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쌩초보가 합창단을 가입했더니

노래처럼 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by 꿈꾸는 아재

어쩌다 아마추어 합창단 활동을 하고 있다.

같은 대학 학번 동기들로 구성된 합창단을 통해서다.


그러나 노래는 썩 잘하지 못하고 악보 보는 것도 영 시원찮다. 가끔 이태리 가곡 같은 외국 곡을 만나면 그 생소한 외계어 때문에 종종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초딩처럼 '라넛떼인 쎄구에 쎔쁘레일~' 식으로 가사를 한글로 종이에 써 가면서 연습한다. 그래도 안 외워지는 가사 때문에 쌩초보는 늘 불안한다. 그럼에도, 결론은 노래하는 것이 즐거워졌고 고단한 일상에 투영되는 깨달음도 참 많다는 점이다.


난생처음 합창단을 기웃거린 것은 7년 전이었다.

은근 박치여서 학교 때도 음악 과목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었다. 그런 내가 합창을 시작한 것은 특별한 이유도 없는 '그저 어쩌다 보니'였다. 그 '어쩌다 합창'이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었다.


일이 내 인생의 전부인 양 앞만 보고 달리다가 덜컥 암에 걸린 적이 있었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 하나인 사람이 뭔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러냐고 아내의 목소리가 커졌다. 남들을 지탱시켜 주는 일에만 매몰되지 말고 당신을 지탱시켜 줄 뭔가를 더 찾으라고... 아내의 진심이 너무 컸던 지라 뭐라도 시늉해야 할 판이었다. 안 그러면 노년에 가서 아침에 아내 허락 없이 눈 떴다고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후다닥 뱉은 말이 "나 합창단 가입하기로 했어"였다.


첫 합창단을 거쳐 지금의 합창단에 뒤늦게 합류했다. 제법 큰 공연홀에서의 정기 공연도 있고 자잘한 찬조공연도 부정기적으로 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아마추어 합창단 치고는 꽤나 퍼포먼스가 좋다는 얘기도 많이 듣는다. 지금의 합창단을 좋아하고 자랑하고 싶은 이유가 몇 가지 있다.


1. 지휘자쌤으로부터 조직관리의 메커니즘을 배운다.

울 지휘자쌤은 실력파 음악 전문가인데도 실력을 함부로 뽐내지 않는다. 자신의 실력을 오롯이 단원들 노래 재미 붙이는데 쏟는다. 마치 콩나물시루에 물 줘서 콩나물 키우듯이... 단원들보다 엄청 젊은데도 대화 수준과 티칭방식을 늙수그레 우리들한테 딱 맞춘다. 처음 보면 아주 예쁜 도시 차도녀 같은데 말을 섞으면 시골 여성 이장님처럼 찰지고 정겹다.


단원들 중에는 전공자 버금가는 실력자도 있다. 악기도 여럿 다룰 줄 알고 편곡도 할 줄 아는 친구도 있다. 반대로 나처럼 악보 까막눈에 경계성 음치 박치들도 있다. 속으로는 답답해 미칠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닐 텐데 쌤은 그런 아롱이 다롱이들을 절대 차별 없이 맞춤형 응대를 해 준다. 그런데, 쌤의 그 공평함은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지난하게 노력한 루틴의 결과였다는 것을 어느 순간 확 깨달았다.


매주 1회 야간 연습을 하는데, 항상 단원들에게 의도적으로 시선을 골고루 준다는 점이 단적인 예다. 연습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단원들 이름도 잘 불러 준다. 의미 없이 부르지 않고 언제나 소소한 서사가 덧붙여진 방식이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각자 자신이 남다른 역할을 하고 있는 냥 몹시들 좋아한다. 뿐만 아니다. 공연 때도 쌤은 늘 조연으로 비껴 나고 단원들을 화려한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 합창단의 모든 지휘자들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조직에서 어떤 리더가 되고 일상에서 어떤 선배가 되어야 할지 수업료 없는 선물을 받는 느낌이다. 녹슴이 아니라 발효하면서 늙어 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주연을 빛내 주면서 자신도 빛나는 지혜로운 조연처럼...


