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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만리장성과의 대결이었다

by 신지승

만약 봉준호감독이 강원도 어느 마을 주민들과 만든 무명시절의 마을영화가 있다면 ,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더라도 그 마을로 가야 온전한 감독 버전을 볼 수 있다면? 그 마을 내의 허름한 창고극장이나 달밤아래 마을광장, 양평의 주요 상영관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유명한 감독의 마을영화가 있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마을영화는 전쟁과 가난을 힘들게 버텨온 주민들에게 바쳐진 일종의 헌정영화 같은 것 일것이다.

영화의 수익을 온전히 마을의 수익으로 삼도록 한다면.(장예모는 인상 공연에서 나오는 수익의 7%를 가져간다.)


2014년 지방 선거에 출마한 나의 선거 공약의 하나였다. 물론 그냥 그 마을을 배경으로 했다거나 개성 있는 할머니 한 사람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집으로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했다고 해도 그 마을을 찾아 가게 하는 동력은 약하다. 공간과 사람들이 빚어내는 로컬적 집단 혹은 공동창작의 과정이 결정적이다. 물론 당시 유명 감독 중심뿐 아니라 당시에는 한국의 감독들을 양평군 100개의 마을로 각 초대하여 영화를 만들도록 집중 지원하고 차별적이고 경쟁적인 문화브랜드를 가지도록 하자는 영화중심 지원공약이었다.

빠짐없는 마을 주민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그 마을의 공간과 그 사람들의 협력, 땀 그리고 창작의 비밀을 드러내는 그런 마을이 100개 정도 한 시골 군 단위에 있다면?


사람의 한평생, 사실 뭐가 있겠는가? 자기가 살아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며 살고 싶어 자식 낳고 , 자기의 꿈 남기는 거지 그래서 두 번째는 마을기록소였다. 세번째는 모든 개별적인 삶을 담는 마을 자서전이었다.

몇몇 삶의 성과를 낸 사람들 중심의 자서전이 아니라 마을이라는 단위로 75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삶의 기록을 남기겠다는 게 공약이었다. 왕과 귀족 양반들의 문화유산만 남아있지만 이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의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양평평민실록'같은 것이기도하다 .


당시 장예모의 인상 시리즈가 중국에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오고 있는 시기였다.

나는 유세 중에 그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중국의 미학과의 전쟁이다!''양평만의 미학을 찾고 살리자'

중국 장예모기획의 인상 프로젝트는 자연을 배경으로 소수민족의 전설을 기반으로 소수민족들이 야외 뮤지컬 공연에 참여하며 1년 수익이 120억 원이었다.


경제선진국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한국자본주의 , 일 년 수익이 6-7백만 원도 안 되는 가난하고 무기력한 농촌의 노인, 조손가정의 아이들을 위해 중국 영화인이 벌인 인상 프로젝트는 한국의 한류와는 다른 방향인 바닥을 향해 흐른 거대한 문화예술적 성과를 만들어 내고 그 수익의 일부를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지방 정치권력이 할 수 없었던 마을 경제 활성화, 일거리, 문화복지등을 문화를 앞세워 7만 명 인구의 작은 농촌마을을 참신하게 브랜딩 해보자는 나의 선거 공약은 그런대로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갔다. 그런데 선거기간 중에 그때 세월호 사건과 65세 노인노령연금발표가 있었다.


나는 장예모의 인상 프로젝트를 언급하면서 거리에서 연설했다

"중국식 사회주의의 획일적인 꼭두각시예술 만들기부터 자본, 소수, 보여주기의 극치를 구현한

半 공동체 예술이다. 만리장성 미학이다 .

중국 계림인구 2만 중에 몇 명이나 그 공연에 참가하는가?

결국 모두의 예술도 아닐뿐더러 개개인의 얼굴 없고 지문 없는 유령일 뿐이다.

그건 기존의 자본예술의 블록버스트를 야외로 옮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생활인 동원해서 럴리우드영화를 흉내 내고 있을 뿐..

돈이야 한 달에 하루 4억, 한 달 120억을 벌어 일거리, 복지 이루었다 하지만

공동체의 문제 해결했다고 믿지는 못하겠다. 돈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지는. 되어서도 , 될 수도 없는 법이다.

마을영화는 빠짐없는.. 바닥 모두의 영화다.

정치가 가능하지 않은 한 사람 한 사람 마을민 모두를 드라마 안에서

놀게 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일거리, 복지가능한 공동체 그릇이 될 수 있다 .최소한 공동체의 마중물은 가능하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미학이며. 순수하고 소박한... 작고 일상적인 기억의 극치다.

농촌 마을 ,귀촌인-원주민 간의 갈등도 숨어 살고 원주민 사이, 세대 , 계급 존재한다.


