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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Sep 29. 2023

학교로 가는 예술가들

"꿈을 나누는 예술"  세미나 강의록

이 글은 지난 9월  19일 [상동 꿈꾸는 예술터]에서 진행된

학교연계 예술프로그램 “꿈을 나누는 예술” 에서 진행된

예술강사 세미나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꿈을 나누는 예술" 사업은 대구시 수성구 상동에 위치한 수성문화재단 "상동 꿈꾸는 예술터"에서 지역 내 초등 학교에 "예술강사"를 파견하는 사업입니다.

전국최초로 진행되는 이 사업에 강사로  참여하는 예술강사는 국악, 가죽공예, 향수(조향) 공예 강사 세분이며

이들은 2023년 2학기 동안 교과연계 국악교육, 진로체험공예수업, 학부모대상 체험공예수업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이 사업에 투입될 예술강사님들과 지역 예술커뮤니티 "꿈꾸는 예술터"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 사업이 가지는 의미와 향후 전망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자 하는 취지로 이루어진 특별강의를  정리했습니다. 열정적으로 강의를 듣고 참여해 주신 세분의 예술강사님들과 상동 꿈꾸는 예술터에 감사를 드립니다.







학교로 가는 예술가들


반갑습니다.

오늘 제 강의가 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커뮤니티센터에게는 미래와 방향 제시, 예술가들에게는  지역과 공생하며 행복한 예술활동을 이어가는데 작은 도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강의의 제목은 "학교로 가는 예술가들"입니다. "꿈을 나누는 예술" 사업의 핵심은 지역 예술가들이 지역의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강의의 시작을  "예술가들이 왜 학교로 가는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예술강사들이 학교로 가는 것, 예술강사들이 학교로 파견되어 강의하고 수업하는 프로그램은  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악강사 파견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는 학교마다 양질의 예술강사를 파견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꿈꾸는 예술터"사업 역시 예술강사들을 학교로 파견하는 것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과연, 이 두사업의 차이점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중복되는 아류의 사업에 지나지 않을까요?

오늘 강의는 이 질문에 대답을 구하는 것으로 진행할까 합니다.


지역예술 활성화 사업

꿈꾸는 예술터에서 진행하는 금번 예술강사 파견사업은 커뮤니티센터 예술가 학교가 공통적으로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지역이라는 단어입니다.

꿈꾸는 예술터에서 진행하는 예술강사 파견사업은 지역 커뮤니티가 지역을 근거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지역의 학교로 파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즉, 교과과정에 충실한 예술과목의 강의보다도 지역을 공통의 분모로 연계하여 소통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궁극적으로 학교에서 진행된 예술강의가 다시 지역 커뮤니티 센터로 돌아오고 학생들에게 국한되었던 수업이 학부모들에게 확장되는 것이 가장 모범적인 형태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술강사들은 학교가 요구하는 커리큘럼위주의 교과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향후 연결 확산을 염두에 두고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합니다.

즉, 금번 사업은 예술을 가르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술을 지역을 근거로 공유하고 향유하는 플랫폼을 형성하는 계기적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최근 메스미디어를 장식하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묻지 마 칼부림' 코로나 이전 한국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혐오'였습니다. 과도한 경쟁의 끝에는 혐오만 오롯이 남아 결국은 묻지 마 칼부림 같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또한, 정치적 갈등은 전 국민을 갈라 치기 하며 진실의 문제조차 정치적 입장으로 치환시켜 버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도 자기 혁신에 관한 책들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성공과 끝없는 혁신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최근에는 '소확행'이라는 신조어를 비롯하여 '워라밸' '스라벨' '

'딩크' '욜로' 등과 같이 삶과 일이 통일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삶과 일을 절충하며 살아야 한다는 풍조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전망으로 혼돈 속에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의 등장과 함께 '메타버스' '드론' '사물인터넷'과 같은 말들이 요동칩니다. '빅데이터' '지율주행' '드론'과 같은 미래의 이야기 들이 현실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특히, 생성형 Ai의 등장은 미래에 대한 확신보다 오히려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혐오와 갈등 정치적 갈등의 현실 속에 끝없는 자기 혁신의 요구 속에 삶과 일을 절충하는 우리들 앞에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 문장이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고 있지만 우리는 결코 행복한 미래보다 암울한 현실과 절충하는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어두운 현실이 앞에 있습니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은 인구의 소멸과 함께 성장이  멈추고 있습니다.  흑백의 시대는 다원화의 시대로 바뀌었고 극단적으로 진리를 상실했습니다. 경쟁의 끝에 몰린  시대 악순화의 시대가 우리 앞에 열려 있습니다.


