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유명하지 않으니 빠져주세요."난 그렇게 들렸다.
KBS 뉴스기자의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야 하는 이유와 논리는 명확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군더더기 같은 이야기였다. 만약 유명한 감독이 주민들과 함께 마을 영화를 만들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유명함은 감출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나의 경우엔 '저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추가 설명이 필요했고, 그것은 명쾌하고 단순한 스토리텔링을 원하는 저널리즘에 방해가 되었다.
비록 7-8년간 이 문화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해도 뉴스와 기사에는 오직 주민들만 등장해야 했다. 내가 함께했다는 사실은 배제하고, 그것을 'DIY 창작'으로 포장해야 주목도가 높아진다는 생각은 해외 토픽뉴스 송출을 위해서도, 국정 교과서에 수록되기 위해서도 그렇게 써야 한다는 다 같은 논리들이었다.
미디어가 스스로 만들어낸 'DIY 프레임'은 단순한 언론 전략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노동자가 지식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혁명을 일궈야 한다는 정치적 상징과 맞닿아 있었다. "우리가 해냈다"라는 구호는 강력했지만, 동시에 협력과 그림자 속 노력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또한 대중들의 가지고 있는 진정한 창의성에 대한 구체성이 빠진 것이다. 그들이 지식전문엘리뜨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어! 였다.
'특별한 사람들이기에 가능했다'라고 강조하면 그것은 한순간의 놀라움과 찬탄으로 소비될 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문화로 확산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당대 미디어 주도세력이 만든 프레임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기자제를 대여해 주고 방송을 데리고 와 자기 활동으로 홍보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이 스스로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방송은 한 주민을 그가 촬영한 횟수만큼의 작품을 가진 사람으로 소개했다. 농촌의 아이들이 만든 영화는 국제어린이 영화제를 견인해 내기도 했고 더불어 그들의 창작 능력의 핵심을 왜곡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나 역시 1/n의 감독이다. 실제로는 한 감독 개인이 시나리오부터 현장 편집까지 창작적 통제를 가한다는 믿음이 굳건하지만, 상업 대중영화 현장에서도 그렇지 않다.
내가 아는 너무 유명한 한 감독은 혼자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없다. 시나리오는 대개 공동 협력 과정으로 생산되는 경우가 많다. 작가주의 영화가 아니라면 거의 전문 작가가 모든 것을 담당한다. 감독은 총괄하고 해석하는 보이지 않는 에피소드를 맥락화하는 가장 고도의 정신적인 역할이다.
어떤 감독은 한 장의 시놉시스를 기초로 조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게 하고, 단 한 편의 작품으로 영화 활동을 종료하기도 했다. 상업 영화 장편 감독으로 데뷔한 인도의 10세 꼬마 감독이 20억 예산의 감독으로 등장한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김기덕 감독도 데뷔작 '악어'촬영 시 기본적인 컷 개념조차 없었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시작과 달리 협력을 통해 충족된다.
국회의원들이 입법 전문성이 부족해도 국회에 입성하면 입법 전문위원이나 보좌진의 도움을 받아 입법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적인 기술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감성, 진정성과 세계를 바라보는 철학적 성찰력이다.
사실 누구의 작품인가를 따지는 일은 허망하다. 아이가 두 부모에게서 태어나듯, 영화 또한 협력과 공동창작의 과정에서 탄생한다. 아버지의 아이도, 어머니의 아이도 아닌 것처럼, 이 작품은 나의 작품이기도 하고, 주민 누구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문화는 여전히 공장주의 상품으로만 귀결된다.
"나는 혼자만의 감독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감독이다. 중요한 것은 이름뿐 아니라 , 협력의 가치다."
그러나 무명 감독이 가지는 불이익은 더 컸다. 구둔마을영화제를 만들어 마을을 중심으로 한 영화축제의 본거지로 삼으려 했던 멘땅에 헤딩한 4년간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나가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스스로 하고 싶다." 강릉 등 0 영화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지원도 없이 내 자비로 일구어 냈지만 2회째에는 나를 초청하지도 않고 유명 연기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들은 유명한 영화, 유명인들을 마을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절망 속에서 내가 할 일은 그동안 만든 마을영화의 대중창작의 핵심을 책으로 남기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그 책을 단 3달 만에 마무리했다. 항상 그 부족함에 낯 뜨거울 뿐이다.