예술이 왜 정치를 뛰어넘고 앞장서야 하는가? 바로 공동체다..... 지금의 상부는 양당 지역은 일당 독점 정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정치가 아니라 개인 예술이 아니라 공동체 예술이 그걸 할 수 있다. 마을영화 밖에는 고령노인이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 공동체는 과거의 봉건성과 전통의 복원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공동체이다.

새로운 수평의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못한다면 돈, 일거리 복지 그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마을영화는 공공 미술, 공공연극과는 달리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가치와 의미로 존재하려면 오랜 중국의 가치를 뛰어 넘엉 진짜 이기는 거다.

그 하나가 규모의 예술, 대표성의 예술, 돈의 예술, 숫자의 놀음예술이다.

낡고 봉건적인 마을을 털어낸 일상의 공동체가 정치보다 , 경제 활성화보다 일거리보다 우선이며 원동력임이다 "

장예모는 단순히 민속을 무대화한 것이 아니라, 현지인의 노동·노래·몸짓을 거대한 스펙터클 속에 편입시켜 내었지만 마을영화(돌탑영화)는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작의 주체, 감독·배우·기록자의 위치를 동시에 점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연설을 마치자 듣던 한 남자가 고향을 묻는다.

옆에서 듣고 있던 주인아주머니 "여기 사람 아니잖아 나가요..."

남자 넷, 그 상황 앞에 놀라 아무도 말을 못 한다.

그냥 밀려 나왔다.

15년을 양평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마을영화를 만들어 냈다. 그래도 텃세다. 20년 더 살아도 타향 취급 할 것 같다.

텃세를 떠나 양당구조와 토호세력들의 지역에서 정책이나 비전들이 끼어들 틈은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마을 회관 안의 치매 할머니..

뭘 목에 걸고 다니냐 묻는다.. 내 이름 적힌 내 목걸이를 보고 내가 자기 아들이란다.

그런데 옆의 할머니가 선거 때문에 이름 붙이고 다니는 거예요 설명해 준다

갑자기 그 말 한 할머니 타박한다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그게 시골 경로당 풍경이었다

그래도 이건 약과다

그냥 네댓 명 있어도 대화상대 찾지 못해 벽 보고 마냥 앉아있다.

면벽 수행 따로 없다.

정치가들은 복지관건물을 지어도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는 법이다.

어제는 또 한 편의 에피소드가 끼어들었다

더운 날씨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할아버지

낮술? 인가 싶었는데..

어디 가냐 물어니 나보고 여기가 어디냐고 되묻는다

어디서 왔냐니깐 충주에서 왔는데 53년 전 포병부대에 근무했는데

근처 마을에서 자기에게 잘 해준 어느 사람을 찾아왔단다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어서..

올해 연세가 몇이시냐? 89 살 이란다.


투표날이 4일 남았는데... 차마 그냥 갈 수 없어 그 마을을 찾아갔다.

게이트볼 치는 할아버지들 앞에 데려놓고 떠나려는데..

여기가 아니라 아래마을이란다.

그 마을 가서 보니.. 더워서 밖에는 사람 찾기 힘들다

어렵게 비슷한 나이 대로 보이는 한 사람을 찾아

- 여기 오래 사셨어요? 묻자 말자 들려오는 첫 말

"여기가 어디예요? 근처에 역 없어요?" 이게 무슨 코미디인가

유령처럼 무작정 떠 다니는 노인들..

둘을 강제로 친구 맺어주고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내 일이 있는데 돌봄에 희생될 수는 없었다.

혹 싶어 충주에서 온 할아버지 손에 내 연락처를 쥐어준다

무슨 일 있으면 다른 사람 핸드폰으로 저에게 전화하세요. 헷갈리지 마시고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 돈 만원을 쥐어준다.

고맙다고..

아 뭔지 모를 애잔함이 밀려온다.


나의 경우 개인적 차원의 예술이 아니기에 공동체와 대중을 직접 상대하는 작업을 바라보는 정치적 시선이 존재하기도 했다.

어차피 한국의 문화예술권력들은 음양으로 정치권력과 연결, 커넥션 되어 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과 이념적 동질성 , 선거운동을 도와준 예술가들에게 우선적으로 결합하고 배려할 수밖에 없다.

5톤 트럭을 선거 사무실로 삼고 유세차도 없이 뛰어다니면서 많은 걸 보았고 느꼈다.

만리장성만큼 높고 긴 지역의 벽, 그 두께와 깊이를 경험했다.

창작자는 그 어떤 것에서도 느끼고 배우고 상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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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집에 불이 나고 불탄 곳에서 끄집어낸 멀쩡한 6미리 촬영테이프들이 있다.

8년이 지났지만 차마 그 테이프를 돌려볼 생각을 못했다. 바쁘기도 했지만 아픈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어 무엇이 남았고 무엇이 사라졌는지 가려야 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다. 이제 6미리 플레이어를 사서 오랫동안 봉인된 시간을 마주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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