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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말 한마디의 힘

직장에서 말 한마디가 직원을 뛰게 할 수도, 멈추게 할 수도 있다.

by 꿈꾸는 아재

같은 말도 때로는 비수가 되고 때로는 천군만마가 된다.

30년 직장생활 중에 뒤늦게 제대로 알게 된 것이 참 많아서 후회할 때가 있다.



너무 빠른 정보 교체 주기, 넘쳐나는 무림의 고수들,

정글 같은 직장생활을 해 오면서 재산도, 뒷배도, 누군가를 후려치는 특별한 신공도 없었던 나로서는 오직 ‘실력’만이 나를 지켜줄 권능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삶이나 어울릴만한 소심한 INFP는 피로를 주렁주렁 달고 살았다.


하나의 일을 받으면 시키지도 않은 둘셋을 예비했고,

기획보고서 하나를 만들어도 ‘그럴싸함’에 집중했고,

프로젝트를 논할 때도 얕은 지식을 뻥튀기해서 최대한 ‘있어빌리티’로 포장시키려 했다. 말도 그랬고 글쓰기도 그랬다. 내가 전한 정보나 지식을 접한 상대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경탄’을 읽었을 때의 희열감이 내 동기부여의 원천일 때가 많았다.


들으면 웃기지도 않을 내 사례를 먼저 하나 고백해 본다.


CEO로부터 기념사나 개회사 작성을 지시받은 적이 왕왕 있었다. 그럴 때면, 세상의 온갖 트렌드와 정보, 회사 내를 관통하고 있는 정책 전략 키워드를 꾸역꾸역 담아내려고 애썼다. 그 효용은 대략 두 가지 정도였다. CEO에게는 ‘회사 안팎을 샅샅이 알고 있는 박학다식한 최고 경영자’의 이미지를 돕는 것이고, 나 자신으로서는 내가 작성한 스크립터를 토씨 하나 안 빼고 읽고 있는 CEO를 보면서 내가 마치 회사를 ‘수렴청정’하고 있는 듯한 뿅 맛을 맛볼 수 있었다. 이 얼마나 얼척 없는 업무 사고방식이었던가.


이런 식의 업무방식이 잦았으니 내가 얼마나 스스로를 닦달하면서 일하는 스타일이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런 상사를 둔 직원들은 또 얼마나 피곤했을까. 성격이 개차반이기라도 하면 ‘괴롭힘 방지법’으로 확 걸어 버리기라도 할 텐데, 미꾸라지처럼 인격자 행세를 하니 “우리 부장님은 사람은 참 좋은데, 업무 방식이 너무 디테일하세요’라는 정도가 겨우 할 수 있는 공식 워딩이었다. (비공식은 뭐라들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 같은 유형의 상사가 자주 주변을 성찰하지 못하고 업무 폭주를 하면 대개 이렇게 된다.

▷ 임원이 과장이 되고 부장은 대리 사원 노릇을 점점 더 한다.

▷ 큰 공적은 당연한 업무수행이고 작은 실수는 몹쓸 부족으로 취급한다.

▷ 피드백을 명분으로 “라떼는 말이야~’가 또 재방송된다.

▷ 타당한 지적도 꼭 기분 잡치는 문장으로 피드백한다. (그런 재주는 참 뛰어나다.)

▷ 직원들이 일을 덜 해버리기 시작한다. 어차피 상사(대리)가 다 할 거니까.

▷ 상사가 독촉하면 속으로 ‘말처럼 그리 쉬우면 니가 해보시든가요’

▷ 보고용으로 생색내는 일로 끝나고 실행은 흐지부지 된다.


그런데 마흔을 넘고 쉰도 넘기면서
나이가 두엄처럼 조금씩 쌓여가니 직장생활의 힘이나 인간관계의 지혜가 그런 것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대로 복습하고 있는 중이다.



그중에 하나가 ‘말 한마디의 힘’이다.


세월이 지나도, 회사의 명함을 떼어 내어도, 상황이 달라져도 늘 주변에 ‘사람 재산’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말 한마디의 힘’을 잘 이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말 한마디의 힘은 유려한 말본새나 글솜씨가 아니다. 매끈한 말의 외피가 아니라 투박하고 엉성하더라도 말의 온도다. 방향과 목적이 선명한 '말 다운 말'을 의미한다.


직장에서의 일은 ‘숫자’로 시작되지만 결국 ‘말’로 움직인다.


부하가 PT를 망쳤을 때 “왜 그랬어?”보다는 “오늘은 몇 % 정도 발휘된 걸까?”가 자괴감을 더 낮춰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수고했어”라는 말은 따뜻하지만 모호하다. “이번 보고서는 항목을 표로 풀어낸 것이 설득력이 높았어.”라고 하면 행동이 칭찬의 목적어가 된다. 나의 경우도 후배들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행동’을 인정받을 때 더 좋아했고 성장했다.


“이거 틀렸어” 대신 “이 가정(IF)이 바뀌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질까?”라는 질문은 직원을 탐구의 책상으로 이동시켜 준다. 후배에게 “일단 해봐”라는 말은 좀 가볍다. “네가 고민하는 방향으로 가봐. 장애물은 내가 막아줄게”라는 방패를 함께 주면 더 힘을 낸다. 부하에 대한 지시와 상사의 책임을 함께 패키지로 담보해 줘야 한다.


일이 끝나자마자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라”는 말은 쇳덩이다. 하루 숨을 고른 다음날 “어제 그 부분, 다른 부분도 생각났어”라는 말은 내밀어 주는 손잡이다. 좋은 말은 대체로 짧다. 길어진 말은 변명이나 훈계가 되기 십상이다.


아랫사람도 마찬가지다.


“제가 이해한 바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는 말은 오해를 줄이고 “주신 좋은 말씀은 회의록에 기록으로 남기겠습니다.”라는 말은 책임을 분산시킨다. “한 번만 더 직접 쇼잉해 주시면 다음부터는 실수를 줄이겠습니다.” 등의 단호한 문장은 감정의 파고를 줄이고 일의 구조를 드러낸다. "어제 주신 말씀에 많이 서운하고 위축됐지만 하루 동안 생각해 보니 좀 부끄러워졌습니다."라는 말은 솔직과 성찰을 동시에 함의한다. 좋은 보고서 열 개 보다 이런 말 하나가 직장생활에서 더 울타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말은 혼자 지껄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누면서 서로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30년 차 직장인으로서 실력보다 말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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