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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Jun 25. 2024

항일의 도시, 대구

4.   항일의 역사를  지우려는 홍준표시장



 나는 민주당원도 어떠한 정당의 당원도 아닙니다,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보주의자라는 용어는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나는 진보주의 자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딱히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에서는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도 진보주의자 취급을 받습니다. MBC뉴스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 지지자로 여겨집니다.  아니 사실은 좌파라 불립니다. 적어도 대구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점이 아주 오른쪽에 있습니다.


 대구사람들의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아주 쉽게 표현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같은 것이라는 확신도 있겠지만, 다른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 증명하는 과정 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나도 같은 편이라는 확신을 주는 과정, 그래서 대구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을 더 확고히, 더 선명히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망해도 국민의 힘을 찍는다" 이 말을 하는 진짜 속내는 생존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구에 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을, 대구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올려주고 싶습니다.

 

 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4. 항일의 도시 대구

 대구에는 대구사람들도 잘 모르는 곳이 있습니다. 조양회관이라는 곳입니다. 대구시 효목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구사람들에게는 망우당공원 혹은 동촌유원지라 불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망우당 공원과 동촌유원지를 아는 사람들도 조양회관은 거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곳에 가면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과 조양회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대구 효목동에 위치한 조양회관 타이틀의 흑백사진은 달성공원 앞에 있던 과거 사진

 대구 조양회관은 독립운동가 서상일 선생의 주도로 대구지역 청년의 민족계몽운동을 위해 

1922년 건립된 교육회관으로 '조양(朝陽)'은 '조선의 빛이 되라'는 뜻과 소망이 담겨있는 이름입니다.

 조양회관은 중국 만주 지역 등에서 활동하다 돌아와 대구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던 서상일 선생이 대구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모아 대구 달성공원 앞에 서양식으로 건립되어 민족 계몽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하다가 1984년 망우당 공원 내 현재 위치로 이전복원된 것으로 1987년부터는 광복회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상일 선생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 하자 '9인결사대'를 조직해 반일의지를 담은 선언문을 서울에 있던 각국의 공사에 돌린 후 전원 할복자살을 계획했던 '9 공사'사건의 주인공입니다. 대구에서 광복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사업을 했고,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만주에서 무기를 반입하여 일제 관서를 습격항 계획을 세우다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조양회관 곁에 서 있는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은 1945년 지역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으며 1845년 해방을 기념하여 높이가 45m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조양회관 곁에 있는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 



대구 항일, 독립운동의 흐름

여기에 기념탑 좌, 우 조형물에 새겨진 대구 항일의 기록을 중심으로 대구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거칠게 살펴보면


먼저, 대한제국기의 국권회복운동을 통해 침략에 저항해 무력투쟁을 벌인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 의병전쟁의 경우 대구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문석봉과 우채룡이 있다. 또한 애국 계몽운동은 신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으로 전개된 구국운동으로 대구광문사, 대구광학회 대한협회대구지회, 달성친목회등이 참여하였다.

 국권회복운동은 1910년대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등 투쟁으로 계승되었으며 1919년 3.1 운동과 1920년대  독립운동의 원류가 되었다.


 대구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3일 서문시장 만세시위로 시작되어 덕산정시장만세시위, 4월 미대동 여봉산 만세시위등으로 이어졌다, 만세시위는 5회에 걸쳐 약 3,200여 명이 참가하였고 그중 240여 명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또한, 1919년 3월 전국 유림대표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운동을 펼칠 때 대구 유림대표 13명이 참여하였다,


 대구의 학생운동은 3.1 운동 이후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제에 맞서 민족차별철폐와 민족교육을 부르짖으며 동맹휴학투쟁 적우동맹등 비밀결사 활동을 해왔으며 일제 말기에는 다혁당, 태극당, 무우원등 다양한 형태의 비밀결사운동, 그리고 학병거부 투쟁을 벌였다. 이는 해방 후 학생민주화 운동의 원류라 볼 수 도 있을 것 같다.

