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도화선 대구, 대구에도 사람이 삽니다
나는 민주당원도 어떠한 정당의 당원도 아닙니다,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보주의자라는 용어는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나는 진보주의자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딱히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에서는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도 진보주의자 취급을 받습니다. MBC뉴스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 지지자로 여겨집니다. 아니 사실은 좌파라 불립니다. 적어도 대구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점이 아주 오른쪽에 있습니다.
대구사람들의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아주 쉽게 표현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같은 것이라는 확신도 있겠지만, 다른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 증명하는 과정 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나도 같은 편이라는 확신을 주는 과정, 그래서 대구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을 더 확고히, 더 선명히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망해도 국민의 힘을 찍는다" 이 말을 하는 진짜 속내는 생존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구에 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을, 대구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올려주고 싶습니다.
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1964년 박정희정권은 한일회담을 시작했고 전 국민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1965년 마침내 한일협정을 조인했습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아무런 사과도 없이 단돈 8억 달러에 협정은 조인되고 말았습니다. 종군위안부 강제징용자. 원폭피해자등 중요한 사안은 결국 회담의 내용에서 배제되었고 독도영유권문제, 약탈문화재의 반환에 대한 문제 역시 언급조차 없이 오히려 한국 내에 남아있는 일본자산에 대한 반환요구까지 있었습니다.
굴욕적인 회담 그리고 협정과 관련하여 당시, 한일회담을 제일 먼저 반대하고 거리를 뛰쳐나온 사람들이 바로 대구시민입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서슬 퍼런 군홧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제일 먼저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이 대구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박정희는 한일협정 이후 자신의 고향인 대구가 자신울 가장 반대하며 총부리에도 겁내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온 장면을 보고 두려움에 떨어을 것입니다.
그 후 박정희는 한일협정에 반대했다는 명분을 앞세워 "인혁당 사건"으로 수많은 무고한 시민을 법정에 세웠으며 결국 1972년 유신과 함께 소위 "인혁당 재건사건"을 통해 법정 선고 18시간 만에 8명을 사형시켜 버리는 세계사에도 유래가 없는 사법살인을 저지르며 대구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 8명은 거의 모두가 대구와 인근 경북 그리고 경남출신이었습니다.
대구의 우경화는 바로 이 시점부터 거세게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대통령선거는 "지역감정"이라는 새로운 구도를 내놓았고, 여기에 대통령의 고향 대구는 충실히 기득권의 도시로서 전라도를 적대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안돈화 해내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적어도 80년대 초반, 아니 중반 까지도 스스로 야도 (野都)라 부르며, 정치적 의리를 지켰습니다.
정확히 1990년까지 대구는 야당의 심장을 지닌 도시가 맞았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기득권 지역으로 박정희 정권에 복무하며 선거 때는 표를 몰아주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혈통을 지켜온 항일민족운동의 본류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비록, 박정희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지만 결코 온전히 독재정권의 수호도시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1990년 3당 합당이 이루어집니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은 이를 통해 TK, PK 그리고 충청을 아우르는 유리한 지역구도를 만들어내었습니다. 1987년 대선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의 두 거두를 두고 분열했던 야권은 김영삼이 하루아침에 여당으로 변신하는 엄청난 일을 만들어냅니다.
이 사건은 한국 정치가 이념의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아니라, 지역 간의 감정구도임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김영삼이 군주와 같이 호령하던 야성을 지녔던 부산과 대구 경남경북을 김종필의 자민당, 유신의 잔당과 그리고 노태우의 군사반란세력과 합당하며 여당으로 변신했습니다.
부산, 그리고 대구는 지역의 정치적 지주였던 김영삼의 변심과 함께 그동안 지켜왔던 야도의 정체성을 버릴 명분을 찾았는지 모릅니다.
소위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직선제개헌으로 노태우는 정치적인 유화정치를 베풀었으며, 한국경제는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은 무너졌고, 20세기를 지배하던 냉전이데올로기는 사라졌습니다, 하루아침에 소련연방은 해체되고 독립국가들이 생겨나고 이념의 장벽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습니다.
대구는 경북은 기득권의 자리, 보수의 수호자의 자리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앉기 시작했습니다.
3당 합당은 대구와 부산 경남북의 우경화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1992년 부산 초원복국집에서는 부산지역 정부기관장들이 모여 14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모의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자리에서 건배사로 이들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지역감정을 조성하는 짓거리를 대 놓고 행합니다.
