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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Mar 10. 2017

기쁜 자들과 슬픈 자들

휘영청 솟아 오랫동안 머물었던 만월
겨울 끝자락임에도 추위가 가시지 않던 2월 말의 어느 날. 오후 5시. 회사 사람들은 자신들의 책상 앞에 있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수 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그들은 결코 들리지 않는 환호와 탄식을 서로의 귓전을 향해 뿜어냈다. 그들은 적어도 그 한날 동안 기쁜 자와 슬픈 자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기쁜 자들은 미소를 드러낼 수 없고, 슬픈 자들은 눈물을 보일 수 없다. 기쁜 자들은 자신들의 기쁨이 슬픈 자들의 눈물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고, 슬픈 자들도 자신들의 눈물이 기쁜 자들을 위한 거름으로 쓰였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겁게 누른다. 그들은 수년간 회사에서 상황에 맞는 감정처리를 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이기에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제법 잘 통제한다. 그 날 저녁, 아마도 많은 회사 사람들은 맨 정신으로 집을 향하지는 않았을 거다. 기쁜 자들은 오랫동안 잘 견뎌낸 스스로를 치하하기 위해서 축하의 술을 마셨을 것이고, 슬픈 자들은 고단한 몸과 고달픈 마음을 달래려 무엇이든지 입에 넣어 취했을 것이다. 회사 밖을 나서는 순간 훈련된 그들도 살아 숨 쉬는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  2월의 어느 날 오후 5시는 승진 고과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날 맨 정신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카스 맥주 한 캔을 들고 집 근처 공원에서 둥글넙적하게 빚은 달을 바라보며 취하고 있었다.

붉디란 조명과 너른한 공간에 어울리는 책상과 의자. 이런 인위적인 조합이 위안을 준다. Hopper의 Sheridan Theatre처럼 - 네스트 호텔에서 찍은 사진
Sheridan Theatre - 1937 / Edward Hopper
다음 날 맨 정신으로 돌아온 사람들 중에 몇몇은 회사에 수 일간의 휴가를 냈다. 그들은 맨 정신으로 사무실에 낮아 모니터를 8시간 넘게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상했던 기대와 너무 다른 현실의 잔인함과 비참함을 감당하며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 그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일 것이다. 일이 지치고, 사람에 지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소비되어 지쳐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그들을 계속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당근을 약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1년 동안 회사는 당근을 그들의 입 주변에 맴돌게 했을 뿐, 절대 그들의 입에 달짝지근한 맛을 주지 않았다. 대신 회사는 그들에게 절망의 구덩이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시간을 유급과 함께 허락해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시간 동안 그 컴컴한 구덩이에서 감정을 찢어 죽이고 조각난 이성을 억지로 꿰어 붙인다. 그 과정을 수 없이 반복하고 나면 그들은 잘 정비된 자기합리화로 무장된 채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할 채비를 한다. 사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자기 합리화는 슬픈 강제 선택이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것이 회사를 다니는 것 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에 내 노동을 팔아 붙여 먹는 것 밖에 배운 것이 없는 그들에게는 그 선택 밖에 없는 것이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리고 나도 그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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