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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Sep 13. 2015

타자와의 거리,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우리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상대방에게 듣고 싶은 말이나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 중에 하나는 “그래요. 당신 말에 공감해요.”일 것이다. 공감의 언어적 표현(말)을 하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이다. 첫째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도무지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거나 또는 반복된 이야기에 싫증이 나서 다른 대화로 서둘러 넘어가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상대방의 진실한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진정한 피드백이다. 당연히, 전자의 공감은 명백히 거짓이다. 그렇다면, 후자의 공감은 어떨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후자도 거짓 공감이다. 후자는 결코 우리가 상대방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나는 거짓이다. 만약 우리에게 초자연적 능력이 있어서 상대방의 뇌 속에 접근하거나 우리의 영혼이 우리 몸을 떠나 상대방과 조우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진실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방에게 건넨 우리의 공감 자체를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놓인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떨까라는 상상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상대방의 고통을 나의 고통이라고 대입해서 상상할 때, 우리는 상대방 못지 않게 고통의 전율을 느낄 수 있다. 아이를 사고로 잃은 부모의 마음을 또래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이 그 고통을 가깝게 느끼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조건과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공감한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상대방의 고통이 우리에게 실제 일어나지 않은 것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공감 이면에는 ‘내게 그와 같은 고통이 일어나자 않아서 다행이야’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sympathy-1877_Briton Riviere

우리의 가까운 친구가 우리를 공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나의 친구가 맞느냐’며 화를 내거나 배신감으로 입을 아예 닫을 수 있다. 반대로 멀찌감치 거리를 두던 사람이 우리를 공감하면 그것을 매우 놀라운 발견으로 여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라도 우리는 상처를 입기는커녕 ‘뭐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기는 여유로움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상처를 입고 화를 내며 배신감에 입을 닫는 이유는 가까운 친구와 지속했던 공감의 연대가 친구의 非공감으로 끓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로부터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서 오히려 친구를 끓임 없이 긍정하고 공감하려고 한다. 마치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친구의 이야기를 한동안 들어주며 ‘그래 그래 너 말이 다 맞아’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친구의 인정, 지지, 공감을 위해서 친구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공감을 해주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줄다리기는 ‘내가 이만큼 너를 위해 해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내가 한 만큼 해주어야 한다’라는 보상심리가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어떠한 방법으로도 친구의 마음을 완벽히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친구의 非공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가 친구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의 사고, 감정, 느낌 등도 알 수가 없다. 반대로 친구도 우리의 그것들을 알 수가 없다. 결국 우리와 친구 사이에는 ‘알 수 없다’라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 간극은 좁힐 수 있겠지만 완전히 가까워질 수 없다. 이 간극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러니까 ‘내가 친구를 이렇게 생각하니까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하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친구가 우리를 공감하지 않더라도 상처나 배신감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평생 간직할 필요는 없다.



사실 어떤 상대방이 우리와 우리의 것들을 부정한다면, 우리가 ‘예수’나 ‘붓다’ 같은 위대한 성인(聖人) 아니고서야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잠시 억누르거나 다른 정당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상대방 보다 우리가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특히, 상대방이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잘못만 부각하여 비난하고, 우리의 존재를 부정할 때 더욱 그렇다. 문제는 이런 때에 위트 있는 유머로 상대하거나 또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우리를 대하는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상대방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대응은 이분법적 구도를 손쉽게 취하게 되는데, ‘너는 나쁘고 나는 좋다’식으로 끝을 맺으려고 한다.



사람은 고독과 관계 사이를 오가는 존재이다. 고독하면 친구를 찾지만, 고독이 채워지면 친구가 귀찮아 지고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갈구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의 고통은 고독과 관계의 줄다리기 사이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너무 가깝지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상대방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자칫 메마른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과의 적정한 거리를 통해 상대방에게 지나친 공감을 구하거나, 지나친 인정을 바라거나, 지나치게 의지하거나, 상대방을 깎아 내림으로써 느끼는 우월감을 멈출 수 있다. 또한 상대방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방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자신의 성찰과 숙련을 요구한다. 우리가 상대방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 놀라운 인식이 일어난다. 우리에 대한 진실한 자존감이 발생하고, 그 바탕 위에 상대방도 그럴 수 있다는 수용이 생겨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날카로운 칼을 거두고 무딘 역날창을 겨눈다. 날카로운 칼은 가깝게 다가가 적의 살을 베고 피를 뿜게 하지만, 무딘 역날창은 기껏해야 상대에게 커다란 멍을 안겨줄 뿐이다. 그리하면 상대방은 역날창의 압도적인 공격 거리와 위력에 손부터 머리까지 얼얼해져서 감히 우리가 정해둔 범위에 들어와 우리를 훼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fin -


※ Cover Picture : A friend of order  - Rene Magritte(르네 마그리트에 대해 알고 싶다면)

※ 본문 그림의 화가 : 영국 화가 Briton Riviere(브리튼 리비에르에 대해 알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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