안의 토론이 이어졌다. 결국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서 회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 다음 100대 카페'에 선정되어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또한 동시에 5톤 트럭을 만들어 방방곡곡을 다니는 '이동창작센터 창시'가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영화를 한다는 모든 사람들이 가입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2만 명 회원의 방장으로 다시 나의 활동을 가질 수 있었다. 영화계와의 인연이 오히려 더 깊게 이어졌다. 창시 소속 작가회원들이 한국 상업영화에서 10개가 넘는 개봉영화의 작가로 참여했다. 예술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시네마뗴끄활동을 중단했다. 그것은 미국과 유럽으로 양분된 미학,그 한편이 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이제 두축이 아니라 3축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 민초, 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방식의 '들풀영화'라는 이름을 내걸고 다시 방방곡곡 다니기시작했다. 활동이 축적되자 9시 뉴스에 소개될 정도로 그 반향은 컸다. 지금은 너무 흔한 풍경이지만 25년전 평범한 초등학생이 영화를 만들고 주민들이 참여하여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그 당시로는 초유의 문화적 경험을 제공했다. 해외로 소개되는 글로벌해외 토픽 뉴스에서도 연락이 올 정도로 문화적 이슈화에 성공했다.
쇠약해진 몸을 감당하기에 벅찼다. 한의원을 운영하던 최정운 '문화학교 서울' 대표는 휴식을 권했다. '이대로 가다간 죽는다'는 무서운 협박과 한 첩의 한약을 쥐어주면서 나의 건강을 염려했다. 그게 내가 서울을 떠나야 한다는 결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잦은 기침, 왼쪽 가슴의 통증을 순간순간 호소했다. 발버둥 치며 살았으나, 남은 것은 허무와 병든 몸뿐이라는 사실이 스스로도 애달팠다
가리봉동의 월세 방을 잠시 거쳐 용문산 산속의 마을로 찾아갔다.
잠시 숨어 살면서 몸을 추스르는 게 목적이기도 했고 가진 돈도 없어 특별히 갈 곳도 없었다.
용문산 아래 첫 마을. 당시로는 이런 곳까지 마을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아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 신기했다.
낡은 창고 같은 단층 벽돌집, 방 둘, 거실 하나와 연결된 부엌
바로 옆 주인집과는 마당을 같이 두고 ㄱ자로 구성된 독립된 별채였다.
큰 창문에 민박이란 글자. 나름 실력 있는 손재주를 가진 이가 붙인 듯 한 테이프글자.
굵은 검정 테이프로 붙인 ‘민박’ 글씨는 햇볕에 바래 색이 벗겨지고, 가장자리는 말라 올라가 있었다. 누군가의 오랜 바람이 낡은 간판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는 듯했다.”
집주인은 오래전부터 이 외진 산골짜기에서의 가난을 벗어나길 위한 바램으로 민박을 시도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주인의 꿈은 한낱 염불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그 꿈속으로 내가 찾아온 것일까?
동이 트자마자 일어났다.
늦게 간신히 짐만 거실에 부려놓고 지쳐 자 버렸었다.
내 키높이만큼 쌓여있는 두 줄의 종이박스를 그제야 풀기 시작했다.
마당 밖이 소란스럽다.
창문의 불투명한 창가림막 귀퉁이 틈으로 바라본 마당에는
군데군데 무리 지어 족히 3-40여 명은 될 듯 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자들 몇몇은 쭈그려 앉아 그릇을 씻고 전을 부치고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겨우 어젯밤에 이사 온 사람을 반길 잔치를 열리는 만무할 텐데.
수많은 영화를 보고 살았던 남자에게도 너무 이해되지 않는 생경한 풍경이기도 했다.
시끌벅적 왁자지껄한 속에서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밖은 요란하고 안은 적막했다. 토끼몰이라도 하는 듯한 사람들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살짝 열린 문으로 쟁반에 떡을 들고 서 있는 두 아이.
6,7살쯤 된 두 아이는 거실로 들어와 이리저리 종이박스와 방 안의 분위기를 살핀다.
“ 우리 할아버지. 죽었어요. “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잔치의 소란을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 만큼 낯설고 무겁게 들려왔다.
어젯밤 아이의 할아버지, 계약할 때 단 한번 본 사람이 내가 온 날 밤
죽었다는 소리는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에 빠지게 한다.
나는 종이박스 뒤에서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었고 울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불운들은 분명 누군가의 비열하고 치사한 장난 같고 폭력 같았다.
화병으로 인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가슴의 통증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 같은 , 이토록 길게 이어지는 불운을 가져 올만큼의 업은 무엇일까?
그날 마을 사람들은 당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오랫동안의 지병으로 이미 몇번의 고비가 있었다.라며 나를 그 마당으로 이끌었다.
포장된 도로도 없는 용문산 막바지 마을 그곳에서 재권과 길수를 만나고 재권할머니와 길수 할머니, 순박한 마을 주민들을 만났다.
잘하는 한 사람의 대사를 만들던 지난 시간과는 달리 한 사람의 대사를 , 못하는 열 사람의 대사로 만들어 가는 것 오로지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지 못하고 7살 때 부산으로 와 살았던 나는 30살 넘어 오래된 농촌의 숨겨진 삶들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서울과 엘리트 , 성공, 빌딩 같은 위로만 보고 살았던 내가 그렇게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사람과 아이들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
그 순간부터 영화는 더 이상 나 혼자의 것이 아니었다. 자연과 사람, 그리고 마을이 함께 써 내려가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다.
나를 다시 살린 그 마을에 계속 살고 싶었다.그러나 운명은 항상 나를 머물지 않게 내몰았다.
전국을 방방곡곡 다니다 보니 관리가 안되는 집 .결국 불이 나서 용문산 외딴 무허가집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게 하는 한국의 법은 잔인했다 .무허가집에 살던 7살 어린아이 2명 ,4명의 가족을 내쫓는 법이란 게 선진복지국가 2017년 한국에서 가능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후 공공주차장을 전전하며 5톤 트럭에서 생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