 

 또한, 대구의 항일대중운동은 대구노동공재회, 대구청년회, 대구여성회, 형평사 경북지사 등 다양한 대중운동을 벌이며 항일민족운동의 주체로 자리매김하였다.

 1920년대 중, 후반에는 달성군 소작쟁의의 농민운동과 대구신문배달부조합, 제봉직공청년회등 노동단체 결성과 파업의 노동운동, 신여성운동과 청년운동, 백정들의 신분해발 투쟁들이 펼쳐졌다, 이러한 대중운동은 신간회 대구지회의 설립을 통해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30년대 이후부터 일제 말기까지 대구의 대중운동은 침략전쟁과 강제동원에 반대하는 투쟁을 끊임없이 진행했다. 

 

 일제에 강점으로 조국을 떠나 국외 각지로 망명한 대구 사람들은 해외에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현정건과 이두산 등의 인사가 참여하였고 배천택 등 좌우합작의 대독립당 건설운동을 이끌었다, 일본에서는 유학생회와 독서회등의 비밀결사가 이루어졌고 1930년대 이후 노동운동과 반전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미국에서는 송종익 등이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더불어 항일의병투쟁의 정신을 계승하여 무장독입운동에 대구사람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합류하였다. 의열투쟁에서는 대한광복회를 중심으로 이종암의 의열단운동 1920년 서상한의 도쿄 폭탄거사추진 1927년 장진홍의 폭탄의거, 1944년 일본군부대 탄약고와 비행장 폭파계획이 있었으며, 만주 독립군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군자금 모집운동 그리고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에도 다양한 경로로 참여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항일운동기념탑 조형물 기록 인용)



 

국채보상운동의 고향 대구

 국채보상운동()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에 제공한 차관 1,300만 원을 국민들이 상환을 주도한 운동이다. 1907년 2월 21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윤필오 등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대중들의 크나큰 호응을 바탕으로 전국으로 발 빠르게 번져나갔다. 


사실 국채보상운동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 투쟁이었습니다. 일제는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을 방해했고, 모금액의 상당 부분을 일제에 의해 빼앗기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이 중심이 되어 구체적으로 항일의 불씨를 지핀 역사적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국채보상운동뿐만 아니라. 대구 경북은 수많은 우국 항일 독립지사 운동가들을 배출한 곳입니다. 항왜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실로 그 역사의 뿌리는 실로 장엄합니다.

 대한광복회와 의열단, 구한말 최초의 의병장 문석봉지사. 그리고 이육사와 서상돈  민족시인 이상화에 이르기까지 대구 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는 159명에 이릅니다. 일일이 열거하기 조차 힘들 만큼 수많은 대구 사람들이 항일 독립운동에 초개와 같이 한 몸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까지 변변한  대구 경북 독립기념관이 없습니다. 앞서 소개한 조양회관, 광복회는 국가기념관이 아닙니다. 민간이 중심이 되어 대구 경북의 자랑스러운 항일 독립 운동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항일 독립의 역사를 반공의 역사로 바꾸려는 홍준표

 수년 전부터 대구 독립기념관에 설립에 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야당 후보들이 선거공약으로 내걸기도 하고 시민단체들의 요구와 많은 사람들의 노력 속에, 2020년 마침내 가시화되어 권영진시장 재임시절 대구독립운동건립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2021년 건립타당성 연구용역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아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최근 홍준표 시장이 취임하면서 사업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항일 독립운동기념관에서 6.25와 산업화등 범위를 확장하고 "구국운동기념관'(가칭)으로 명칭도 변경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항일독립기념관이 반공기념관으로 바뀔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대구 항일운동의 시발지인 달성공원이 아니라 서문시장 인근 계성중학교로 위치마저 바꾸려 합니다.

