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직도 끝나지 않은 10월항쟁
나는 민주당원도 어떠한 정당의 당원도 아닙니다,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보주의자라는 용어는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나는 진보주의 자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딱히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에서는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도 진보주의자 취급을 받습니다. MBC뉴스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 지지자로 여겨집니다. 아니 사실은 좌파라 불립니다. 적어도 대구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점이 아주 오른쪽에 있습니다.
대구사람들의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아주 쉽게 표현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같은 것이라는 확신도 있겠지만, 다른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 증명하는 과정 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나도 같은 편이라는 확신을 주는 과정, 그래서 대구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을 더 확고히, 더 선명히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망해도 국민의 힘을 찍는다" 이 말을 하는 진짜 속내는 생존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구에 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을, 대구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올려주고 싶습니다.
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1946년 10월 1일 오전 10시 반 경, 대구부청 앞에서는 여성과 어린이가 중심이 된 시민 1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 배고파서 못살겠다. 쌀을 달라" 외치는 군중 둘 운 경찰은 공포탄을 쏘며 해산을 시도했다. 같은 날 오후 대구역 광장에서 대구시투 주도로 집회가 열렸으며 노동자 500여 명을 비롯한 시민 5~6천 명이 모였다. 시민들은 "쌀배급 반대" "일급제 반대" "박헌영체포 취소"등을 외치며 경찰과 대치했다. 이날 이성옥 서장으로 명령으로 발포가 이루어지고 이후 수많은 시민과 노동자들의 희생과 함께 항쟁은 10월 8일까지 이어졌다.
특히, 시위과정에서 집단 발포가 이루어져 민간인 18명 경찰 4명이 사망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미군정의 정책실패로 인해 쌀조차 구할 수 없는 식량부족 문제와 미군정의 친일경찰의 중용 그리고 독립국가 수립의 지연 등의 정치적 문제가 결합하여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이다.
대구10월항쟁의 주역들을 흔히, "좌익" 혹은 "좌파"라 부른다. 하지만, 이들은 엄밀한 말해 항일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은 해방 이후 남북의 분단 과정 혹은 그 이후에 좌경화된 사람들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항일독립의 이념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이다. (최근 홍범도 장군에 대한 논쟁 참조)
즉, 대구10월항쟁은 해방 이후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 미군정에 의해 또 다른 점령이 이루어지고, 친일파들이 여전히 득세하며,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막아서고 있다는 것 때문에 폭발한 민중항쟁이다.
이는 미군정이 무주지(無主地)인 한반도를 점령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미군정의 법률고문이었던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enkel, 1898~1975)은 미군정이 한반도를 점령한 것과 미군정이 유일한 적법 정부임을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세우며 정당화하였다.
* 조선의 해방이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의 파기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았고, 합병 이전의 조선을 부활시킨 것이 아님
*조선의 해방이 조선인들에 의한 혁명적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음.
*조선의 해방은 연합국의 승리와 연합국의 결의에 따른 것이므로 현재 한반도는 어떠한 세력도 영향력이 없는 무주지(無主地) 임.
해방과 동시에 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적인 치안을 신속히 장악하며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전국민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또다시 친일경찰을 중용하며 해방된 조선을 식민지로 인식함을 드러내었다.
미군정은 조선의 해방을 인정하지 않고 2차 대전의 승리로 인해 획득한 무주지로 인정했으며,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의 기존 질서를 인정하며 유지하는 것을 미군정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했기에 항일독립운동세력이 아니라, 기존질서의 수호자였던, 친일경찰, 친일행정가등등을 또다시 중용하여 결국은 일제에서 미국으로 점령군만 바뀌게 되어버렸다. 거기에 조선에 주둔한 미군정의 다양한 정책들은 실패를 거듭하고 식량부족등 생존의 문제마저 위태하게 되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반역사적인 친일파 중용과 경제정책의 실패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을 오히려 친일경찰들을 통해 진압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집단발포를 함으로써 대구10월항쟁은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켜 경찰서를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하고 유치장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석방하였다.
한편, 항일독립운동가들은 새로운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꿈에 부풀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질서를 유지하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당시 좌우 모든 이념이 함께하는 거국정부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서울 보다 대구에서 먼저 이러한 미군정의 본질을 꿰뚫고 자주독립정부의 건설과 친일매국노 처단을 외치며 민중들의 피를 뿌렸다.
이것이 대구세월항쟁이다.
대구10월항쟁은 일제강점기 간 중 도도히 흘러온 대구의 항일정신과 자주독립을 위해 멈추지 않는 처정한 투쟁이라 보아야 합니다. 미군정에 의한 친일파의 중용을 바라보며 올바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열망을 구체화시키고 항쟁을 통해 몸소 보여준 사람들이 대구시민들입니다.
대구10월항쟁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대구를 넘어 경북 그리고 12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남한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미군정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이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수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이러한 대구10월항쟁은 여수순천 그리고 제주 4,3 항쟁으로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이어갔습니다.
대구시월항쟁은
대구가 얼마나 진보적인 도시였는지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10월항쟁을 기억하는 시민모임 4610>이 있다. 유족들과 함께 시월항쟁 정신을 계승하고 아픔을 기억하기 위한 모임이다.
그런가 하면 지난 2023년 (사)10월항쟁유족회, 10월문학회,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민주노총대구본부 등 65개 단체로 구성된 '10월항쟁 77주년 행사위원회'도 오는 10월 6일 중구 CGV대구한일 앞에서 '10월항쟁 77주년 대구경북시도민대회'를 개최한 뒤 문학제, 걷기, 위령제 등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행사들을 준비했다.
[출처] 대구 '10월항쟁' 77년... 역사의 아픔, 함께 나누고 기억한다|작성자 평화뉴스
특히, 대구경북작가회의는 매년 10월문학제를 개최합합니다 작가회의는 대구경북작가정신의 근원이 10월항쟁에 있음을 인식하며 지난 2011년부터 작년까지 11년째 행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구10월항쟁 이후 대구는 한국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관련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와 예비검속, 집단 학살이 이어졌습니다. 집요하고도 악랄하게 지속된 학살과 보복행위들은 대구를 점점 정치적으로 거세하기 시작하고, 어쩌면 대구의 우경화의 단초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대구10월항쟁이 공권력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결과를 발표하고 2010년 국가책임을 인정한 뒤 정부의 사과와 위령사업을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