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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Aug 20. 2024

인혁당, 그 안타까운 죽음들

10. 사법살인,  선고 후 18시간 만에 집행된 8명의 사형

개인적인 이유로 연재를 2주간 쉬었습니다. 

연재를 쉬어 간다는 것을 미리  알릴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더더욱 아쉬웠습니다.

거듭 사과와 용서를 구합니다.

나머지 연재는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민주당원도 어떠한 정당의 당원도 아닙니다,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보주의자라는 용어는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나는 진보주의자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딱히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에서는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도 진보주의자 취급을 받습니다. MBC뉴스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 지지자로 여겨집니다.  아니 사실은 좌파라 불립니다. 적어도 대구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점이 아주 오른쪽에 있습니다.


 대구사람들의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아주 쉽게 표현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같은 것이라는 확신도 있겠지만, 다른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 증명하는 과정 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나도 같은 편이라는 확신을 주는 과정, 그래서 대구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을 더 확고히, 더 선명히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망해도 국민의 힘을 찍는다" 이 말을 하는 진짜 속내는 생존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구에 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을, 대구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올려주고 싶습니다.


 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10. 인혁당, 그 안타까운 죽음들


사법살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무위키에는 사법살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죄가 없음에도 조작된 증거를 이용하여 법률에 따른 사형선고 및 사형집행을 이끌어내서 생명을 빼앗거나 유죄 선고를 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승만 박정희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사법제도를 악용하여 정권을 유지하고자 살인조차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사법제도를 통해 자신의 정적이었던 최능진을 '혁명의용군'시건으로 기소하고 전시상황을 이용해 내란혐의를 씌워 사형을 집행했다.

또한, 이승만은 자신의 정적 조봉암을 소위 진보당사건을 통해 간첩혐의를 씌워 사형에 이르게 했다. 

이 외에도 이승만은 전시상황을 통해 최소한의 사법절차조차 거치지 않은 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최소한의 사법절차조차 통하지 않고 전시상황을 활용하여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사실상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과 혼란한 정국을 이유로 형식적인 사법살인은 물론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박정희정권은 불법적인 군사정변의 과정, 그리고 장기집권 과정에서 사법제도를 악용하여 수많은 사법살인과 숱한 간첩단조작 사건과 같이 국가보안법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거나 정권수호에 활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당시 민족일보 조용수를 조총련의 세작이라 누명을 씌며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을 집행했다. 

또한, 1967년 동백림사건 그리고 1979년 유럽간첩단사건을 통해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이는 당시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앞두고 정치적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건을 통해 사법살인과 사법보복을 실행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저지른 가장 악랄한 사법살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북한의 명령을 받고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명분을 앞세워 데모를 유발하도록 계획하고 획책했다는 이유로 56명을 조사하여 41명을 구속했다. 나머지 16명은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렸다." 이것이 '인민혁명당 간첩 사건'으로 줄여서 '인혁당 사건'이라 불린다. "북한의 명령을 받고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명분을 앞세워 데모를 유발하도록 계획하고 획책했다는 이유로 56명을 조사하여 41명을 구속했다. 나머지 16명은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렸다." 이것이 '인민혁명당 간첩 사건'으로 줄여서 '인혁당 사건'이라 불린다.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에 대법원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피고인 36명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원심대로 형이 확정됐다. 그런데 선고 바로 다음날인 4월 9일 새벽 4시 30분부터 아침 8시까지 서울구치소에서 이들 8명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이 시작된 것은 형량이 확정된 지 겨우 정확히 18시간 30분 만이었다

인혁당 사건은 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1964년 박정희에 의해 진행되었던 한일회담은 이듬해 3억 달러를 일본으로부터 받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을 맺는다.

이는 전 국민들의 반발을 받게 되고 전국적으로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게 된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북한의 명령을 받고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명분을 앞세워 데모를 유발하도록 계획하고 획책했다는 이유로 56명을 조사하여 41명을 구속했다. 나머지 16명은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렸다. 이것이 '인민혁명당 간첩 사건'으로, 줄여서 '인혁당 사건'이라 불린다.

하지만 수사과정에서 어떠한 혐의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중앙정보부에서 행한 고문당한 것이 밝혀져 사건 검사들이 사직서까지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김형욱은 강제로 검사들을 서명케 하고 공소장을 변경하여 경국은 비교적 가벼운 형벌로 일단락이 되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장기집권과 함께 헌법을 개정하고 유신체제를 통해 독재를 공고화 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국적인 저항이 거세게 일어나자 중앙정보부는 시위주동자들을 간첩이라 규정하며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한다.

이 사건의 다른 표현은 '인혁당 재건 사건'이다. 중정은 이전 인혁당 연루자 8명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을 국보법, 반공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협의로 사형시킨다. 

재판은 1심부터 대법원 판결까지 10개월 소요되었으며 3심 동안 사형 판결은 변하지 않았다. 