해원상생

해마다 봄이 되면 "해원상생굿"이라는 현수막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서도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해원상생입니다. 원한을 풀고 모두가 win-win 하자는 뜻입니다.

한국사회의 근 현대사는 그야말로 아픔과 질곡의 역사였습니다. 일제의 압제 속에 해방이 되었지만, 좌우의 이념대결과 분단,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으로 엄청난 일들을 우리는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간 전쟁 이후에도 이념이라는 칼날아래 모두가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독재정권은 가난을 벗어나고자 성장의 길로 농촌 공동체를 몰아세웠으며 이로 인해 대가족 중심의 농촌공동체는 하루아침에 분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경제 성장을 이루어 냅니다. 이러한 성장을 우리는 '압축성장'이라 부릅니다.

역사의 질곡과 압축성장은 우리에게 '정서' '감정'을 모조리 앗아갔습니다. 특히, 이념의 갈등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경험하고 각인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성장의 뒤꼍길에 억울한 죽음과 억압, 상실, 고통등의 감정은 모조리 수면아래 묻어두어야 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처와 아픔들을 예술가들과 종교인들이 묵묵히 치유하며 회복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국가가 해야 할 치유와 회복을 예술가와 종교인들은 그들의 업보처럼 감당하며 우리의 힘든 과거를 견뎌내게 했습니다.

예술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게 합니다, 깨어진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은 예술, 정서의 영역밖에 없습니다.


창의의 시대

경제성장은 우리의 고민을 소비의 문제에서 분배와 잉여의 문제로 바꾸었습니다.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고 복지의 사각을 없애는 것이 전체적인 생산을 늘리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본소득이라는 말이 코로나 이후 자연스레 우리에게 받아들여진 것도 사실입니다.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4차 산업혁명은 인간에게 잉여의 시간과 부를 줄 것인지 우리의 남은 일마저도 빼앗아 버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산업화와 경쟁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부터 탈출구가 필요하며 그것은 독점에서 공유로 개발에서 재생으로 분업에서 협업 융, 복합의 시대로의 전환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공유에서 공생으로

공유와 재생은 필연적인 과제입니다. 잉여생산을 공유를 통해 적합하게 분배하는 일, 개발로부터 재생은 트렌드가 아니라 생명의 필수요건입니다.

자율주행이라는 기술의 진보로 공유모빌리티는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자율주행 기술은 단순히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로와 자동차 연료등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집집마다 자동차를 둘 필요가 없고 거점에 주차된 자율주행 모빌리티를 부르는 것으로 모든 것은 해결될 것입니다.

이는 현재 산업구조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차세대기업들 역시 산업화의 끝에서 만나는 공유와 재생이라는 긍정적 시그날을 과거의 방식으로 독점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는 인간의 지혜와 공유를 넘어 공생으로 전환하는 시대적 어젠다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기술의 진보의 혜택이 특정집단의 독점적 부를 이어갈 것인지 모두에게 공생을 성물 할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

생성형 Ai의 등장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디지털의 등장으로 우리는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착한 가짜와 나쁜 진짜를 두고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올 지 모릅니다. 팩트를 구분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합니다. 정서와 감정 예술도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감동을 주고 소통이 이루어지는 예술의 생산을 인공지능은 이미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창의적 편집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의 편집은 속도와 더불어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생각되던  창의성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공지능의 활용과 동행이 예술가 혹은 정서의 영역에서 더욱더 중요해지는 이유입니다.

치유와 회복 감동과 소통마저도  이루어지는 인공지능의 시대, 예술가의 고민은 깊어만 갑니다.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국민의 행복은 국가의 존립 이유입니다. 지난 시기 경제 성장과 빈부의 격차, 복지에 밀려 차압당했던 예술과 정서가 국민의 행복을 만드는 유일한 길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얼마 전부터 국가는 문화를 통해 귀농귀촌을 독려하고 문화를 통해 전통시장을 활성화하려 합니다, 정서를 통해 복지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성장을 위해 획일화, 표준화했던 것으로부터 특수성과 다양성이 중요한 것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행정공무원이 하는 것보다 예술가들이 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하기 시작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문화예술교육사'라는 제도도 시행되고 있습니다.