2. 친구들에게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배운다.

단원 친구들에게서 배우고 깨닫는 점들도 많다.

무엇보다도 서로에게 친절하되 절대 선을 넘지 않는 그 적당함이 나는 참 좋다. 무리하게 취조하듯 서로를 탐색하거나 알고 싶어 안달 내는 일이 없다. 조언과 관심이라는 명분으로 일상을 개입하지도 않는다.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때 알맞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수준이다.


솔직히, 한 캠퍼스에서 몇 해 같은 하늘을 호흡했다는 인생 교집합이 주는 친밀감이 꽤나 커긴 했다. 비록 끝자락이긴 했지만 80년대 학번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동질감도 한몫한 것 같다. 그래서 자주 동네 놀이터 초딩 소꿉장난 같은 말들도 오간다. 그러다 보면 호들갑스러운 오버가 생길 수도 있고 선을 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불편하지도 않고 무심하지도 않을 중간 지점에서 딱 멈춘다. 그래서 더 좋은 거다.


각자가 살아오면서 이뤄낸 직업적 훈장들은 언제나 대화나 관계의 언저리 너머에 있다. 소위 이름난 명사도 있고 이 분야 저 분야에서 잘 나가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뿐이다. 자신들의 직업과 위치에 관련된 볼멘 소리, 너스레, 가십 정도에서 가볍게 머문다. 그래서 각자가 하는 일들이 고단한 경우도 많겠지만 '일의 향기'가 느껴진다.


서로의 기쁜 일에 과도하게 호들갑 떨지 않고 큰 슬픔에 지나친 위로도 삼간다. 적당하게 주고받는 응원이 그래서 더 진심으로 다가온다. 친구의 아픈 소식을 접했을 때 합창연습 끝나고 돌아가면서 슬며시 어깨 한번 꽉 잡아주면서 "힘내라" 짧게 건네주는 한 마디가 더 묵직하다. 그러저러한 이유들로 인해 친구들이 조금씩 더 귀하고 가깝게 느껴진다. 팁을 얻어 직장에서도 종종 활용한다. 뭐든 오래가려면 모름지기 '불가근불가원' 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3. 합창에서 조화로움 (Harmony)를 배운다.

합창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개인의 도드라짐'이 아니라 '전체의 조화로움'이다.


그런데 그 조화로움은 철저히 수학적 약속을 지킨다.

겨우 다섯 줄의 오선지 위에 사회생활의 원칙이 다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쉼표, 도돌이표, 후렴은 흡사 인생살이의 대변자 같다. 음표, 조표, 박자는 철저히 질서 속에서 놀아야 한다. 가령, 장조는 <도>로 끝나야 하고 단조는 <라>로 끝나야 한다는 원칙 같은 거다. 노래는 무릇 자유로워야 하는데 꼭 그런 원칙에 가둬야 할까 싶지만 그래야만 한다더라. 자유와 창의가 살아있는 조직도 그 밑자락에는 명확한 프로세스와 최소한의 공동원칙이 내재화되어야 하는 것처럼...


어쨌거나, 그런 원칙과 질서를 흡수하면서 다듬어져 가는 합창의 맛은 맛집 5.0이다. 오합지졸들의 둔탁한 소리들이 매끈한 합창으로 만들어져 가면서 느끼는 희열과 전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전문용어로 뿅 간다. 솔직히 처음에는 입만 뻥끗하는 무임승차도 생긴다. 삑사리도 있다. 음정파괴 간첩도 있다. 그 반대로, 노래를 너무 잘 부르고 튀는 단원이 있으면 오히려 합창은 죽는다. 못난 소리든 잘난 소리든 서로의 소리에 소리가 얹히고 소리와 소리가 잘 버무려질 때 합창은 듣는 이의 가슴을 후빈다. 서로에게 잘 기대어져야만 비로소 홀로 설 수 있는 소리.... 그런 이유로 나는 한자 사람인(人)의 원리처럼, 합창을 제대로 기댈 줄 아는 지혜를 배우는 인생의 압축판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여전히 노래 쌩초보인 나는 오늘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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