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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Aug 27. 2024

6월항쟁, 대구의 기억

11. 찬란했던 민주주의의 기억, 대구의 기억





  나는 민주당원도 어떠한 정당의 당원도 아닙니다,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진보주의자라는 용어는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나는 진보주의자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딱히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에서는 '국민의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도 진보주의자 취급을 받습니다. MBC뉴스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 지지자로 여겨집니다.  아니 사실은 좌파라 불립니다. 적어도 대구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구분점이 아주 오른쪽에 있습니다.


 대구사람들의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아주 쉽게 표현합니다.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같은 것이라는 확신도 있겠지만, 다른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 증명하는 과정 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나도 같은 편이라는 확신을 주는 과정, 그래서 대구 사람들은 정치적 입장을 더 확고히, 더 선명히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망해도 국민의 힘을 찍는다" 이 말을 하는 진짜 속내는 생존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대구에 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을, 대구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올려주고 싶습니다.


 대구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11. 6월항쟁, 대구의 기억


표지석



 2017년 대구시 중구 동성로와 서문시장역에 표지석이 세워졌다. 표지석은 육각형 동판에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 곳"이라는 문구들이 적혀있다.

  대구는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던 분지 지형이기에 흔히 시내라 불리는 반경 4Km 내외는 번화가였다. 지금도 대구의 근현대투어를 하게 되면 남쪽으로는 반월당과 조금 더 내려가자면 남문시장과 명덕네거리(명덕네거리는 2,28 기념탑이 서 있던 자리이다) 동쪽으로는 지금의 김광석거리가 있는 신천에 잇다은 거리까지 경대사대부고와 대구상고가 있던 자리, 북쪽으로는 현재 삼성창조캠퍼스가 있는 지역 서쪽으로는 서문시장 일대 까지가 정방형으로 번화가가 이루어져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헐려 버렸지만. 대구읍성과 그 너머 일대까지의 도심이 발달해 있던 곳이다.

 87년 민주화 항쟁 당시에는 이 지역이 가두시위의 현장이 되었다. 물론, 좀 더 멀리 남쪽으로는 영대네거리 서쪽으로는 만평로터리 일대까지 시위대열이 지나갔던 기억은 있지만 이곳이 가장 빈번히 시위가 이루어지던 자리이다.

 매번 똑같지는 않았지만. 6월 들어 시위가 활성화되면서 대구지역의 각대학 들은 오전에 각자의 학교에서 "출정식"을 가진 뒤 시내로 진출했다.

 보통은 동성로의 중심지역인 중앙파출소 앞, 동아쇼핑 앞, 가끔은 대구백화점 앞에서 기습적으로 시위가 시작되고 여기에서 시작된 시위는 대구 읍성 곳곳을 누볐다.

 

 한창 시위가 정점에 다 달았을 때는 대구 시내 곳곳에 시위대열들이 동시다발로 지나고, 대열들이 만나면 또다시 합류하고 네거리에서 집회를 가지고 또 행진하고 또 다른 대열을 만나 합류하고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저녁시간에 가까워 오면 반월당 언덕(현재 남문시장에서 반월달 네거리로 향하는 지역)에 집결하여 언덕을 두고 전투경찰과 늦게 까지 화염병과 최루탄의 공방을 이어갔다.

  오전부터 시작한 집회와 가두시위는 밤 10시가 넘어서 소강상태에 이르고 학생들과 시위자들은 내일을 기약하며 잠자리를 찾아들었다. 온종일 시위대에 참여했지만. 시민들이 나눠주는 다양한 음료와 먹을거리로 인해 아무도 배고프지 않았다.


 지금은 믿기 힘들겠지만. 당시 시위 행열에는 대구지역 모든 대학의 학생들의 절반이상이 시위에 참가했고, 넥타이 부대라 일컬어지는 직장인들은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을 이용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특히, 대구의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당시 민주적인 학생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의 모든 대학은 학생회와 다양한 형태로 집회를 만들고 6월 항쟁에 참여하였다. 

 전국이 그러하였지만 대구 역시, 상가에서는 물병과 먹을 것들을 시위대에게 나눠주었고 비가 오면 머리에 쓰라고 비닐봉지를 나워주었다.


 대구의 6월항쟁은 뜨거웠다.


명덕네거리에 모인 집회군중, 당시까지 2,28 기념탑이 명덕네거리에 서있었다 당시에는 명덕로터리라 불렸다.


물론, 이미 보수화된 많은 사람들이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자신들의 가족은 이일에 휘말리기를 두려워했지만. 이미 6월 항쟁은 시위를 넘어 해방공간의 새로운 희망과 문화를 가져다주었다. 

