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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하 Jun 16. 2021

그냥 미운 오리 새끼

청풍명월의 고장, 유난히 산도 많고 정도 많은 충청도에서 태어난 영철이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순박했다. 존경받는 교육자이자, 한없이 온화한 부모님 밑에서 어려서부터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랐다. 이미 차고 넘치는 부모님의 사랑 덕분일까, 영철이는 당시에 누구나 갖고 싶었던 장난감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런 아이였다. 아니 사실은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욕심을 철저하게 억눌렀다. 정말 그 흔한 반찬 투정 한번 부린 적 없고, 무언가를 사달라고 떼를 쓴 적도 없다. 영철이의 어머니께서는 동료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재직한 교직을 미련 없이 내려두셨다. 오랜 시간 기다려온 늦둥이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이미 그녀에게 영철이는 앞으로의 인생, 내일, 미래 그 자체였다. 그녀는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그에게 주고 싶은 절실한 마음으로 큰 고민 없이 직을 던졌고, 그 결과 아쉬움보다는 설렘과 기쁨이 더욱 컸다.  


영철이는 또래에 비해 유난히 큰 덩치를 지녔고, 동내 어르신들에게도 예의도 바른 아이였다. 다만 남들에 비해 약간 돌출된 구강 구조 탓에 어려서부터 '오리'라는 별명을 자주 듣고는 했다(또래 친구들은 '오리 새끼', 줄여서 '오끼'라고 불러댔다). 그는 농촌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그 흔한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일 정도로 마음이 여렸다. 분명 그때는 그랬다. 그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푸근한 핑크빛 구름에서 하루 일과의 보람을 느꼈다. 아니 보람이라는 표현보다는 감사함을 느꼈다. 어쩌다 한번 사 먹는 추파춥스 막대사탕이 그의 유일한 일탈이었다. 그는 비록 어렸지만 인생이라는 길가에 놓인, 흔히 보고도 지나치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보물들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사랑을 받은 만큼 베풀며, 설사 소소한 행복이라도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그런 아이였다.


어느덧 영철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그리고 그해 여름 어느 날. 영철이의 아버지는 당숙 어르신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알리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매일 출근할 때 입는 주름진 정장을 입고 마당으로 나온 아버지는 묵묵히 하늘을 본다. 시골의 밤하늘은 유난히 어둡고 차분했다. 어머니와 함께 서둘러 길을 나서며, 영철이에게는 평소 좋아하는 짜장면을 사 먹으라며 삼만 원이라는 거금을 쥐어주신 아버지는 그렇게 떠나셨다. 하지만 영철이는 집에 있던 라면을 끓여 먹었다. 삼만 원은 영철이에게는 너무나 큰돈이었고, 이만 원은 어머니의 서랍 속에 조용히 넣어두었다. 잠시 잠을 청한 영철이는 이윽고 엄청난 소나기 소리에 깬다. 온 세상을 뒤덮은 이 소리가 홀로 남겨진 적막보다는 포근했는지, 다시 잠에 든 영철이의 다음날 아침은 무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영철이의 부모님은 전날부터 이틀간 밤잠을 세우며 운전하던 화물차 기사의 잠깐의 피곤함으로, 단지 아주 잠깐의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 기사가 청한 휴식에, 돌이킬 수 없는 찰나의 편안함에 의해 영원히 잠들게 되셨다. 늦을 수도 있으니 먼저 자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던 영철이는 다음날 생전 처음으로 점심에 눈을 떴다. 다른 이에게는 유난히 화창한 날씨의 평범한 하루였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하루, 세상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당시 영철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걸려올 전화기만 바라보며 그냥 있었다. 초초한 불안감이 이때 금 엄습해왔지만, 그의 마음에는 무언의 희망, 믿음이 더욱 컸기에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서울에 사는 작은 삼촌이 갑작스럽게 집을 찾아왔고, 조용히 영철이를 안아주었다. 그제야 저녁이 왔다. 끔찍한 아니 너무나 깜깜한 어둠이 그들을 찾아왔다.


작은 삼촌은 오래전 서울로 상경한 영철이 집안의 엘리트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국내 유명한 우수 학교를 졸업했다. 한 때는 잘 나갔던 여의도 증권맨이었던 삼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직장을 그만두고,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강북의 한 조그마한 재래시장에 터를 잡은 그는, 2평 정도 되는 조그마한 가게에서 오늘도 동내 아주머니들에게 웃음과 젊음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비록 노총각이지만 다년간 자취생활로 단련된 그의 뛰어난 요리 실력과, 형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그리고 책임감이 영철이를 극진히 돌봤다. 영철이는 어느새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많이 힘들고 외롭지만 그래도 큰 형 같은, 때로는 아빠 같은 삼촌이 곁에 있어 늘 든든했다. 하지만 영철이는 오늘도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삼촌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괜히 나 때문에 삼촌이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이다.


