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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소소한 것들에 대한 예찬

사무실에서 생수통 갈아 끼우는 재미를 알고부터는...

by 꿈꾸는 아재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굉장히 오래전부터 회사에서 나의 즐거움 중에 하나는 '생수통 교체'였다.


전담 마크맨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마도 내가 압도적으로 많이 했을 것 같다. 처음에는 고직급 터줏대감이 뭘 그런 허드렛일까지 티 내냐 하는 시선도 느껴졌지만 나중에는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간, 내가 생수통 교체를 자발적으로 도맡아 왔던 것은 아주 단순한 계기였다.


대체로 생수통이나 프린터 용지 교체와 같은 일은 보통 막내급 직원들이 한다. 외국계 회사 임원으로 있는 친구 사무실을 간 적이 있는데 그 친구가 직접 토너 카트리지도 갈아 끼우고 출장비용 전표처리도 직접 하는 걸 보고 신선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기업에서는 내가 보아온 관행이 보편적 인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랫동안 나도 젖어왔던 관행이었는데 어느 순간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던 것 같다. '생수통 교체 전담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입사한 직원이 어디 있으랴'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그래서 빈 생수통이 보일 때면 재빨리 내가 먼저 갈아 넣곤 했는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선배들이 평소에 솔선수범 보이자고 나도 늘 주문을 많이 했지만 그렇다고 생수통 교체 정도로 퉁칠 일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효용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직장 생활 30년 중 20년 이상을 마케팅과 교육 컨설팅 업무만 연속해 왔다. 업무 특성상 매일 결이 다른 일들이 쏟아지고 작성해야 할 리포트도 엄청 많다. 새롭게 만나야 할 사람들로 늘 문전성시다. 업무 그 자체만 놓고 보자면 그야말로 다이내믹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그런 하루가 오히려 단조롭다고 느낄 때가 많다. 어떤 면에서는 지루할 정도로... 강제되는 타의의 일들이 많아서 그렇지 않았나 싶다.


그런 단조로운 직장생활에서 생수통 교체와 같은 사소한 루틴이 쏠쏠한 엑센트 역할이 된다. 물론 많은 직장인들에겐 저마다 방식의 근무 중 쉼표들이 있을 것이다. 차를 나누면서 수다 브레이크 타임을 가진다든지, 집중 스마트 워킹 후에 잠깐의 웹서핑이나 점심을 짧게 먹고 좋은 책 한 구절에 감동한다든지 등등... 그런데 나에게는 생수통 갈아 끼우는 일 등등이 그런 역할을 했다. 울 사무실은 백여 명이 공용 탕비실을 쓰다 보니 생수통 교체주기가 짧다.


생수통 교체 즐김의 프로세스는 대략 이렇다.

일단 첫 단계로, 정수기에 꽂혀 있는 빈 생수통을 빼는 일에서부터 재미가 시작된다. 그냥 뽑아 올리면 '띡' 하는 소리로 싱겁게 끝나 버린다. 그런데 살짝 비틀면서 2시 방향으로 신공을 보태서 뽑으면 '뿅'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나면서 가을 하늘처럼 맑은 빈 생수통 안으로 공명이 희미하게 퍼지는 느낌이 난다. 찰나라서 집중하지 않으면 절대 음미할 수 없다.


그런 다음 바닥에 도열해 있는 새로운 생수통을 하나 택한다. 주둥이 비닐 껍질 테두리를 뗀 다음 물 묻힌 휴지로 주둥이 주변을 깨끗이 닦는다. 이어서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다. 그런 다음 물이 가득 찬 생수통을 번쩍 들어 올린다. 이 때는 더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우악스럽게 힘으로 씨름 기술의 들배지기 하듯이 끌어안아 올리면 허리 작살나는 수가 있다. 일단, 왼손으로 생수통 주둥이를 움켜 잡는다.


그런 다음, 골프채 드라이브 휘두르는 느낌보다는 조금 묵직한 스냅을 왼손에 강하게 줘서 순간적으로 생수통을 허공에 끌어올린 다음 오른손으로 생수통 하단을 떠 받친다. 그리고 계속 나아가려는 원심력을 살짝 비틀어서 생수통 주둥이를 정수기 뾰족 정수리에 단 한 번에 도킹시키면 된다. 이때 영점 조준을 잘 못 하고 삑사리를 내면 주둥이를 못 맞춰서 애를 먹는다. 역도의 용상 종목과 같이 허리쯤에서 한번 걸쳤다가 두 번에 들어 올리는 기법도 있지만, 한 번에 바벨을 들어 올리는 인상 종목처럼 나는 원샷 원킬을 선호한다.


