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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Mar 01. 2017

공작나비처럼 가벼이 나빌레라



내 부서의 과장 한 명이 퇴사를 했다. 그가 홀가분함을 챙기고 떠나며 남긴 것은 그의 자리(Space)였다. 사무실 안쪽에 있는 그의 자리 위로 대형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채광이 꽤 좋다. 이따금 사무실 밖이 궁금하면 자리에서 서 있기만 하면 된다. 파티션은 책상의 앞과 양옆으로 감싸고 있어 앉아 있으면 머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 자리는 벽을 등지고 있어 남들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울 일이 없다. 만약,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하는지 볼라치면, 굳이 그 자리로 가서 고개를 들이밀어야 한다. 그렇다. 그 자리는 주인에게 안락함과 비밀보장을 약속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연히 그 자리의 새 주인이 되고 싶은 부서 동료들이 많았다. 물론, 나도 주인 행세를 해보고 싶었으나 굴러들러 온 돌이 박힌 돌들의 보이지 않은 텃새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리 바꾼다고 일 잘한다는 것도 아니다 싶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자리의 새로운 주인이 누가 될 것인지를 두고 부서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모였다. 나는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가만히 보기만 했다. 늘 그렇듯이, 내게 쓸모없이 붙여진 직책과 직급을 가지고 그 자리 경매에 손을 들어 봤자, 10년 차 터줏대감 과장 동료들에게 먹혀들리 만무했다. 내게 채워진 학습된 무기력에 알아서 입을 잠가버린 셈이었다. 잠시 동안 살벌한 침묵 속에 눈 맞춤 없는 눈치가 오갔다. 먼저 누가 입을 여는 순간 쏠리는 눈들로부터 받는 부담감은 적지 않는 듯했다. 모두들 자리 배치도 그려진 화이트보드를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을 곁눈질만 할 뿐이었다. 팀장이 첫 입을 떼어 자물쇠가 채워진 그들의 입을 열게 했다. 그들은 피상적 언어를 하면서 그에 반하는 몸짓 언어를 했다.
몸을 의자 등받이로 약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저는 괜찮습니다. OO 과장님 앉으시죠."라고 하거나, 안경을 빼고 닦으면서 상대를 바라보지 않은 채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보다 OO가 앉으셔야죠."


의례적인 말과 행동이 반복되는 것에 스스로가 지겨워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는지 과장 한 명이 화이트보드에 용기 있게 나아가 자리 배치도에 동료들의 이름을 썼다. 몇 가지 안이라며 그가 내놓은 주장에 사람들은 잠시 고민의 간격도 갖지 않은 채 바로 다른 안들을 쏟아냈다. 앞사람의 용기에 힘입어 다른 사람들도 연이어 화이트보드 앞에 서기 시작했다. 결국, 나와 같이 일하는 신입 2년 차 녀석도 그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빈 곳을 찾아 자기 그림을 그리기까지 했다. 점점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매년 반복된 이런 광경이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내게 그렇게 늘 주장하던 자신들의 논리를 바로 뒤집고 재구성에서 자기합리화를 하는 모습에 화가 났었다. 내게 부질없던 직책과 직무가 그들에게는 아주 좋은 유용한 무기였던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차가운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는 것으로 화를 눌러야 했다.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르다니.

삶의 주인으로 살고 싶은데 가끔씩 무언가에 마음이 휘둘릴 때면 착잡한 감정이 든다. 아직도 손님처럼 살고 있구나 싶다. 사실 곰곰이 반추해보면 그리 마음 쓸 일이 아니다. 회사란 원래 이런 곳 아니던가? 바로 내 옆에 있는 동료 들과 무엇이든지 경쟁해서 쟁취해야 하는 정글이 회사 아니던가? 남과 비교하며 남보다 낫거나 못하거나를 통해 기쁨과 슬픔을 겪는 곳이 회사 아니던가? 나도 그 자리를 앉고 싶지 않았던가? 내가 굴러온 돌이 아니고 박힌 돌무리 중에 하나였다면, 나도 별 수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원래 신입은 다른 파트로 입사했다가 어찌하다 보니 내 업무파트로 넘어온 녀석이었다. 녀석이 있었기에 그나마 덜 외롭고 덜 고립되지 않았다. 녀석 입장에서는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니 보내는 것이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휑하니 공허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셈이 나고 화가 난 것이다. 아직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은 것 같다. 나도 겉과 속이 다른 녀석이었다.


공작나비는 우리나라 강원도 일대에서 7~8월에 자주 볼 수 있는 나비이다. 녀석의 특징은 날개를 접고 폈을 때의 색이 전혀 다른데 있다. 날개를 접고 있을 때는 말라버린 거친 고목을 보는 것 같지만, 날개를 펼치면 그 화려하고 따뜻한 눈동자와 얼굴에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겉과 속이 다르다. 나비의 겉이 어둡고 칙칙하지만 속은 아름답다. 어차피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나는 공작나비이고 싶다.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고, 넘이 찍은 사진만 보지만 그럼에도 나는 공작나비이고 싶다.


-fin-


※ 글과 사진을 상업적인 용도 사용 및 무단 편집 이후 게시를 하면 법적 처벌을 받습니다.

※ 공작나비 사진 출처

   - Cover Picture : 다음 백과사전

   - 본문 : 위키미디어 커먼(https://commons.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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