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 쿵탕!
혼자 서기 시작한 아이는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놀았다. 앞으로 뛰는 것보단 양발을 부딪치며 사이드로 뛰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뛰다 보니 사소하게 여기저기 부딪혀 상처를 만들기도 했지만 어지간한 충격이 아니면 울지도 않았다. 그저 작은 손등으로 이마를 쓰윽 문지르거나 셀프로 ‘호오’하고, 의심쩍다 싶으면 내게 달려와 상처를 보여주면 끝이었다.
종종 뜀박질 없이 조용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열에 아홉은 사고 치는 경우였다. 멀쩡한 화분을 넘어트려 흙장난을 하고 있거나, 잘 땋아진 인형 머리를 풀어 싹둑 자르는 일이었다. 싱크대에서 꺼낸 스테인리스 거름망을 납작하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울음 끝이 짧고 웃음이 많은 아이는 이름만 불러도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함박 웃으며 다다닥 뛰어와 품에 안겼다. 순간 3초? 이내 품에서 벗어난 아이는 소파 위로 올라갔다 작은방으로 뛰어갔다 다시 주방으로 뛰었다. 까르르 소리를 지르며 도망 다니는 아이를 가까스로 잡아 식탁 의자에 앉혀 놓고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통통하고 하얀 얼굴에 양 볼은 발그레하고 촉촉하게 젖은 머리에서 김이 나는 걸 보면 영락없는 왕만두였다. 작은 심장을 팔딱이며 땀을 흘리는 꼬마가 단풍잎 같은 손으로 컵을 들고 주스를 마실 때는 저절로 엄마 미소가 지어졌다.
첫돌 지나 아장걸음을 할 때였다. 딸기가 주렁주렁 달린 빨간 원피스에 볼레로를 입히고 짧은 머리에 노란색 꽃핀을 꽂아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봄햇살이 좋아선지 평소보다 많은 어르신들이 화단에 앉아 있었다.
“아들 이우? 고거 참 예쁘게 생겼네.”
한 할머니가 아이를 보면 말을 걸었다.
‘헐, 머리에 핀 꽂았잖아요. 빨간 치마에 딸기 안 보이세요?’
머리카락이 짧아 종종 들었던 그 소리가 싫어 일부러 꾸미고 나간 건데 결국 그 소리를 또 듣고 말았다.
“아니에요. 딸이에요.”
짧게 대답했지만 퉁명한 억양이 들킨 것 같았다. 아이 눈높이로 쪼그려 앉은 할머니는 연신 예쁘다며 비닐봉지에서 딸기를 꺼내 아이 양손에 쥐여줬다. 새콤달콤한 향이 아이 손목을 타고 흘렀고 입가로 번졌다.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발을 통탕거리며 딸기 사랑을 시작했다.
두 돌이 될 무렵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면서 안방에서 쓰던 아기 침대를 접고 따로 싱글 침대를 놓으면서 아이 방을 만들었다. 분리 불안에 떼를 쓰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조그만 아이의 첫 독립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했던 아이와 나는 재래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날도 낮잠을 잘 자고 일어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시장에 나갔다. 초입부터 노상에는 딸기를 층층이 쌓아 놓고 달콤한 향으로 발목을 잡았다. 아이는 팔을 뻗어 딸기를 가리키며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환호성을 쳤고 곧 지갑을 열게 했다. 보통 딸기보다 납작하고 끝이 뭉툭한 인삼딸기의 향은 예사롭지 않았다. 딸기 한 바구니를 안은 아이는 집으로 가는 내내 두 손가락으로 비닐을 꼬집으며 코를 가까이 대고 킁킁거렸다.
초저녁부터 준비한 저녁 밥상에 관심이 없던 아이는 냉장고 문만 열었다 닫았다 하며 딸기를 재촉했다. 결국 밥은 몇 숟갈 먹는 시늉만 하더니 커다란 딸기 접시를 안고 온몸으로 먹기 시작했다.
새벽녘이었다. 아이 방에서 꽁알대는 소리가 들렸다. 잠꼬대를 하나 싶었지만 이미 내 몸은 반사적으로 아이 방을 향했다.
꿈인지 생신지 모르는 아이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자꾸 무어라 했다.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이마를 짚어보고 아이를 쓰다듬으며 말을 시켰다. 순간 아이는 옆으로 누운 채로 저녁에 먹었던 딸기를 그대로 뿜었다.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아이가 놀랄 것 같아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늘어진 아이를 겨우 일으켜 앉혔지만 잠이 깨지 않은 아이는 금방이라도 옆으로 넘어갈 거 같았다. 한 손으로 아이를 잡고 윗옷을 벗기며 잠자는 남편에게 도와달라고 말했다.
"수건에 따뜻한 물 좀 적시고 마른 수건도 좀 빨리 갖다 줘."
비몽사몽으로 허둥대는 남편은 맨손으로 아이 방에 들어왔다. 여전히 아이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칭얼거렸고, 수건을 챙기러 화장실로 간 남편은 자기 볼 일을 보고 있었다.
급한 대로 옆에 있던 손수건으로 얼굴과 머리카락을 닦았다. 다른 쪽을 살피려 손을 바꾸는 순간 아이는 토한 자리에 그대로 머리를 박고 누어버렸다.
"으윽! 수건. 수건!! 좀 빨리 갖다 달라고~~"
다시 아이를 앉히고 젖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아냈다. 시큼한 딸기 향에 삭힌 우유 냄새가 역했지만 품에 안겨 있는 꼬마 숙녀는 쌕쌕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잠투정이 없고 순했던 아이는 그렇게 상한 딸기 향을 뿜어 놓고도 잠이 깨지 않았다.
남편이 침대 보와 베갯잇을 바꾸는 동안 난 마른 수건으로 아이를 감싸 안고 내려와 새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가슴팍이 휑하니 비어 속살이 드러났다. 잠옷 앞섶에 있던 만개한 꽃들이 사라졌다. 대체 무슨 생각에 이랬을까? 혼자 노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비밀을 키우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편안해진 얼굴로 잠든 아이의 모습을 보니 구멍 난 잠옷이 대수겠냐 싶어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