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체성을 고민했던 대구 예술가들
나는 민주당원도 어떠한 정당의 당원도 아닙니다,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보주의자라는 용어는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나는 진보주의 자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딱히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에서는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도 진보주의자 취급을 받습니다. MBC뉴스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 지지자로 여겨집니다. 아니 사실은 좌파라 불립니다. 적어도 대구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점이 아주 오른쪽에 있습니다.
대구사람들의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아주 쉽게 표현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같은 것이라는 확신도 있겠지만, 다른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 증명하는 과정 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나도 같은 편이라는 확신을 주는 과정, 그래서 대구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을 더 확고히, 더 선명히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망해도 국민의 힘을 찍는다" 이 말을 하는 진짜 속내는 생존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구에 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을, 대구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올려주고 싶습니다.
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지난 연재와 내용이 연결됩니다.
대구를 예술의 도시라 부릅니다. 대구아트페어가 열리는 예술의 도시, 해마다 뮤지컬축제를 개최하는 뮤지컬의 도시, 오페라축제를 개최하는 오페라의 도시라 부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저마다 예술의 도시를 이야기하고 예술의 전통을 이어가겠다 합니다.
실용적이기만 할 것 같은 정치의 세계에서 조차 비록 구호에 그치지만 예술에 대한 언급을 빼놓지 않습니다.
요즘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대구 중구청이 과거 청장시절부터 추진한 사업이 있습니다.
대구 근대사복원 사업입니다. "도심재생"이라는 단어가 들리기 이전부터 몇 가지의 갈래로 진행되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요즘 대구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 중에 하나가 "김광석길"입니다.
대구 수성교 인근 신천과 방천시장 사이의 옹벽이 있는 골목(과거명 방천둑길)을 가수 김광석을 테마로 조성한 거리입니다.
이 거리는 사실 문체부에서 진행했던 전통시장 활성화 프로그램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방천시장 활성화 프로젝트 중 일부로 처음 시작한 이 사업은 현재 방천시장은 여전히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김광석길이 살아남아 방천시장의 일부를 다양한 식당과 카페 문화거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사업은 처음 전통시장 활성화프로그램의 지원이 끝나자 시혜를 먼저 받았던 초기 예술가들이 떠나고 다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 또 다른 신진 예술가들이 그 거리에 깃들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거리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아픈 현실이 깃들여져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를 빌어 적어 볼까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하고 찾아 주는 것이 "대구 근대 골목 투어'입니다.
대구시 중구에서 한동안 진행 시키다 이제 대구시 전체의 문화 사업이 되었지만. 홍시장의 집권 후 대폭적인 예산삭감 및 문화탄압 속에 갈피를 못 잡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은 대구 근대골목투어 코스를https://www.jung.daegu.kr/new/culture/pages/tour/page.html?mc=0011(대구시 중구청 자료) 보면 5가지 코스를 나열해 두었지만 골목투어는 2코스가 기본이었습니다,
그리고 2코스의 출발점은 진골목이라 불리는 약전골목 일대입니다.
그중에서도 서상돈 고택과 이상화 고택이 사랑받는 골목 유산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진골목에는 김원일소설가의 작품 "마당 깊은 집"의 무대가 되었던 "깊은 집"도 있습니다.
2코스를 걷다 보면 세 가지가 이 골목의 핵심 내용임을 눈치채게 됩니다.
첫 번째는 항일저항의 유산입니다. 서상돈 고택과 YMCA, 만세계단을 비롯한 근대 항일과 독립운동의 유산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거리이야기
두 번째 같은 시기 기독교의 전파와 유산이 담긴 제일교회 건물, 계산성당, 동산의료원과 선교사 주택들입니다.
세 번째는 이상화고택을 중심으로 이인성 이쾌대를 비롯한 화가들과 시인 문학가들을 비롯한 예술의 전통입니다.
하지만, 커다란 이세가지의 줄기는 연관되어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기독교인들이 많았으며 교남 YMCA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예술가들도 저항의 정신을 예술에 담았습니다.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는 이인성도 대구 출신입니다. 이인성과 이쾌대는 한국근대미술의 태동이라 불립니다.
특히, 전쟁 후 월북하여 우리 예술사에서 한동안 금기가 되었던 이쾌대는 일제강점기에 대표적 사회주의 예술가이자 저항작가였습니다. 월북 후 북한에서도 화가로서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안동에서 출생한 이육사는 대구형무소에서 받은 수인번호 264가 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조선은행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참여하기도 한 그 역시 대구에서 시를 적었습니다.
운수 좋은 날의 현진건, 봄은 고양이로소이다의 이장희도 대구에서 태어나 함께 자라났습니다.
근대골목 안에는 1928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미도다방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인성, 김원일 등이 작업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무영당은 대구최초의 백화점입니다. 이곳에서 많은 작가들이 교류하였습니다. 현재 다시 그 이름으로 문화공간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근대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음악감상실, 서울의 하이마트 보다 먼저 영업을 시작한 음악감상실 녹향이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의 근현대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또 다른 기회에 적을까 합니다)
대구는 예술의 도시였습니다. 이들이 만나고 함께한 다양한 플랫폼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대구는 일제강점기 민족예술의 출발지이자 중심의 역할을 했습니다.
대구가 예술의 도시였던 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술은 원래 진보적입니다.
예술은 같은 작업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시선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새롭게 작업을 합니다.
그러하기에 예술은 진보적이라 부릅니다.
예술가는 진보적이며 예술가는 혁명가입니다.
예술가는 식민지에 순응하지 않았습니다.
대구가 대한민국 근대사의 중심에서
예술의 도시, 민족예술의 중심이었다는 말은
대구가 대한민국의 가장 진보적인 곳이었다는 반증입니다.
서두에서 대구를 뮤지컬의 도시, 오페라의 도시, 예술의 도시라 자찬한다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지금 대구는 예술이 죽은 도시입니다., 예술의 진보성이 거세되고, 예술의 저항이 사라진 관제예술이 득세하고 그마저도 홍준표시장의 집권이 후 줄어든 문화예산아래 더욱더 굴종적인 예술가들이 득실대고 있습니다.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예술단체들을 통폐합하는 만행을 저질러도 대구 예술가들은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컬러풀축제가 하루아침에 파워풀출제로 바뀌고 그 마저 시에서 내용에 개입해 들어와도 가만히 있습니다.
예술의 저항, 실험, 진보가 빠져버린 정치의 시녀로 전락하는 대구의 예술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