정서와 감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국민의 행복은 국가의 존립 이유 이니까요.


예술, 예술가

"샘"이란 작품으로 뒤샹은 전통적인 예술작품의 모든 틀을 깨버렸습니다. 존 케이지는 4분 33초라는 작품을 통해 청중과 연주자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습니다. 개념예술의 등장은 전통적인 예술가의 노력과 기능에 대한 모든 관념을 깨 버렸습니다.

뱅크시는 그의 작품을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에 몰래 전시하는 것으로 기존 예술에 대한 저항을 표현했습니다.

'도대체 예술의 가치는 누가 정하는 거지?' 이러한 뱅크시의 질문은 존케이지가 허물어 버린 장벽을 넘어 '우리 모두가 예술가"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예술가는 결코 기능이나 예술적 능력을 기반으로 관객, 청중에게 성과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술가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듣는 사람입니다.

사회적 억압과 공동체의 분해 예술의 계급화를 통해 예술의 향유자 자격조차 박탈당한 모든 이들에게 예술을 돌려주어야 할 때입니다.

학교로 가는 예술가는 예술을 가리키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의 주인이 모두임을, 그리고 예술은 소통하고 대화하는 정서에 관한 가장 친밀한 것임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경험을 학교에서부터 지역사회로 확산하고 같이 나누는 일들을 조직하는 사람들입니다.


커뮤니티와 예술

 전통의 공동체는 정서와 감정 소통의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격대교육이 이루어지고, 공동체 속에서 관계와 질서를 배우기도 합니다. 상처도 받지만 회복과 치유도 이루어집니다.

이 시대의 공동체를 찾아야 합니다. 과거와  같이 지역을 근거로 한 전통적인 공동체는 비록 무너졌지만, 지역과 세대 취향과 연대감들 다양한 근거들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찾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선순환의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형성은 문화와 예술, 종교 등이 대안입니다.

지역예술커뮤니티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입니다. 지역예술커뮤니티는 지역의 문화적 예술적 자산을 찾아 주민들과  연결하고 소통하게 만들어 스스로 정서적 플랫폼이 되어야 합니다. 지역예술커뮤니티는 지역의 예술가들과 예술애호가들을 찾고 연결하고 활동하고 소통한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지역예술커뮤니티는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만나고 소통할 공간과 플랫폼이 되어야 합니다. 기존의 공적인 기관들, 학교, 행정기관, 복지시설, 도서관등에 예술가들을 연결시키고 지역을 근거로 한 연대를 형성해야 합니다.

예술강사 파견프로그램 "꿈을 나누는 예술"은 이러한 사업의 선두에 서있습니다.


지역 커뮤니티를 위하여

예술의 주인은 우리 모두임을, 공동체의 회복은 정서적, 예술적 방법 밖에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더불어 새롭게 열리는 인공지능의 시대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공유와 재생이 화두가 됨을 이야기했습니다.

공유와 재생 예술의 주인의 모두임을 알게 하는 공동체 회복의 시작이 어디인가, 바로 지역입니다.

"꿈꾸는 예술터"는  낙후된 지역에 재생 공간을 되살리고 지역의 주민들을 예술의 주인으로 자리 잡게 하여 공동체의 회복을 꿈꾸는 곳입니다. 지역의 예술가들에게 삶을 근거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과 플랫폼을 제공해야 합니다.

"꿈을 나누는 예술" '지역학교로 예술강사를 파견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선도적 사업입니다.


지역 예술가들을 위하여

강의의 첫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왜 예술가들이 학교로 가는가?"

그 질문에 답을 할 시간입니다. "학교로 간 예술가들이 다시 지역으로 주민들을 되돌리기 위함입니다."

학교로 간 예술가들이 예술의 주인이 스스로 임을 알게 하고 정서적 소통을 위해 다시 지역으로 '꿈꾸는 예술터'로 확장하고 확대되어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학교로 갑니다.

첫 질문에 숨겨진 답을 합니다. " 왜 예술가들이 학교로 가는가?"

숨겨진 진짜 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 위하여,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 예술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긴 시간 강의에 집중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돌아가셔서 좋은 예술가 예술강사들이 되어 날마다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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