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끝나지 않은 비극 그리고 공포
나는 민주당원도 어떠한 정당의 당원도 아닙니다,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보주의자라는 용어는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나는 진보주의자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딱히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에서는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도 진보주의자 취급을 받습니다. MBC뉴스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 지지자로 여겨집니다. 아니 사실은 좌파라 불립니다. 적어도 대구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점이 아주 오른쪽에 있습니다.
대구사람들의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아주 쉽게 표현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같은 것이라는 확신도 있겠지만, 다른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 증명하는 과정 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나도 같은 편이라는 확신을 주는 과정, 그래서 대구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을 더 확고히, 더 선명히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망해도 국민의 힘을 찍는다" 이 말을 하는 진짜 속내는 생존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구에 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을, 대구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올려주고 싶습니다.
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최근 까지도 공포체험의 장소, 심야괴담의 소재로 알려져 내려온 곳이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 대구한의대 인근지역이다. 이곳은 한때 인터넷에서 안경공장 학살로 알려지기도 한 경산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얼마 전 까지도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아 유골들과 학살의 흔적들이 널려져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각종 괴담과 공포체험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했던 것이다.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은" 1950년 7월 대구인근 경산의 한 코발트광산에서 국민보도연맹원과 요시찰대상자 그리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수감자 약 3500명이 학살된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약 1년 전부터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전향자들을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미명아래 '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단체의 가입을 독려하기 위해 식량을 무상으로 배급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좌익의심자들을 '보도연맹'에 가입 감시하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에 걸쳐 "보도연맹"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공식적인 사망 추정자는 약 5,000명이지만 유족회등의 추정은 적어도 10만에서 30만에 이른다고 보인다.
대전형무소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곳에서 학살은 진행되었으며, 대구지역은 가창일대에서 수천 명이 학살되었으며 "경산코발트광산"에서는 4,5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경상도 일대에서 자행된 학살은 한국전쟁의 진행과 함께 가장 늦게 진행되었고 따라서 가장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만인 1960년 6월 유족회를 결성할 수 있었다.
이들은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웠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강제 해산시켰고 당시 유족회 간부들은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위령탑은 쇠망치로 부서졌다.
이렇게 학살이 10년도 채 안 되어 다시 잊히고 갱도 중 제2수평굴 입구는 새마을운동 당시 농업용수를 위해 콘크리트 수중보로 만들어 막아 놓는 등 폐쇄된 상태로 있었으나 남은 제1수평굴 입구는 뼈가 나오는 동굴이라고 하여 주변 대학교 학생들은 그곳이 어떠한 장소인지도 모른 채 공포 체험을 위해 쓰는 등 문제가 심각하였다. 적어도 2002년까지만 하더라도 제1수평굴 입구 기준 갱도 입구가 큰 안전장치 없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2005년 기준으로 제1수평굴 입구는 철문으로 굳게 막아 놨고 앞에 학살지라고 안내판도 붙어 있다. 싸이월드 사진 하지만 무속인이나 폐허 덕후,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지 주변에 양초, 과자봉지, 술병, 담배꽁초, 콘돔 등의 쓰레기와 과거 유해 발굴했을 때 사용하던 도구들이 돌아다니고 발굴 현장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으며 컨테이너 안에는 유해가 계속 보관되어 있다. 기사 CCTV를 달아놓은 제2수평굴 입구와는 달리 제1수평굴 입구는 사유지라 관리될 법도 하지만 해가 떠 있을 때는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경비원이 제재를 하더라도 밤에는 감시가 안 되어서 그런지 인근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오토바이나 자동차 등을 타고 찾아와 잠금장치를 파손한 후 갱도 내로 들어가는 등 소란을 피우는 경우가 많다. 폐허 마니아가 가서 찍은 영상이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꽤 나오고 이 중 2개는 후술 할 제보자들에서도 나왔다. 영상
2000년 3월 경산유족회가 재결성(기사 1, 기사 2)되어 위령제를 다시 지내기 시작[24]했다. 2001년 2월 경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보도연맹과 관련된 취재 중 이곳을 발견해 민간 차원의 유해 발굴을 제안해서 준비한 후 동년 3월 9일부터 발굴을 시작했고 6시간 만에 퇴적물을 치우고 제1수직굴에서 70m 아래에 있는 제2수평굴 입구를 발견했지만 콘크리트 옹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다음 날인 3월 10일에 다이너마이트 발파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정한 뒤 3월 11일 오후 2시 45분에 콘크리트로 막아놓은 제2수평굴 입구를 폭파해 개방했다.
