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하우스는 왜 붐빌까?

희망과 절망의 클럽 하우스 보고서

by 여운

딸이 보내준 클럽하우스 초대장으로 어마 무지 핫한 클럽하우스에 발을 디뎠다.

클럽하우스의 운영방식이나 형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들이 글들을 남겨 놓았고, 왜 '클럽하우스'가

이토록 핫한지에 대한 분석들도 꽤나 다양하게 나와있다.




초대장

아직은 은밀한 선택된 계급


모든 방이 그러하지 않겠지만, 지금의 '클럽하우스'의 자정능력은 상당히 높다고 보인다. 그것은 방의 운영시스템에 있지 않다. 발언권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규정보다, 초대받은 자들의 높은 도덕성이 지켜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익명의 뒤에 숨을 수도 없으며, 주어진 발언권을 온전히 쓸 수 있는 매력적이고 공정한 판이 주어졌고, 나는 그 판에 참여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초청받았다.

방들의 목록을 보면, 이런 비교적 공정한 룰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의 유명세는 이곳에도 발현된다. 연예인들이 방을 개설하고 그들의 유명세를 통해 팔로워를 늘이고 있다. 특정한 분야에도 마찬가지이다. 온라인의 유명세를 그대로 옮겨 오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은 한가하고, 초대장의 권위가 인정되는 시기.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는 최대한 주어진 무기"말"을 통해서만 가치를 인정받고자 한다.


그러나, 조만간 이러한 상대적 공정은 여지없이 깨어질 것이다.

2장씩 주어지는 초대장은 급속한 회원수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고, 이미 슈퍼 스피커의 맹아를 싹 틔운 클럽하우스에 더 이상 크고 좋은 방에 발언권은 줄어들 것이다.


그 반대 지점에 조만간 생겨날 B급 정서

슈퍼 스피커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소외된 스피커들이 생겨날 것이며, 이들은 아마도 B급 정서를 콘텐츠로 택해 은밀한 방, 혹은 말초적이고 소비적인 방들을 양산해 낼 것이다. 자정능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SNS, 각종 게시판의 역시도 그러하다. 비주류는 상대적으로 생기는 불공정에 반하여 또 다른 무기를 찾아든다. 냉소, 혐오, 차별등 반 공동체적인 정서가 조만간 밀려들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클럽 하우스'의 모든 발언은 기록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휘발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초대장이 어느 날 행운의 편지로 바뀌는 순간이 올지 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나 훌륭한 방식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기본적으로 클럽하우스는 스피커와 리스너가 있지만, 언젠가 역할은 바뀔 것이고 내게도 주어질 발언권을 기다린다.

이것이 비교적 민주적인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빅스피커가 아직은 많지 않은 미개척의 땅, 닉네임과 간단한 Bio만으로 발언권을 흔쾌히 넘겨준다.

긍정적인 부분은 바로 이 리스너와 스피커의 원활한 역할 교체이다.

공감이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내가 말하고 너는 듣지만, 곧이어 네가 말할 때 나는 듣는다" 이 간단한 규범이 이사회는 쉽게 지켜지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권력자이며 듣는 사람은 피지배층이다. 조직사회는 "말"을 통해 통치하고 통제한다. 이 세대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구분되어 있다고 믿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하기와 듣기의 권력이 원활히 바뀔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소통의 도구는 없다,

리스터와 스피커가 수시로 역할을 교체할 때 비로소 소통이 일어난다.

"클럽 하우스"는 소통이 가능하다.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계층을 분해하고 가족을 해체한다. 그리하여 인간을 하나의 부품, 하나의 특정한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만들었다. "교사는 교사답게, 군인은 군인답게." " 정치는 정치인에게" 우리는 이런 구호를 80년대까지 들어야 했다.

생산성의 증가를 위해 인간을 역할로 소비시키는 행태는 끝없는 상처와 고통을 양산한다. 사회가 병들고 사이코패스가 길거리를 활보한다.

말하고 싶은데 말하는 방법도 기회도 말살당하는 사람들. 말하지 못하기에 상처를 치유할 수도 회복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주는 가장 큰 해악이다.


클럽하우스는 말할 기회를 준다. 너 한번 , 나한 번, 교사 한번 노동자 한번,

코로나 팬데믹이 가져다준 뜻하지 않은 효과이다. 대면 사회에서는 "말"의 힘보다 사회적 배경. 혹은 뿐만 아니라 말하는 태도와 눈빛 사전 정보들이 혼재되어 이미 그 사랑의 "말"의 가치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아직은 클럽하우스는 평등하다. 슈퍼 스피커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은 서부개척시대와 같다.

마치 유튜브의 초창기처럼, 골드러시가 열릴지 모른다. 슈퍼 스피커들의 권력은 어떠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물론 유튜브처럼 직접적인 방식이 아닐 지라도 충분히 간접적인 권력이 만들어질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희망과 절망


'클럽하우스'는 "말"을 무기로 소통하는 플랫폼이다. 이런 플랫폼은 필연적으로 빅데이터를 생산해 내며 이러한 빅데이터는 공정하게 공유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클럽하우스'의 가장 두려운 지점은 이 엄청난 빅데이터는 결국은 "말"은 빠져 휘발돼 버리고 슈퍼 스피커만 남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빅데이터는 사라지고 빅데이터가 만들어낸 권력만 남는 결과, 가치는 사라지고 그들이 얻는 권력만 남아 새로운 클럽하우스를 지배할지 모른다는 상상은 과도한 것일까.


스피커와 리스너의 역할 교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모두가 " 클럽하우스"에 열광하는 이유는 스피커와 리스너의 역할 교체는 새로운 소통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은 필연적으로 치유와 회복의 유일한 처음 치료제이기 때문이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려 "클럽하우스"로 밤새워 몰려든다. 지금은 비교적 공정한 자정이 이루어지는 공공플랫폼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길한 상상은 이러한 플랫폼이 스피커와 리스너의 교체 방식이 영리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순간, 결코 희망적인 미래의 소통처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초창기 PC통신과도 닮았고, 채팅 초창기와도 닮았다.

건강한 사람들이 "선순환"을 이루어 자정작용이 이루어지는 소통 공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많은 숙제가 남아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와 미래사회는

인간의 물욕으로 분해되고 소비된 감정과 공동체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회복할 것인가가

관건이라면, "클럽하우스" "말"을 통한 권력교체의 실험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사실은 이러한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희망보다 절망이 더 읽히는 것은 이것은 시스템과 조직이 만드는 인공의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소통을 지나 감동에 이르기 까지 "클럽하우스"는 멀기만 하다.


사실, 인간은 수천 년에 걸쳐 살며 상처 받는 아픔을 회복하고 치유받는 끝이 없는 치료제 "예술"을 향유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이것마저 우리에게 빼앗아가 산업화하고 예술마저 상품화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인류의 마지막까지 버티게 해 줄 몇 안 되는 가치임에는 틀림없다.

"클럽하우스"와 같은 말하기 플렛폼이 완성에 이르려면 마치 "예술"처럼 소통을 지나 감동에 이르고 그 감동이 공유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 한다.

코로나팬데믹은 우리에게 비대면으로 우리가 만든 인프라만으로 여기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시험하고 있다.

"클럽하우스"는 그 길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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