책을 내는 데도 난관이 있었다. '마을영화', '돌탑영화'라는 개념을 출판사에서는 내 동의도 없이 '독립영화'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작가가 원고에 새로운 개념의 틀을 버젓이 써놓아도 책 판매를 생각해서 익숙한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는, 지금도 이해 할 수 없는 황당한 고집이었다. 그만큼 지식인들은 기존의 문화인식의 틀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늪이 있다.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와 마찬가지로 관객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마을영화는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념과 성찰의 창작물이며 로컬의 집단이야기가 핵심이다. (참고글)
어느 시간이 지나면서, 근본적으로 상품이 가지는 수직적 분업 구조와 관객 대상의 상품적 스토리텔링이 '파시즘의 문화' 혹은 '왕조문화의 한 파편'으로서 작동하는 미디어 시스템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대가 왔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품 문화와 대결하는 미학적 선언 없이는 불가능했다. 탈자본, 탈스타, 탈상품적 스토리로 로컬적 가치를 드러내고 문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나는 감독이다'라는 놀이 슬로건을 넘어 십시일반 공동창작, 생활창작의 가치를 일상에 정착시키려는 '우리 모두 창작자이다'라는 슬로건으로 설득하는 시도를 해야 했다.
2009년, 5월 30일. 나는 그동안 다닌 마을과 어이들 주민들과 함께 만든 40여편의 이야기를 담은 『떠돌이 감독의 돌로 영화만들기 』라는 단행본을 냈다.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내 책을 보고 연락이 왔고, UCLA 영화과 대학원이나 미국 주요 메이저 영화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국으로 찾아왔다. 한겨레신문등 5개 주요일간지에서는 전면 기사로 등장했고, KBS 『책 읽는 밤』에서는 단독 게스트로 초대받아 40분간 내 책을 소개했다.
5월 오프 앤 프리국제영화제에서 '신지승 감독 전작전' 과 "신지승의 마을영화"라는 제목으로 특별 세미나가 열렸고 일맥아트상을 수상했다. 연이어 교보환경상 ' 문화 생명 부문 대상'을 수상 했다. 당시 상금이 5천만 원이었다. 쌍둥이 아이들이 태어나 끼니를 걱정 할 정도로 고달팠던 시간이었기에 그 모든 것이 너무 드라마적이었다. 10년을 발품 팔고 다닌 시간을 3개월만에 어설프게 정리한 책 하나가 가져 준,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항상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올바른 '대중창작' "생활창작'의 구체성을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많았다. 마냥 아이들이 영화를 만들었다 , 노인들이 영화를 만들었다 를 넘어서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그들이 우습게도 영화를 만들었는데 영화는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아 " 지역적 상상력의 드라마가 상품적 스토리와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궁금함을 재촉하는 문화가 될 리가 없었다.
자신들도 하지 못한 것을 가능케 한 주체를 향해 , 존중과 놀라움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이가 운 좋은 기회를 만난 것처럼 그 표피만을 소비하고 있었다. 조각보 창작 방식의 '대중창작'의 핵심을 전달하기에는 대중언론은 한계가 있다. 더불어 내 능력의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공적인 일을 하는 데 있어 유, 무명은 나름 큰 결과를 만들어 낸다.
내가 만든 마을과 마을영화제에서 내쫓겼지만 책을 나오고 난 뒤 많은 마을에서 마을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2010년 세계마을영화축제를 양평,인제에서 , 홍천에서 아시아 다문화 영화제 등 다양한 지역에서 마을영화를 만들어 갔다. 무명의 탈출이 바로 유명이 되는 건 아니다 .10년 동안 뿌린 씨앗이 이제 열매를 맺었는지 모르지만 꽃은 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