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태일의 고향, 대구
나는 민주당원도 어떠한 정당의 당원도 아닙니다,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보주의자라는 용어는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나는 진보주의자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딱히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에서는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도 진보주의자 취급을 받습니다. MBC뉴스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 지지자로 여겨집니다. 아니 사실은 좌파라 불립니다. 적어도 대구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점이 아주 오른쪽에 있습니다.
대구사람들의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아주 쉽게 표현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같은 것이라는 확신도 있겠지만, 다른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 증명하는 과정 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나도 같은 편이라는 확신을 주는 과정, 그래서 대구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을 더 확고히, 더 선명히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망해도 국민의 힘을 찍는다" 이 말을 하는 진짜 속내는 생존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구에 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을, 대구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올려주고 싶습니다.
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대구 인근 구미시 상모동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다닐 때까지 그곳에서 거주했다.
1937년 대구사범을 졸업한 박정희는 문경에서 잠시 소학생들을 가르치다 1940년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한다.
대구사범학교는 이후 경북대학교에 병합되어 아이러니하게도 2,28의 주역들이 탄생한 경북대학교 부속중학교 교정에는 몇 개의 기념물이 어색하게 공존하고 있다.
항일학생운동은 기념하고 옥중에서 순국한 대구사범의 다섯 분을 추모하고자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 동지 추모비 가 1973년 세워져 있고, 그 곁에 만주육군군관학교 출신 박정희를 기념하는 "내 일생 조국을 위하여"라는 휘호가 쓰인 기념비가 2005년 세워져 있다.
항일학생운동의 산실이자 2.28학생운동의 성지인 걍북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교정에 수많은 선배들의 반대와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기념물이 결국은 세워져 있다.
박정희의 친일, 반민족적 행위들과 공산이력등은 수많은 다른 분들의 자료를 대신하기로 하고, 대구사범을 잠시 거쳐 갔던 박정희는 대구의 정서와 역사성 마저 앗아가 버렸다.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교정에 있는 기념비처럼, 항일의 기억을 자신의 휘호와 산업화의 업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항일의 유산을 산업화라는 박정희의 치적으로 바꿔치기하면서 항일과 민주의 기억을 앗아가 버렸다.
하지만, 박정희가 살던 동시대에 대구에는 박정희와 유신에 반대하며 민주주의의 유산, 민족주의의 거대한 유산을 수호하며 투쟁한 역사가 시민들과 함께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22살의 젊은 나이로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청년 전태일은 대구시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많은 대구 사람들이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그의 생가를 복원하고 그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노동, 인권신장에 기여한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더 많은 대구사람들은 전태일이 대구사람인지 모른다, 아니, 전태일이 누구인지 조차 모른다 박정희는 전태일은 산업화를 가로막은 불온세력, 용공세력이라 몰아붙이고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특히나, 산업화는 박정희의 가장 큰 업적이며 이를 가로막는 노동쟁의 와 노동운동은 단어조차 불순한 것이라 취급되었다.
1970년 전태일은 자신의 분신을 통해 참혹한 노동현실의 실체를 알렸다. 유신 직후인 1973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700시간을 넘겼으며, 1975~1988년에는 2800시간을 넘겼고, 심지어 80년대 중반에는 2900시간대를 기록한 적까지 있다.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노동자들의 피를 먹고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강제징집의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팔아먹은 대가로 이루어졌다.
박정권정권의 산업화는 전 국민의 노동의 대가를 가로채고 강제징용자들, 위안부, 강제징집병들 태평양전쟁의 희생자들의 전쟁배상금을 가로채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산업단지등 생산기지는 서울을 제외하고는 경상도 지역에 집중되었다. 마산자유수출지역이 그러하고, 포항, 울산이 그러했다. 그러나 이는 박정희를 배출한 지역적인 어드벤티지가 아니라 수출입에 유리한 항구지역들이 경상도 지역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경상도 지역에 집중된 산업단지들은 해당 지역이 경제적 혜택을 누리게 되었으며 이는 전라도 지역에 상대적 박탈감을 주었다.
하지만, 농촌의 분해를 통해 대도시로 유입되는 노동인력들은 연평균 2700시간 이상의 혹독한 노동을 감당했으며 저임금과 참혹한 노동환경등은 지역의 어드벤티지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전태일과 같이 더 많은 인력들이 더 많이 고향을 떠나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산업화의 미명아래 희생되어 갔다.
대구 경북은 물론, 전국의 모든 농촌이 분해되고 모든 공동체들이 분해되어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 저임금 노동자로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다만, 대구경북지역은 지리적 여건으로 기간산업들이 유치됨으로 경제적 혜택을 먼저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혜는 노동자 중산층에 돌아간 것이 아니라. 매판재벌들과 박정희 정권의 조력자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매판재벌, 박정희 정권의 조력자이자 수호자들, 잔존 친일파들의 인맥이 되살아나며 TK, PK에 상대적으로 집중된 것 역시 사실이다.
어쩌면, 이 과정에서 경상도 지역은 정권의 동역자이자 기득권이라는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실질적인 혜택은 받지도 못하면서 기득권이라는 착각 속에 실상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 빈 밥그릇의 수호자수호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박정희는 집권 후 자신에게 돌아오는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라는 의심을 벗어나기 위해 더욱더 가혹한 반공정책을 편다. 이는 10월 항쟁의 주역인 노동운동의 맥이 유유히 흐르는 대구지역의 노동운동을 더욱더 잔인하게 탄압했고, 노동운동은 곧, 공산주의자라는 등식을 들이대며 보다 가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집권 기득권의 지지지역이라는 선민의식을 동시에 심어주었다,
이는 2.28의 주역, 4.19의 주역들이 변절하는 과정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학생운동 역시 국가보안법의 잣대로 말살하며 한편으로는 기득권으로의 편입을 유혹한다.
경북고등학교, 사대부고등 경상도 대구 학벌과 육사 출신이 수권세력임을 강조하며, 박정희 정권은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독재를 이어나갔다. 이 기간 동안, 10월 항쟁의 피해자들, 일제와 싸우던 항일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영원한 고통의 나락으로 몰아세웠다. 연좌제와 함께.
하지만,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대구지역민들의 항거는 계속되었다.
진짜 대구시민들은 단 한 번도 변절하거나 친일 독재정권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구사람들이다. 하루아침에 사법살인의 희생으로 죽어간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