 낮에는 전투경찰들도 어쩌지 못하면서 시위대들의 길을 터주었고 따라서 열린 공간마다 다양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연설과 자생적인 문화공연과 춤판이 벌어졌다. 전국이 마찬가지였겠지만. 이른바 해방공간이 열렸다.


 당시 신문들을 기억해 보면 전국의 시위현황이 보도될 때 항상 대구의 소식이 부산 대전과 함께 꼭 다루어졌으며 참여한 연인원 집계 역시 타 지역에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빈번히 집회가 시작되었던 동성로와 서문시장 앞에 두 개의 표지석이 만들어졌다.

(이 글을 쓰면서 최근에 박정희 광장의 표지석이 세워졌던 것을 생각하며 또다시 마음 한편이 무너집니다)



대구에서 진행되었던 6월항쟁


1984년  

 1984년 신군부는 학원자율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학생회부활 (이전까지 각대학은 물론, 중고등학교에도 학생회 대신 학도호국단이 설치되었다)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학생들의 복학을 허용하고 대학 내에 상주하던 경찰을 철수시켰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소위 3S  정책을 시작으로, 컬러티브이 방송, 야간통행금지

해제, 교복자율화 등등 강경한 정치적 탄압과 더불어 다양한 유화정책을 시도하였다. 

 1984년은 민주화운동의 측면에서 볼 때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광주 이후 전국적으로 계엄령과 함께 집회는 물론, 어떠한 다중모임조차, 심지어 대학 내에서는 5인이상 모이는 모임조차 금지되던 시절을 겪다. 마침내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로 학생회가 부활되었다.

 대구지역에도 경북대와 영남대를 비롯한 대학들이 학생회 체계를 꾸리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85년, 미문화원점거농성과 삼민투 사건, 그리고 1986년 직선제개헌을 구호로 내건 신민당은 재야와 학생들과 함께 대중적인 거리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대구에서도 1986년 신민당 현판식과 직선제 개헌투쟁은 재야와 학생들이 함께한 최초의 대중집회이자 가두투쟁이었다.

 당시, 반월당 신민당사 앞과 반월당 대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과 학생들은 신민당 집회가 마친 뒤 가두투쟁에 나섰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구미문화원' 앞까지 진출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전방입소반대 시위는 전국에 걸쳐 진행되었고 직선제개헌 서명운동은 확산되었다.


 이러한, 신민당과 재야와 함께 "직선제개헌투쟁"을 함께 하고, 높아진 반미정서.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학생회 조직의 강화와 민주주의의 열망은 마침내 "박종철" 열사의 고문과 죽음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마침내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대구

 인혁당 사건과 박정희의 시월유신은 대구를 보수의 도시로 바꾸어 놓았고, 대통령선거를 통해 박정희가 만든  지역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져 1980년 광주항쟁을 통해 그 정점에 다달았다.

 프로야구의 등장과 함께 오히려 지역연고는 오히려 지역감정을 더 악화시키고, 공포정치 폭압정치를 통해 

민주주의의 역사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도록 억압하며, 대구는 정권실세의 도시, 대통령의 도시, 경제성장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는 도시로 자리매김하며 점점 대구는 보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6월항쟁은 그 보수의 담벼락이 높아가던 시 시절에도 대구는 "야도"라 스스로 부르며 당시 신민당에 대한 지지와 김영삼에 대한 지지를 결코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높아지는 지역감정은 전라도와 김대중을 받아들이기에는 장벽이 높았다.


6월항쟁은 노태우의 직선제 개헌선언으로 동력을 잃어버렸고, 대구 역시, 급격히 민주적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특히, 전두환, 그리고 새롭게 이미지를 세탁한 노태우 역시 대구출신의 인물들이었으며. 이에 따라 급격한 경제성장의 혜택을 올곧게 받는 지역이라는 의식 속에 점점 더 보수의 높은 장벽아래 대구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6월의 기억

그러나, 우리에게는 6월 항쟁의 기억이 살아있다. 동성로를 가득 메우며 함께 노래하며 구호를 외치던 끝도 보이지 않던 대열, 학생들이 지날 때마다 곳곳에서 날아들던 물병과 음료수, 초코파이 온갖 먹거리. 전투경찰에 쫓겨 도망하는 학생들을 숨겨주던 시민들, 셔터를 내려주던 식당 주인, 수고한다며 몸조심하라며 격려하던 서문시장 상인들의 격려를 잊지 못한다.

 분명 1987년 6월 대구는 민주의 성지였고, 해방된 땅이었다.

 그곳에는 분명 진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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