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건국 이 후최초의 민주운동 대구 2.28
나는 민주당원도 어떠한 정당의 당원도 아닙니다,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보주의자라는 용어는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나는 진보주의자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딱히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에서는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도 진보주의자 취급을 받습니다. MBC뉴스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 지지자로 여겨집니다. 아니 사실은 좌파라 불립니다. 적어도 대구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점이 아주 오른쪽에 있습니다.
대구사람들의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아주 쉽게 표현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같은 것이라는 확신도 있겠지만, 다른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 증명하는 과정 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나도 같은 편이라는 확신을 주는 과정, 그래서 대구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을 더 확고히, 더 선명히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망해도 국민의 힘을 찍는다" 이 말을 하는 진짜 속내는 생존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구에 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을, 대구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올려주고 싶습니다.
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의 8개 고교 학생들이 자유당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해 일어난 시위다. 이 시위는 제1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시민들이 민주개혁을 요구한 최초의 시위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2월 28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해방 정국의 미군정에서 대구 10.1 항쟁[1]이라는 최초의 무장항쟁이 일어났으며 6.25 전쟁이 끝난 뒤 한반도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무위키>
대구는 민주화 역사의 몇 가지 의미 있는 역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해방정국 미군정에서 일어난 최초의 무장항쟁이었던 10월항쟁이며
또 하나의 최초의 기록이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2.28은 의거로 불렸습니다.
2.28은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지만, 곧이어 박정희에 의해 자행된
군사반란으로 2/28의 역사적 의미는 희석되고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의거 즉, 의로운 항거로 폄훼된 세월을 지나왔습니다. 현재는 2.28만 민주운동이란 공식명칭으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종전된 후 불과 얼마지 않아 2.28민주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할 것입니다. 이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와 이승만 정권의 부정과 부패 폭압은 극에 달했기에 집단적인 저항은 실로 생각 조차 힘든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대구에서 그것도 중고등학생들에 의해 이러한 민주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대구가 그만큼 진보적이고 투쟁적인 지역이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닙니다.
이러한, 민주항쟁은 곧바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결국은 이승만정권을 하야시키고 말았습니다.
대구에는 명덕로터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로터리가 아닌 명덕네거리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곳.
이곳에는 1989년까지 로터리 중간에 커다란 조형물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2.28 학생의거 기념탑(지금은 2.28 민주화운동 기념탑이라 불립니다)
기념탑은 의거 다음 해 대구시민의 성금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버스를 타고 이 길을 지날 때면 커다란 조형물이 왼쪽에 서 있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다니던 학교의 정원에도 기념조형물이 작게나마 서 있었으며,
이런 전통을 지닌 학교의 후배임을 자랑스레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이곳에는 지하철 3호선이 지나가고 있고 네거리 한편에
2.28 기념사업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억을 조금 더 이어가자면
이곳은 1987년 민주항쟁에서도 항상 이곳을 지나 반월당을 향해 시위는 이어졌으며
집회의 출발 거점이 되기도 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2.28민주운동이라 부릅니다.
1960년 2.28일 경북고등학교를 비롯한 대구시내에 있던 7개 국공립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집니다. 등교의 사유는 황당하게도 토끼 사냥, 영화 관람, 중간고사 실시 등 다양하고 어처구니없는 사유까지 있었습니다.
사실은 3,15일에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민주당 정,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당국에서 등교 지시를 내린 것입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당시 결의문중 일부
이날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을 비롯한 지역 고등학생들은 시위를 조직하고 오후 1시 학생 800명이 시작하여 많은 학생들이 합류하며 1,200여 명이 대열을 이루어 대구 반월당을 거쳐 구. 경북도청, 대구시청, 자유당 당사를 돌며 시위를 벌인 사건입니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민주운동이며 3.15 마산의거와 4.19의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자유당 독재, 그리고 영구집권의 야욕을 드러내는 그들의 온갖 악행에 고등학생이 제일 먼저 앞서 일어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대구 민주주의의 유산은 이후 박정희 정권과 신군부정권을 잉태한 고향이 되어 찬란했던 저항과 민주의 기억이 변질되고 왜곡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이 기념탑도 두류공원 한편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기념탑은
똑같은 크기에 똑같은 기념탑이지만 위압적이고 권위적으로 느껴집니다.
평상시 대구시민은 이 기념탑이 이곳에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어릴 때 교정이 성장한 후에는 너무 작게 느껴지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이 기념탑은 반대입니다.
어릴 때 오가며 보던 기념탑은
키다리 아저씨 같이 한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다리처럼
크지만 친근했었습니다.
기념탑이 앞뒤 없이 로터리의 사방에서 시원하게 보이던 탓도 있었겠지요.
사방이 뻥 뚫린 네거리, 낮은 건물들을 배경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던 그곳을 지키던
등굣길과 하굣길, 출근길과 퇴근길을 지켜주던 어린 시절의
기념탑.
이제,
낮은 언덕을 등지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지닌 채
화강암 돌계단을 밟아야만 올라갈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는 기념탑은
권위와 위엄을 장착했습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구는 기념탑이 권위와 위엄을 장착했듯이
그날 만주화의 주역들은
또 다른 권위와 위엄을 지닌 채 한 시절을 풍미했습니다.
민주화의 주역의 세대들이
기성세대가 되고 오히려 시대를 억압했습니다.
시대와 타협하고 오히려 독재의 주역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구는 한국현대사의 굴곡마다 가장 앞장서서
항쟁의 횃불을 민주의 깃발을 들고
불의와 독재에 항거했던
민주주의의 전위였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20년 브런치에 올린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쓴 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