당시 3당 합당을 통해 정치적 지형을 바꾸었지만, 정작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자당은 오히려 의석수를 잃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민자당은 대구, 경북을 돌며 지역감정을 부추기며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공권력이 합세합니다. 이 당시 일어난 사건이 "초원복집사건"이며, 이때 사용했던 "우리가 남이가:"라는 건배사는 자금도 유령처엄 살아남아 대구경북의 끈끈한 연대감을 조장하는 정치적 용어로 사용됩니다.
"우리가 남이가?" 이 말은 지금도 유령처럼 남아 소위 경상도의 단합과 정치적 신념의 일치를 보여주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지난 11번의 연재를 통해 대구가 진보의 성지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그 정체성들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 거칠게나마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최근 정부의 친일적 행태들과 소위 뉴라이트라는 기회주의자들의 득세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다시 되살아나 우리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입니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해방은 미, 소 냉전의 시작과 더불어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왔고. 해방의 기쁨과 새로운 민주정부의 수립을 꿈꾸는 우리에게 미군정은 점령군의 통치를 시작하며, 일제의 잔재를 청산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에도 친일파는 친미주의자로 변신을 성공하며 대한민국 정부의 요직을 그대로 차지하는 천인공노할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집니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후 경제성장의 기치를 내걸고 굴욕적인 대일외교를 재개하고 한일협정을 체결하는 데에 이릅니다.
이를 반대하던 민족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은 반공이데올로기와 무자비한 고문과 사법살인등을 통해 억압하며 서슬 퍼런 군사독재, 유신독재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2024년 그동안 숨죽이던 친일파기회주의자들은 정권의 무지와 비호를 틈타 수면으로 떠올랐으며, 이제는 도리어 "무엇이 잘못이냐"며 "매국이 애국을 단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박정희의 한일협정 추진에 대해 국민들은 단호히 떨쳐 일어났습니다. 총칼로 들어선 정권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거리에 나선 사람들은 대구사람들이었습니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맨 처음 시작된 곳이 대구입니다.
2024년 오늘 어쩌면 우리는 또다시 친일 매국노들과의 단호한 일전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당시. 한일협정을 추진했던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그들의 주장을 어떻게든 이해하려면 당시 경제적 상황에 대한 일말의 이해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작금에 이루어지는 굴욕적인 친일행위들은 도대체 설명도 이해도 되지 않습니다.
정부수립이 아니라 건국절이라는 망언은 이제 대놓고 이야기합니다.
나라를 통째로 넘기려는 대한제국의 을사오적이 다시 살아나는 듯합니다.
내년은 공교롭게도 을사년입니다.
1905년 을사년에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잃었고
1965년 을사년 우리는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조인했습니다.
이제 2025년 또다시 을사년이 돌아옵니다.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닥칠지 두렵습니다.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인지 모르겠습니다.
연재를 처음 시작할 때. 속마음은 소위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이곳 대구에서 민주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더욱더 힘들게 그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대구땅이 사실은 대한민국의 모스크바라 불리며 가장 진보적인 도시 중에 하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어떻게 보수화 되었는지, 그리고 대구 땅에도 적극적인 지지와 민주적 응원이 필요하며 이를 토양으로 다시금 민주주의의 선지로 진보주의자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연재를 거듭할수록, 대구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실은 대한민국 전체에 일어나는 현재적 사건들이며, 친일 매국노,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민주주의는 지금도 짓밟히고 있으며, 그들이 만들어 놓은 지역감정의 골을 타고 오늘도 민주주의는 억압받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대구를 이해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적어도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를 대구에 전가시키고 민주진영에서 조차 희화화하고 지역을 혐오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이야기해야겠습니다.
대구라는 지역을 비하하고 이익은 얻는 자들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박근혜 탄핵의 촛불이 끊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윤석렬의 친일 반민족 통치에 대해 반대하고 비록 적은 숫자이지만,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민주주의의 피를 제일 많이 쏟아낸 항일민족주의자들이 아직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고, 독재정권의 사법살인의 희생자들은 지하에서 아직도 편하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학살당한 이름 모를 민초들의 썩지 못한 뼈들이 아직도 뒹글고 있고, 기념식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며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는 땅입니다.
대구사람들은 분명 스스로의 힘으로 이 오욕의 역사를 분명코 벗어던지고 역사의 전면으로 다시 일어설 것을 나는 믿습니다.
긴 글 애정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