검거부터 혹독한 고문이 만행되었고 고문사실을 법정에 증언해도 판사는 받아주지 않았다. 명백한 사법부와 권력의 유착이었다.

 

인혁당재건위 재판장면 그리고 선고 후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8명의 열사분들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8명 모두를 사형 집행 해 버린 사건

 

형이 확정되던 날, 구속 이래 1년 가까이 피해자들을 보지 못했던 가족들은 '형이 확정되었으니 면회가 가능하겠지'라고 위로차 아침 일찍 피해자들이 수감되었던 서울구치소에 면회하러 왔던 유족들은 이미 형이 집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졸도했다고 한다


 1975년 4월 9일 대법원의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피해자 8명 모두 사형장에 이슬로 사라졌으며 고문에 흔적을 감추기 위해 시신 중 송상진, 여정남 씨 두 명은 바로 화장해 버렸으며 나머지 시신들도 바로 인계 안 하고 버티다. 후에 인계한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희생양들이었으며 국제적으로도 사법살인이라고 비난받았다. 

8명의 사형수 외 7명의 무기수, 4명 징역 20년, 4명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복역했으며 징역 5년을 받은 장석구 씨는 그해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이 또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예상된다.   


8명 모두 영남 출신이며 4명은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대구경북이었다.

당시 희생당한 사형수 8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프로필의 직업은 체포 당시 기준이며 시신은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현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서도원(徐道源, 1923년 3월 28일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 당시 나이 52세, 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都禮鍾, 1924년 12월 25일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 출생, 당시 나이 50세, 삼화토건 회장)  

    송상진(宋相振, 1928년 10월 30일 경상북도 달성군(현 대구광역시 동구) 출생, 당시 나이 46세, 양봉업)  

    우홍선(禹洪善, 1930년 3월 6일 경상남도 울주군(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출생, 당시 나이 45세, 한국골든스탬프사 상무)  

    하재완(河在完, 1932년 1월 10일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 당시 나이 43세, 건축업)  

    김용원(金鏞元, 1935년 11월 10일 경상남도 함안군 출생, 당시 나이 39세,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  

    이수병(李銖秉, 1937년 1월 15일 경상남도 의령군 출생, 당시 나이 38세, 삼락일어학원 강사)  

    여정남(呂正男, 1944년 5월 7일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 출생, 당시 나이 30세,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이들 중 대부분은 현재 경북대학교와 영남대학교 출신이며, 경북대학교와 영남대학교 교정에는 8분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가  정권에 의해 강제적으로 파괴, 재설치 재파괴 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1989년부터 경북대와 영남대를 중심으로 추모비를 둘러싼 정권과의 공방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2005년 당시 관련 기사 

https://v.daum.net/v/20051207141419201


 현재, 경북대학교 교정에는 당시 사형집행되신 여정남의 이름을 딴 여정남 공원이 있으며 여기에는 경북대학교 출신 3명의 기념비가 지어져 있다. 영남대학교에서도 인혁당 추모비를 제작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경북대학교 교정에 있는 여정남공원 이곳에는 경북대출신 3분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인혁당재건위를 다룬 기사 중 하나

https://v.daum.net/v/20210208043047097


뒤늦은 진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재심이 시작되었고 '인혁당 사건을 권력에 의한 사법살인'으로 인정하고 2007년 8명의 사형수에게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 2013년 1차 인혁당 사건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1차 사건 13명 중 9명만 무죄였으며 4명은 기각되었다. 실제로 1차 사건의 주범 김영춘(김상한)은 남파간첩이 아니라 실제로 위장 월북한 북파 간첩이었다고 한다.


진보의 땅 대구

1970년대 까지, 적어도 박정희의 유신정권 시절까지 대구, 경북이 전국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박정희시절 대구는 대통령을 배출한 혜택 받은 땅이라는 논리와 인혁당 사건과 같이 처참하게 정권으로부터 탄압받고 고문받고 배척받은 곳임에 확실하다.


사형선고 후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고 시신마저 강제로 화장당하는 일은 어느 나라 역사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사건의 가족들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재심 전까지는 간첩의 가족이었고, 연좌제의 대상이었으며, 30년 동안 요주의시찰대상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인혁당에 대해 다시금 거론되기 시작한 것 역시 1987년 이후이며 1989년 당시 경북대학교 영남대학교 학생회를 중심으로 인혁당 추모비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최초의 공개적인 추모집회는 교정으로 경찰들이 난입하며 추모 관련 용품과 집기들을 강제 철거하고 학생들을 체포구금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진보의 땅 대구는 이렇게 짖밣혔다.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시신마저 찾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감과 고문과 물리적인 탄압은 대구의 진보진영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런 한편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시혜를 받는 축복받은 땅 경제성장의 혜택을 온전히 받는 지역이라는 논리, 그리고 지역감정의 고조와 함께 점점  대구는 수구세력의 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혁당 사건은
대구가 얼마나 진보의 땅이었는지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대구를 탄압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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