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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들이 내 영화를 버렸다

by 신지승



쌍둥이가 태어났다.


2011년. 쌍둥이 남매, 아들과 딸은 내 인생에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10년을 넘게 벼랑을 오르는 듯한 곳에서 만난 꽃 두 송이, 기대하지도 않았고 느껴보지도 못한 감동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아이들의 태어남은 나를 더 꿈꾸게 했다. 아이들이 태어 나자 확정된 문광부 지원금 5천만 원 양 0군 연 지원금 1천만 원 등을 반납해 버렸다. 그들은 앞으로 지원사업 하기 힘들 거라며 철회하기를 원했지만. 먹고사는 문제의 다급함보다 자존감을 챙기는 게 더 필요했다.. 개인방도 없는 강원도 시골마을 공부방에서 월 100만 원도 못주는 스텝들에게 그들의 성과를 위해 불필요한 잔소리 하면서 산다는 건 끔찍했다. 나도 그들도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앞 뒤에 메고 촬영을 하러 다니고 그것으로 쌀을 구했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자 이 마을 저 마을로 자랑하듯 데리고 다녔다. 우포늪에서 이인식 선생에게 독수리 먹이 주는 법을 배우게 하고, 정봉채 작가 집 근처에서 함께 마을영화제를 , 제주도 4·3의 마을 북촌리에 가서 마을 아이들과 동네 친구가 되기도 했다. 속초에서는 직접 여섯 살 아이가 카메라로 촬영하며 마을과 어울렸고, 태백에서는 마을 회의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촬영 기량을 뽐내던 그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자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잣대와 아이들의 변화


"앞으로 커서 영화 할래?" 하면 어느 날부터 울어버렸다.

영화라고 하면 시골 할머니와 가족들과만 찍는 것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많은 마을을 다니는 게 나의 작품이 되었다. 이건 작품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지만, 그 자체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족쇄 같은 것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라서 난 더 행복했다.

편집하는 속도보다 촬영하는 마을의 속도가 더 빨랐다. 심지어 돈이 없는 마을은 내 돈까지 내어 촬영을 했다. 또 한 마을을 영화 마을로 만들기 위해 4년이 넘는 시간을 어떤 공지원도 없이 시간과 땀과 돈을 들이기도 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그들의 나와 다른 방향이었다.


나도 왜 그렇게 실속을 차리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실속을 차렸다고 해도 꼭 위대한 작품을 만들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그들을 인형처럼 더 부렸을 수도 있다.


난 이 자체가 거대한 이야기이라는 생각이다. 가공되지 않은, 언젠가 몸이 움직이기 힘들 때 바로 그때 앉아서 편집만 하면, 수많은 작품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라는 걸 믿었다. 작품이란 촬영을 넘어 맥락화하고 해석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또 집에 불이 나 많은 촬영본이 불타 버렸다.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았다. 난 하늘이 내 작품을 보고 싶어 연기로 그 영화들을 가져갔다고 믿어야 했다. 그렇게 믿지 못하였다면 나는 미처버렸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세상의 잣대였다. 그렇게 좋아했던 영화 촬영이 알고 보니 아빠는 실제적으론 스타와 연기자의 세계에도 끼지 못하는 왕따 처지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아 가고 있었던 걸까.


나의 아이들


시골에서 부산으로 온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자랑했을 것이다. "우리 아빠는 영화감독이야!"

하지만 똑똑한 도시의 친구들은 이리저리 검색해서 울 아이들에게. "그게 영화야? 너 아빠가 감독이야?"

그랬을 것이다. 이런 조롱 어린 대접은 나야 무수히 받아 본 것이지만 그걸 내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받는다는 건 가슴이 아팠다. 자랑스러워 했던 아빠가 도시로 오니 아이들에게도 깔보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6학년 아이에게는 감당 하기 어려운 숙제였을 것이다 . 아이때 우러러 의지하던 아빠가 이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의지할 구석이 없어졌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혁명의 실패 만큼 절망적인 경험이다.

그 후 아들은 넷플릭스의 영화들만 줄기차게 봤고, 딸은 유튜브만 줄기차게 본다. 심지어 아빠의 영화가 영화제에 초대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영화인지 어떤 관심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다렸지만 아이들도 이제 아빠는 되돌아올 수 없는 낭떠러지를 걷고 있다고 포기 한듯 보였다.

아이들의 눈빛에서 아빠를 보는 안타까움을 보았다. 중학교에 올라가자 간혹 아들은 자기를 속였다는 듯 나를 불신했다 .나의 가장 큰 행복이 나의 가장 깊은 아픔이 되는 날들 .


마흐말바프 가족과 우리의 차이


유명한 마흐말바프 가족이 있다. 아빠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중심으로 한 가족이 감독, 배우, 작가이다. 아내(마르지예 메슈 키니), 딸(사미라, 하나), 아들(메흐디) 등 가족. 우리와 다르고 같다.


어머니 마르지예 메쉬키니는 <내가 여자가 된 날>이라는 아름다운 영화로 데뷔했다. 큰딸 사미라는 <사과>에 이어 <칠판>으로 20살에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오후 5시>로 심사위원상을 연이어 받았다. 막내딸 하나는 <오후 5시>의 캐스팅 과정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담은 다큐멘터리 <광기의 즐거움>으로 14살의 나이로 베니스의 초청장을 받았다. 그리고 아들 메이삼은 이미 몇 편의 영화를 통해 그들 영화에 없어서는 안 될 편집기사가 되어 있다


어쩌면 마흐말바프 가족의 영화는 내가 초기에 꿈꾸던 영화였다.