  

 근대사 복원 사업들 속에 절묘하게 스며드는 산업화, 반공신화

 최근 대구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김광석길'과 더불어 '근대문화골목'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서상돈, 이상화 고택 그리고 제일교회와 계산성당 동산선교사 주택 3.1 만세운동길 등을 묶어 근대문화골목이라 칭하며 문화와 예술 항일의 도시 대구를 설명하는 콘텐츠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 현대사라는 미묘한 경계 속에 삼성가가 출발했던 대구의 '삼성상회' 최근 철거하게 되었지만 '순종 어가길'등 조성사업등  조선말기 일제병탄기 그리고 박정희우상화에 이르게 까지 다양한 미화를 통해 복원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달성공원 앞에 설치된 순종동상 2024년 4월 친일미화 논란 속에 철거되었다

 

 특히, '순종 어가길'의 경우 이토히로부미와 함께 지방을 순행한 순종의 어가길을 복원하고 달성공원 앞에 순종동상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시민들의 반대가 이어지자 시는 순종어가 길을 '다크 투어리즘' 차원으로 조성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조성된 순종의 동상과 어가길 어디에도 굴욕적인 순행의 슬픔의 역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결국 시민단체들의 수많은 요구와 함께 2024년 4월 순종동상이 철거되었습니다.

 

 항일과 반일, 독립의 고귀한 유산을
슬며시 근대화의 추억과 섞어놓고,
결국은 반공과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
특히, 홍준표 시장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행위들이  더욱 노골화되고 있습니다.


대구가 지닌 자랑스러운 역사적 전통, 항일과 반일 독립의 고귀한 전통을 반공과 산업화로 슬며시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도심재생사업과 관련하여

 특히, 최근 전국적으로 활발히 진행되는 도심재생사업들은 더 이상 개발과 성장의 논리로서 미래를 가져올 수 없음을 자각하고, 소비중심의 가치관을 재생과 공유의 가치로 변화하자는데 핵심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자체들이 공간에 대한 재생으로 이해하여 또 다른 재개발의 논리로 사업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대구의 경우, 이러한 도심재생사업의 가치와 이념에 대한 논의는 접어 두고라도 산업화 시대의 어두운 과거들을 추억으로 미화시키고, 벅정희시절의 독재를 정당화시키는데 감정적으로 활용하려 하는 것 같아 더욱 걱정이 앞섭니다. 

 (도심재생 사업에 대한 글은 추후 따로 작성할 까 합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분명 대구는 항왜, 척왜의 본향이었고,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본향은 대구 인근 경주였습니다. 경북으로 조금만 시선을 넓히면 경주 최부자, 대한민국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고향은 안동입니다. 왕산 허위는 구미에 기념관이 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대구 사람들은 끝없이 싸워왔으며, 특히, 대중적인 항일운동의 달성군 소작쟁의를 비롯한 농민운동,  대구신문배달부조합, 제봉직공청년회등 노동단체 결성과 파업의 노동운동, 신여성운동과 청년운동, 백정들의 신분해방 투쟁들을 통해 전국에서도 제일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항일 애국의 전통은 해방 후에도 대구를 가장 진보적인 도시, 좌익의 도시라 불렸으며 노동운동의 거점 도시로 맥을 이어가게 했으며. 이는 결국  1946년 대구 10월 항쟁으로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또한, 항일 학생운동의 전통은 전후 최초의 학생시위인 2.26 학생운동을 일으켰고 이는 결국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대구는 항일의 도시, 애국의 도시, 민주주의 도시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도시였음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은 도대체 언제부터 바뀌게 되었을까요. 누가 이러한 전통을 슬그머니 반공과 산업화로 바꾸려 하고 있을까요. 



 홍준표 대구시장은 역시나 시민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그간 시민단체와 정당들이 꾸준히 준비하고 이전 시장들이 준비해 온 대구, 경북 독립기념관 설립을 구국운동기념관으로 바꾸려 합니다.
이는 대구의 항일, 독립, 민주의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국이라는 단어뒤에 숨어 반공과 산업화기념관으로 바꾸려 한다는 것입니다.


대구가 지닌 자랑스런 항일과 독립정신을 반공과 산업화로 대치하려는 자들

이들이 바로 친일파의 후손들입니다. 아니 토착왜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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