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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Jan 22. 2024

김남주 시인이 차려주신 밥상

1989년 소중한 그날을 소환합니다.

            



                    자  유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1989년 봄

목동의 어느 작은 서민 아파트에서

김남주선생님을 뵈었습니다.

감옥에서 10년 가까운 형기를 사시다

막 출소하시고

병환으로 온몸 이곳저곳이

성하지 않으셨던 김남주 시인


참 치기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만 생각하고 그 끝만 바라보던 시절

1989년 변혁의 한가운데 서있던 시절

대학의 축제는 투쟁의 현장이어야 만 했습니다.

그 뜨거웠던 시절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축제를 준비하는 자로서

"이 시대 살아있는 진짜 혁명가"이신 김남주선생님이

석방되어 계신데 어떻게 하든지

모시고 강연을 한번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상상하지 도 못할 기획을 했습니다.

군사정권의 악랄한 폭정을 견디다

병마를 얻어 결국은 9년 하고도 3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시인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가지 이유로

두문불출 외부 활동을 일절 하지 않으셨던

시인

아니하기 힘들었던 시인


수십 번의 연락과 몇 번의 통화를 거쳐

학교 축제의 강연을 요청드렸지만,

완곡하게, 그러나 완고하게 거절을 표하시는

김남주 시인의 마음을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꾸역꾸역 몇 번의 거절과 또 몇 번의 연락을 통해

결국은 자택으로 방문을 약속받고

막무가내 자택으로 찾아갔습니다.

저와 같이 동행했던 친구는

김남주 선생님께 강의를 약속받지 못하면

집밖으로 나가지 않겠노라 선언하며

선생님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온화한 미소

그 서슬 퍼런 압제에 맞서 싸우던

혁명전사는 온 데 간데없고

따스한 미소를 지닌 왜소하고 가냘픈

병든  시인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좁은 거실 바닥에 앉아있는

구부정한 허리, 검게 그을린 얼굴

검은 뿔테 안경 너머 빛나는 안광

작은 거인 한분이

그 작은 집안에 홀로 웅크리고 계셨습니다


치기 어린 젊은이들은

이 병든 혁명가를 몰아세웠습니다

1989년 봄, 당시 시절은

1987년으로부터 이어진 변혁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게 빠르게 흘러갔으며

여전히 군사정권에 의한 요주의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물리적 억압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는 병든 시인을 기어이

대학교 노천강당에 세우고 싶었습니다.


"밥이나 한 끼 하고 가시게나 “

병든 시인은 밥솥에서 온갖 잡곡으로 지어진

거칠디 거친 밥 한 공기

김치, 푸성귀로 구색을 갖춘 작은 소반을 차려내셨습니다.

잡곡밥은 젊은 우리 에게도 거칠디 거칠어

오래도록 씹지 않으며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당시 췌장암으로

투병하시면서 거친 잡곡밥으로 건강식을

힘들게 챙기시고 계셨습니다.

오전 10시쯤 방문한 시인의 집에서

홀로 투병 중인 시인에게

밥 한 끼까지 얻어먹고

오후가 되어서야

결국 우리는 원하던 것을 얻어서

그 집을 나왔습니다


며칠 뒤 김남주시인은

석방 이후 한 번도 외유하거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강연하신 적이 없었던

그리고 그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던 정보당국의

감시 속에서

먼 지방까지 결국 걸음 하시고

젊은이들의 목마를 타고 수많은 젊은이들에 둘러싸여

노천강당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던지 기억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그분을 모셔와서

수만 명 앞에  집회 현장에 내 세웠다는 것에

뿌듯해했습니다.

아마, 그날 그 현장에는 학생들만큼이나 많은

사복경찰들이 함께 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시인과 소식을 전하며 살지 못했습니다.

단 한 번의 만남과 소찬

단 한번 공식 강연장에서의 인사

그 후, 그분의 투병과 고독한 부음을 들었고

죄스런 마음을 가슴 한편에 쌓아두고 지내 왔습니다.

향년 사십팔 세


세월이 흘러  시인이 떠나갔던

그 나이보다 훨씬 더 살아버린

2024년의 어느 날

학생들과 종강 후 뒤풀이 중에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유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모든 것을 바쳐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역사와 민족이 함께 기뻐하고

응원하고 지지를 표할 때 그때 얻을 수 있는 감정 혹은 상태"

라 이야기했습니다.


문득, 이야기를 듣는 젊은 학생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흐르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먼저 죽어간 혁명가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자유하지 않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시인이 그토록 이야기하던 자유는

거짓 자유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도

지금의 푸른 청춘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고

눈가에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나는 자유하는가

또다시 물어보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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