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비는 뛰지 못한다

by 신지승


개인 작품만을 만드려는 일개 창작자가 내 꿈은 아니었다. 새로운 민초형 영화적 장르를 정착시켜보려고 수십 년간 바둥거렸다. 20년간 전국의 100여 개가 넘는 마을에 살며 참여를 통한 연결에서 나오는 그 공간과 사람의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음을 깨달은 죄밖에 없다. 그게 오래동안 '이야기'에 대한 고민이 마주한 끄트머리가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집착과 집념, 열정만이 일을 성사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을 나는 뼈저리게 배웠다.

기다림의 도박

2009년, 첫 책이 세상에 나왔다.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은 나의 책을 전면기사로 실었고, KBS 「책 읽는 밤」에도 출연했다. 어느 모 기관에서는 농림부 장관 앞에서 브리핑을 하게 해주겠다며 내 책 10권을 요청했다. 그 택배를 부치며 내가 꿈꾸던 '민초영화의 마당'이 이제 더 넓게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오지 않았다. 날짜까지 정해졌던 농림부 월례회는 연기되었고, 그 뒤로 아무 연락도 없었다. 이후에도 유명 신문들의 전면기사와 보안여관 초대전, 교보생명문화대상, 오프앤프리국제영화제의 '신지승 감독전'까지 이어졌지만, 현실은 변할 듯하다가도 변하지 않았다.

생활 속의 공동창작, 대중상업영화와 작가주의를 넘어서는 생활인 중심의 극영화—그 실험은 결국 뿌리내리지 못한 채 로또를 기다리듯 전국을 쌍둥이 아이들과 맴돌았다.

그 긴 기다림의 도박 속에서 아내는 아무도 찾지 않는 용문산 숲속극장 마당에 블루베리를 심었고, 나는 돌벤치 옆에 늙은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내가 꿈꾸는 건 결국 정치적 권력에서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보이지 않는 연결망

정책, 공모, 심의, 지원금—그 모든 구조 안에는 보이지 않는 연결망이 있었다. 문화예술위원회와 교육진흥원 사이의 나를 향한 모종의 결탁으로 인해 지원금이 통제되자 나는 대들었고, 결국 그 사업을 마지막으로 문화예술지원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2014년, 스스로 출마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치란 게 비전도 아니고 정책 선택도 아닌 거대한 프로파간다 세력들의 복마전 같은 것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탈정치적 마을영화의 본질을 지키려면,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는 창조를 엘리트 개인의 것으로 만들었지만, 타인의 삶을 도구로 삼는다. 사회주의는 평등을 말했지만, 개인의 창작자유를 정치의 대의로 희생시킨다. 마을돌탑영화는 두 극을 동시에 넘어서는 제3의 예술을 꿈꾸었다.

별자리 창작 — 위계 없는 이야기의 탑

무명한 사람들의 감정과 기억, 말과 침묵이 돌처럼 쌓여 하나의 이야기의 탑을 이루어가는 것은 여전히 나에게 환타지다. 그 돌탑은 위계 없이, 감성적 집단지성, 곧 개인과 공동체의 기념비이며 새롭게 만들어가는 마을의 마중물이다.

각기 다른 사람이 하나의 별이고, 그 별들이 서로를 향해 미묘한 궤적을 그릴 때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던 무명의 개인과 마을이야기가 태어난다. 주인공도 없다. 밝기와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관계의 선이 전체의 형상을 만든다.

이 관계적 이야기는 경쟁의 논리도, 획일의 평등도 넘어서며, 각자의 차이가 하나의 공명으로 이어지는 순간, 비로소 만나지 못했던 이야기예술이 된다.

이야기의 주권은 더 이상 감독이나 작가,글로벌 플랫폼의 것이 아니다. 참여자, 마을 사람들, 지역의 기억이 곧 창작의 주체다. 그들의 삶이 에피소드이고, 그들의 감정이 연출이다. 별과 별이 서로를 찾아 하나의 하늘을 만드는 일—그것이 진정한 마을영화이다. 나는 이것을 마을의 축제, 사람의 축제로 만들어냈고 여전히 만들고 가고 싶다.