2005년 5월 3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해 동년(2005년) 12월 1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치되었고 2007년부터 정부 주도로 유해 발굴이 시작되었다. 2009년 11월 17일 과거사위원회는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은 군경에 의한 학살이라고 판정했다.[25] 하지만 예상되는 유골의 절반 가량도 채 수습되기 전에 정권이 바뀐 후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해산되면서 수습 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많은 유골이 이곳에 남아 있고 수습된 유해는 유족회가 마련한 컨테이너 안에 방치되었다.
2008년 무렵 인터불고 경산컨트리클럽 진입로를 개설하고 안경공장 건물을 파티마요양병원으로 리모델링하면서 상당량의 유해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수습된 유골들도 정부 계약에 따라 특정 대학[26]의 박물관을 거쳐 2019년 세종시 추모의집에 임시 안치되었지만 당시 대학은 유골이 있다는 이유로 괜히 혐오 시설이 될까 봐 자신들의 학교 이름을 절대로 노출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등 이 보도연맹 문제가 여전히 사회적으로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또 잊혀 일종의 흉가 체험 장소가 되어버린 비극을 보여주었다.
컨테이너와 뼈 한 상자는 2014년~2015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광장에 전시된 적이 있다. 모르고 보면 전혀 설명이 없기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전시실에는 과거사위원회 조사 당시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촬영한 영상을 상영했다.
2016년 11월 유족회가 제2수평굴 근처에 비를 세웠으며 위령탑과 주변 시설이 정비되었다. 이후 제1수평굴 근처에서 지내던 위령제를 제2수평굴 근처 위령탑에서 지내게 되었다. 입구는 철문으로 폐쇄하고 CCTV를 설치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나무위키>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은 미군정시절 대구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져간 10월항쟁의 기억으로 인해 더욱더 잔인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지역으로 항일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 반일주의 우국지사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지역으로 이승만정권으로부터 감시와 요주의 시찰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가창골과 경산코발트광산의 학살은 더욱더 규모가 컸다.
특히,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국적으로 진행된 보도연맹에 대한 예비검속과 학살은 전쟁의 양상과 함께 더욱 잔인하고 악랄하게 학대되었으며, 학살의 대상도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한 보복으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거창, 그리고 대구시 가창골, 경산 코발트광산등에서 행해진 학살이 그러하였다.
또한, 위의 <나무위키>에 따르면 4,19이 후 유족회가 결성되었지만, 박정희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고 심지어 유족회 간부들은 구속, 실형을 구형하였다.
이후 대구 경산 지역에서 코발트 광산 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는 것조차 금기시 되고 2000년 까지도 이 일대가 방치되고 괴담의 장소로만 알려지게 되었다.
2000년 유족회가 다시 결성되었지만, 이후에 도 끝없이 유해가 소실되었으며 마침내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치되어 2009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 공식 판명이 되었다.
하지만, 2010년 정권이 바뀌면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해산되고 유골은 절반도 수습되지 않은 채 갱도에 남아 있으며 그나마 수습되던 유골들도 컨테이너 안에 그리고 아직도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10월항쟁의 도시 대구는
이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더 잔인하고 더 공포스럽게 학살 당했습니다.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임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코발트광산에 대한 언급, 가창골 학살에 대한 언급은 아직도 금기시되고 있다. 그것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학살이라 인정되었다가도 또다시 정권이 바뀌면 광산의 갱도 너머로 또다시 진실을 묻어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 유족회는 박정희에 의해 그야말로 잔인하게 해산되고 구속되어 2000년 까지도 언급 조차 할 수 없는 사건으로 묻어 버렸고, 2000년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이제야 학살의 전모가 드러나는 가 했지만, 그마저 또다시 수면아래도 진실이 묻히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이미 7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유족들 조차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으며, 당시의 기억을 온전히 전할 수 있는 증인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은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당시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항일, 반일 독립운동을 공산주의로 매도하며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학살"을 더 욱 더 잔인하고 광범위하게 진행했으며, 그 후에도 이 사건에 대해 언급조차 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수많은 유족들은 연좌에 걸려 사회활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세월을 보내야 했으며, 대구 지역은 끝없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대구사람들은
21세기 까지도 가창골학살이나.
코발트광산 학살등에 대해 언급 조차 하지 못한
통곡의 세월, 공포의 세월을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