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는 뜻이 있다
2021년 10월 말 갑작스러운 심장통증으로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받았습니다.
현재 건강히 회복 중에 있으며
이 글은 그 당시 기록과 그림, 기억을 더듬어 새롭게 쓰는 글입니다.
일반외과에 근무하는 박 집사의 결정적 조언을 받았습니다.
박 집사는 응급실에 내원한 그때부터 과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살뜰히 저의 상태를 챙겨주고 있었습니다.
"만약 저희 아버님이 이런 상황이라면 저는 두 번 고민 없이 외과적 수술을 권할 것입니다."
병원으로 내원하기 전부터 이런저런 조언과 도움을 주신 그의 아버님은 출석하는 교회의 장로님이시며
외과 닥터이십니다.
'두 번의 고민 없이......'
그러나, 또다시 흔들리는 마음. 수술에 대한 공포, 두려움과 경제적 염려
이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방치한 내 무기력과 이 상황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교차합니다.
또, 다시 닥터인 사촌동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몇 번에 걸쳐 본인의 병원과 지인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제게 성심성의껏 의견을 줍니다. 그러나 결국은 박 집사의 의견과 일치합니다.
사촌동생의 마음씀이 느껴집니다. 감사밖에 할 것이 없었습니다.
넉넉한 위로와 지지.
수많은 교우들이 기도했고 가족들의 눈물의 기도가 쌓였습니다.
내게 냉정한 결정을 요구한 심장내과의와 사뭇 다른 피붙이와 공동체의 사랑이 깔린 답변들은
수술을 결정해야 하는 나와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위로를 건넵니다.
어찌 보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흉부를 절개하고 심장을 멈춰야 한다는 두려움이 큰 나머지
혹시나 하며 계속 다른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 선택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줄 사람, 내게 위로를 건넬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의 터널에서 흔들리는 나를 향해 기도와 위로의 손을 내미는 수많은 벗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위로자는 항상 내 속에 항상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주는 위로와 비교할 수 조차 없는
막다른 길목 그 끝에서는 진정한 위로자
피 흘리는 그분이 서 계셨습니다.
인간의 무지함으로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가 친히 우리 가운데 당신의 위로자를 보내어 그가 견디고 인내한 것을 보여주며
그 손의 못 자욱을 보여주며 위로를 건넵니다.
"나를 보라" 내가 다 이루었노라.
이 고난의 끝을 지나면
내 삶이 위로자의 삶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눔도, 선행도, 선한 그 무엇도 무력했던 내가 위로자가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은 당신의 못 자욱을 내게 새겨
나를 위로자로 삼으시려 함을 아닐까
내 손목에 못 자욱을 새겨낼 수 있을까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 서는 시간이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내게 닥쳐온 선택의 유혹
'어느 길이 편한 길인가'
마치 내게 아직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내 귓가에 유혹합니다.
그런 길은 없습니다. 두 가지의 길 모두가 사실은 고난의 길
병원에 입원을 준비하며 챙겨 온 책 한 권
옥한흠 목사님의 '고통에는 뜻이 있다'
몇 번이나 읽은 책이지만 이 순간 표지만 봐도 눈물이 흐릅니다.
고난의 뜻을 찾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주여 두렵지 않게 하시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는
하루하루가 되게 하소서.
고난은 성숙의 다른 말이라 합니다.
고난은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보는 눈을 줍니다.
작은 딸은 혼자 집에서 아빠가 기르던 식물에 물을 주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엄마가 드실 김밥을 싸서 병원에 들릅니다.
서울에 있는 큰딸은 아침저녁 근심으로 기도합니다.
노부모님들은 좌불안석 새벽기도에서 눈물로 자리를 적십니다.
병원에 쪽잠을 자는 아내의 누운 육신이 애처롭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주여 내게는 처음부터 선택권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회복케 하시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살겠노라 다짐할
자격조차 내게 없음을 깨닫습니다.
살리시는 이도, 죽이시는 이도 다 하나님입니다.
눈물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내게 찾아왔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22장 4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