어려서부터 들었던 오끼(오리새끼)라는 단어는 더 이상 영철이에게 친근한 별명이 아니었다. 단지 남들보다 조금 앞니가 튀어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시작된 작은 림은 "그냥 이 새끼에게는 그래도 된다"는 무언의 커다란 규칙과 아이들의 놀이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처음에는 소소한 장난에도 웃어넘기는, 한 없이 착한 영철이를 많은 친구들이 좋아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짓궂은 장난 아니 폭력에도 전혀 저항하지 못하는 그는 이제 그저 하나의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친구들의 강요로 구입한 스마트폰은 그의 지옥을 일상까지 확장시켰다. '오끼(별명)'를 불렀을 때 1분 내 '꽥꽥'이라고 대답하지 못하면 다음날 더 아프게 맞았다. 변기 물에 빠진 추파춥스 먹이기, 심지어 오끼의 속옷 색깔 확인하기 같은 창의적인 미션들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철이는 그냥 있었다. 곧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니 보다 정확히는 이들 무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일한 희망을 가슴속에 품으며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끼의 다섯 마리 친구들이 영철이의 보금자리에 찾아온다. 갑작스럽게 친근하게 다가온 이들 무리는 영철이 집에서 함께 라면도 먹고,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왜 삼촌이 언제 오시는지를 자꾸 확인하는지, 왜 남의 집 안방에 문을 잠그고 들어가는지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삼촌은 할아버지 때부터 전해온, 채 한 줌이 되지 않는 금붙이와 적지 않은 현금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영철이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달라 보이지 않는 평범한 하루가 그렇게 또 지나갔다. 그 일이 있고부터 한 달 뒤, 영철이는 삼촌의 가게에서 처음으로 돈을 꺼냈다. 여전히 영철이는 욕심이 없는 착한 아이였다. 이 돈은 영철이를 위한 돈이 아니었다. 수 백번을 망설였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냥 삼촌만 모른다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불현듯 갑자기, 어머니 서랍 속에 넣었던 이만 원이 생각나버렸다. 그리고 울었다. 그냥 울었다. 영철이는 지금 어떤 이유 때문에 우는지도 몰랐다. 그냥 너무 서글펐다, 모든 것이.


다음날 오후 체육 시간. 친구들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뛰어가는 번잡한 시간, 찝찝한 땀냄새들을 피해 영철이는 조용히 옥상으로 올라갔다. 영철이는 지금 아무런 생각이 없다. 그냥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고, 가슴은 먹먹해졌다. 평소 좋아했던 하늘보다 무심코 먼저 바라본 땅 끝, 그 시선 끝에 다섯 명의 무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너무 행복해 보였고, 영철이는 그게 너무 화가 났다. 아니 원망스러웠다. 나는 저런 사악한 무리와 달랐고, 저들과 결코 섞일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저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영철이가 꿈꾼 것은 자신을 괴롭힌 무리들에 대한 잔혹한 복수가 아니었다. 그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 그의 마음속 가장 큰 바람은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영철이에게는 그동안 억지로 상상했던, '내일은 다행히 행복하겠지' 같은 마음속 헛된 희망 아니 망상들이 이제 더 이상 샘솟지 않았다. 그냥 머릿속이 무거웠고, 자연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였다. 영철이는 잠시 잊고 있었던 따스한 봄 햇살과 향긋한 바람을 마음껏 느끼며 두 날개를 활짝 폈다. 허공을 날고 있는  찰나의 순간이 오히려 너무나 편안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물 밑에서 뒤뚱거리는 오리가 아니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하늘을 활공하는 고귀한 고니였다. 다시는 저 간악한 무리들이 자신을 속박할 수 없으리라. 이제 앞으로는 그 누구도 자신을 오리라고 놀리지 못하리라.


※ 학교 폭력은 마음의 상처로 남아 평생의 트라우마가 됩니다. 당사자는 결코 도움을 구할 수 없습니다, 주변인들의 깊은 관심과 관찰, 과감한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 금번화는 덴마크 작가 한스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The Ugly Duckling)에 영감을 받아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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