나는 마을의 에너지를 그 자체로 끌어올리는 상태에서의 이야기이다.. 물론 그 마흐말바프 가족도 전문 배우가 아니라 주민이 배우로 등장한다. 하지만 네오리얼리즘처럼 소수이며 적극적인 연기 의지를 가지고 캐스팅되는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기를 하지 않으려는 노인을 찾아간다. 연기를 못하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머물게 한다.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극영화에서 그게 가능한가 묻지만 그게 나에게 창작이다. 모든 선택은 그들의 손에 있다. 심지어 내가 정해놓은 규율은, 하다가 재미없으면 그만두어도 좋다고 해야 한다. 애써 끌어들이지 않는다.


흩어진 별들의 선을 긋고 맥락화시켜 가는 이야기가 다. 나에게도 그게 제일 어렵고 제일 힘든 것은 사실이다.

마을에 도착해서 마을을 떠날 때까지 나는 고행하는 수행자가 되었다.

낮의 별을 찾는 사람


나는 밤에 반짝이는 하나의 별이 아니라, 낮의 태양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별들을 찾는다. 낮의 별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을 속의 평범한 사람들, 그 보이지 않는 별들의 선을 이어가는 것이 나의 영화였다.

아직은 아이들에게 이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일까. 그들의 즉흥성, 참여성으로 지역적 이야기가 거저 나오기를 기대하는 도박성 아닌가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것이아먈로 진정한 리얼리즘이고 진정한 삶의 누에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며 앞으로는 경험하지 못할 창작이라는 생각이다.

카메라 앞에서 주민들이 자신의 일상이나 기억을 '연기'하며 이야기 자체를 함께 창출한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영화제 수상이나 예술적 명성을 포기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내가 만나는 마을과 사람의 그 량은 바로 내가 나에게 수여하는 월계관이었다



감독의 메시지 vs 삶의 메시지


우선 뛰어난 감독의 통찰이나 철학의 메시지나 이야기를 내세우지 않고 그들의 일상에서 사회적 메시지도 나올 수 있다.

감독이 주는 메시지인가, 그들의 삶이 주는 메시지인가가 다르다.

미학에 있어서는 마흐말바프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다. 메시지는 궁극으로 자기 안에서 나와야 한다.


예를 들어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사과》는 여성과 억압 문제를 다루면서도 감독 개인의 시선이 강하게 각인된다. 하지만 나의 작품에는 마을을 왔다 갔다 하는 암캐 복실이와 '양반'이라고 해서 기대하고 시집와서 보니 그 마을에서 가장 못 사는 집이었다는 할머니의 푸념, 그리고 농촌 체험 마을로 성장하려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 난 그 총체적 억압을 이야기하지만, 기존 영화가 주는 그런 방식의 메시지와는 결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돌탑처럼 주민들이 하나하나 쌓아 올린 조각 같은 서사. 하지만 누가 이 결과물을 '작품'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단지 나에겐 귀한 작품이다 , 이제 작품이라는 틀도 표준화되어 있고 획일적인 기준으로 볼뿐이다. 또 작품이 아니면 어떤가? 그건 성공, 출세, 경쟁에서 이긴 사람으로만 판단하려는 문화에서 나온 것과 다르지 않다.


80년대의 이념적 볼모인가


물론 나는 80년대의 이념적 볼모인지도 모른다. 그 당시 모독을 견디어내며 너희와는 다른 민주주의자임을 여태껏 보이고 싶은 것인가. 너희들은 정치편향적이며 계파적이며 폭력적이다라며.


나는 여전히 문화민주주의가 중요하며 정치는 분열만을 가져다줄 실속 없는 천적놀이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엘리트 머리에서 나온 모든 것은 경계를 만들고 적을 만든다 라는 그리고 창작도 은연중에 그 천적 놀이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정치적 화두의 볼모가 되기도 한다.



내 아이가 거대한 상업 투기 자본이 만든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질서 속에서 벗어날 길 없음이 안타깝다.

자본의 세례를 기다리며 의존적인 창작을 할 것인가, 그 자본의 틀에서 죽을 때까지 돈에 얽매이지 않는 창작을 할 것인가. 용기가 필요했다. 제갈량의 오륜거가 아니라 그 머리와 지혜가 필요했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내가 당한 모욕을 잊지 못하여 바둥거리는 지도 모른다.
진실을 무시한 초등학교 선생의 폭력 ,운동권의 교조적 논리와 언어, 스타 연기자의 이유없이 얻은 듯한 눈부신 웃음과 부유한 제스처, 정치의 견고한 무리성 , 돈의 기세, 유명 감독의 허술한 권위만 남은 오만한 상상력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는 질긴 승부욕으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세계는 늘 중심을 차지하였다. 나만의 섬을 만들고 싶었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그 누구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 숲 속의 작은 섬.

어쩌면 모욕의 기억에서 비롯된 고집스런 도피와 반전을 꿈꾸는 , 뒤엉킨 항해였는지 모른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내가 받은 심성으로 땀 흘리면서

살았고 끝까지 그렇게 가면 되는데 그게 내 아이들의 슬픔으로 인해 더 어려워 진다.

내가 동아줄이 되지 못하고 나의 동아줄이기만 했던 내 아이들. 비록 영화를 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아빠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지난 시간을 뽐내며 이 세상을 살게 할 수 있을까?

내 영화에 대해서는 조금도 애정과 관심을 철회해 버린 아이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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