주유천하 — 100개 마을을 떠돌며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은 권력의 울타리 밖을 떠돌았다. 공자, 묵자, 장자, 한비자—그들의 사유는 길 위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군주를 설득하려 떠돌았지만, 동시에 세계를 향한 사상의 실험자였다.

나 또한 마을영화로 20년이 넘도록 전국 100여 개가 넘는 마을로 주유했다. 권력을 향한 유랑도 아니었고, 낮은 사람들을 향한 순례였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위나라로 옮겨갔듯, 나는 한 마을에서 또 다른 마을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때의 사상가들보다 더 좁은 세계에 갇혀 있다.

그때는 열네 나라가 있었지만, 오늘의 예술가는 두 개의 문만을 마주한다. A당의 문화정책인가, B당의 문화정책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양쪽 모두에게 배제된다. 이것이 한국 예술의 구조적 비극이다.

나는 정치가 아니라 마을을, 제도가 아니라 마당을 택했다. 여전히 21세기 세계의 영화는 낮고 가난하고 우울한 사람들 속에서 태어나고 그 속에서 즐겨야 한다고 믿는다.

지방권력의 그늘

오늘날 예술은 중앙의 권력을 넘어 지방권력의 그늘 아래에도 있다. 지자체는 새로운 후원자이자 새로운 통제자다. 정책은 단체장의 색깔에 따라 요동치고, 예술문화는 그 흐름에 종속된다.

나는 여전히 두꺼비처럼 뛰지 못하지만 멈추지 않고 기어갈 뿐이다. 지금은 산속 그늘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다.

광화문에서, 그리고 코로나

코로나가 한국을 공포에 가두기 며칠 전, 광화문에 가서 사람들에게 하소연이라도 해야지 생각했다. 왜 굳이 이 영화가 우울한 마을을 회복시키려 하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는 건지. 이승준 감독이 카메라를 가지고 나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코로나의 공포로 광화문 앞에 사람이 사라졌다.

용문산 오두막이 불이 나 주차장에서 전전할 때 아내가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것으로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두꺼비는 알아서 세수도 안 하고 양치질도 안 하고 절망스런 모습으로 시상대 옆에 있었다.

두꺼비는 뛰지 못한다. 너무 많은 허튼 꿈을 가지고 살다 보니 다른 개구리처럼 날쌔지 못하다.

침묵당한 영화제

2020년인가? 5개 도시—서울 녹색당, 대구, 제주,인제,전북 진안 등에서 14개국 코로나 테마 영화제를 개최했다. 한국의 어떤 국제영화제도 발휘하지 못하는 기동력있는 기획이었다. 연예인들의 가십거리 기사는 도배하던 한국의 신문들은 단 한 줄의 단신으로도, 온라인 기사로도 그 영화제를 알리지 않았다.

한 배급회사 대표가 공인된 국제영화제 외에는 영화부 기자들이 영화제 행사를 다루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이야기를 내 앞에서 했다. 지자체의 후견, 영화권력의 네트워크, 자본의 크기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나는 더욱 혈혈단신의 위력을 보여주겠다는 오기가 발생했다. 한국 언론의 편협과 졸열을 끝까지 증거로 남길 것이다.

AI가 활활 불타는데 왜 굳이 혼자 출품부터 초청까지 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다양한 생존방식이 예술의 무늬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나는 여전히 힘겹게 기어가고 있다.두꺼비처럼 자식을 끔찍히 생각하는 생명체도 없다.그들의 긴 대장정은 모택동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강원도를 떠나기로 했다. 내 아이들둘만 남은 시골분교에 나와같은 외로운 고립을 이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떠나던 그 달 , 경향신문 0기자(영화부 기자가 아니었다)가 다시 전면기사로 마을영화를 달래주며 도박의 기다림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물론 신문기사가 유효한 에너지일 수없지만 이 마을영화는 내 개인이 포기하거나 집착해야 할 그런 건 아니다. 길 위에서 나쁜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는 공포를 떨치고 별과 별이 서로를 찾아 하나의 하늘과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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