마지막 단계가 생수통 교체 즐거움의 압권이다.

생수통 마개가 뚫리고 정수기로 내려가는 생수통의 첫 목 넘김 소리....

굵은 기포가 생수통 속에서 "꿀렁~ 꿀렁~" 소리를 내면서 위로 향할 때 그 찰나의 시간은 마치 불멍이나 물멍 할 때의 느낌을 준다. 짧은 몇 초지만 희한하게 힐링이 된다. 생수통 하나 제대로 번쩍 들어 한 방에 꽂지 못하는 머슬맨 젊은 남직원들을 보면서 느끼는 우월감은 덤이다.


인형 뽑기나 요즘 인기 있는 모바일 게임 '라이즈 오브 킹덤스' 등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생수통 교체는 나한테는 충분한 힐링 포인트다. 워낙 초딩 같은 생각이라 요 재미를 직원들한테 떠벌인 적은 없다.


어쨌거나, 직장생활에서 좋은 업무적 성과나 건강한 인간관계만이 동기부여가 되고 힐링을 주는 건 아닌 것 같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다. 유치한 수준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생수통 교체 외에도 몇 가지가 팁들이 더 있다. 가령, 사무실에 몇 대 있는 프린터를 수시로 열어 본 다음 인쇄용지가 얼마 안 남아 있으면 비품함에서 A4용지를 꺼내 채워 넣는 일이다. 일상 업무가 정신이 없다 보니 몇 십장 PPT 출력물을 인쇄 걸어 놓고도 잊어버리는 직원들도 있다. 공교롭게 프린터 용지가 떨어졌을 땐 인쇄 실패된 것도 모르고 지나치기도 한다. 그럴 때 만약 다른 직원이 긴급 다량 출력물을 인쇄하기 위해 프린터 용지를 채우는 순간이라도 오면...


"뜨헉~ 우쒸 ㅠ 급해 죽겠는데 누가 이 많은 걸 인쇄 걸어놓고 잊어버렸어? ㅠㅠ"


미리미리 직원들 안 볼 때 프린터 용지 채워 놓으면 적어도 이런 볼멘소리들은 줄어든다.

용지를 채우고 용지함을 밀어 넣을 때 '철컥'하고 닫히는 소리도 참 청량하다. 사무실 창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어느 화분에 말라 있는 나무 잎사귀를 주기적으로 떼어 내주는 루틴에서도 깔끔한 소생감을 느낀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기에 나와 화초나무만 나누는 즐거움이다. 그 외에도 있다. 퇴근 때 사무실을 가장 늦게 나서는 날이 있으면 개중 많이 어지럽혀져 있는 직원들 책상을 살짝 정리해 주고 갈 때도 많다. 해당 직원이 담날 알아보지 못할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 포인트다. 책상 위 손대는 거 편집증처럼 싫어하는 직원들도 있어서다.


이런 소소한 사무실 루틴은 나에게만 통용되는 주술 같은 것일 수는 있다. 사실 직원들을 편리하게 해 주는 효용은 오히려 크지 않다. 오직 이기적으로 나의 마음 채움이 목적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이런 소소한 반복들이 '빠르게' 보다는 '바르게' 일과 사람을 대하는데 중화제 역할을 해 준다. '행위'의 축척이 아니라 '태도'의 축척에 도움이 되어서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어쩌면 직장생활은 작은 루틴이 쌓아 올린 성실의 성채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무라까미 하루키가 매일 똑 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9시에 잠드는 동안 거의 시계처럼 같은 루틴을 반복하지만 만들어내는 새로움은 하루에도 오만가지로 달라진다고 했던 글을 본 적 있는 것 같다. '사실' 보다는 '시선'이 더 작동해서가 아닐까?


어쨌든 간에, 이 좁은 사무실에도 오만 가지가 있다는 것을 직장생활 종반부에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은 좀 아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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