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 10일. 바람이 적당하고 햇살이 좋았다.
위쪽은 크고 작은 구절초가 피고 아래쪽은 진한 초록색으로 퍼진 원피스를 입었다. 거울 앞에 서있는 내 모습이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음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예정일은 열흘이나 지났고 설렜던 기대감은 소강상태였다. 병원에서 예정일 전, 후로 2주는 정상이라고 했으나 왠지 ‘꽝’ 된 기분이 들었다.
10시 약속보다 일찍 도착하려고 준비를 마치고 나서려는데 다리 사이로 미지근한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양수가 터졌다고 직감했다. 혼자 있었던 나는 겁과 흥분이 동시에 일어나 주체를 못 하고 울면서 언니한테 전화했다. 전화기 너머로 ‘괜찮다’는 소리만 들렸던 것 같다.
몇 분 정도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준비했던 입원 가방을 신발장 앞에 놓고 내려왔다. 출근한 남편에게 상황을 알렸고 병원에도 응급임을 알렸다. 병원까지는 택시로 30분 이상 걸렸다. 근처에 살던 엄마는 먼저 도착해 병원 입구에서 기다렸고, 뒤이어 언니도 도착했다. 가족이 함께 있다는 건 큰 위로였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몇 가지 검사를 마치고 병실로 들어갔다. 초산임에도 불구하고 양수가 터진 상태라 유도 분만을 해야 한다며 촉진제를 달았다.
골반도 작고 초산이었던 나는 좀처럼 자궁이 벌어지지 않아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초저녁에 퇴근하고 달려온 남편도 벌어진 상황이 처음이라 나만큼 불안해했다.
여덟 시쯤 내려온 원장은 가족들에게 오늘은 쉽지 않겠다고 말했고, 산통으로 힘들어하는 나와 별개로 남편은 11월 11일에 태어나면 좋겠다고 해 원장한테 핀잔만 들었다고 했다.
온몸이 뒤틀리는 통증으로 사경을 헤맸지만, 지옥문이 보여야 아기가 나온다는 말만 들었다. 와중에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왠지 창피할 것 같기도 하고 그다지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 수치는 올라갔고 반복되는 뒤틀림이 사지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수간호사는 산모의 자세가 틀어지면 아기가 움직여 위험할 수 있다고 한 자세만 요구했고, 긴 시간 같은 자세로 힘을 줬던 난 자연분만을 포기하기 직전이었다.
좀 전과 다르게 간호사들 출입이 잦아지고 한 간호사는 나 보고는 잠들면 안 된다고 했다. 천장이 돌고 링거병이 흔들렸다.
수술방 조명은 추웠다. 힘을 쓰지 못하는 내게 계속 힘을 주라며 간호사가 소리를 지르고 배를 누르는 것 같았다.
"마지막이에요. 한 번만 더! 힘주세요. 지금이요. 지금 힘주세요!"
반사적이었지만 난 죽을힘을 다해 악을 썼고 순간 배가 쑥 꺼진 것 같았다.
그런데 들려야 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디선가 ‘컥컥’ 거리는 소리만 들렸고 누구도 내게 와서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내 통증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신경이 아기를 향했다. 밖에서 기다리던 가족들도 아기가 울지 않아 걱정을 했고, 친정엄마는 훗날 말 못 하는 아기가 태어났다며 걱정했다고 했다.
수술대 위에 누워있던 난 그대로 방치 상태였고 모두 아기에게 전념했다. 잠시 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소리에 나도 눈물이 났다. 다시 여기저기서 다급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더 큰 불안을 조성했다.
“신생아 응급으로 인큐베이터 자리 확인하고, 빨리 올 수 있는 병원으로 연락해 구급차 보내라고 해”
상황을 알 수 없는 나는 퍼진 상태로 멍해지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원장은 밖으로 나가 가족들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서야 내게 말했다.
아기는 2.9kg 딸이고 긴 진통으로 나오면서 양수를 마셨고, 응급조치는 마쳤지만 혹시나 싶어 구급차를 불렀고 기준치 미달이라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상황은 이해했지만 아기와 분리돼있어야 한다는 말이 또 가슴에 얹혔다.
구급차가 오는 동안 간호사들은 아기를 돌봤고, 응급 상황을 수습 한 원장은 비로소 나를 수습했다.
“어머! 원장님 애 좀 보세요. 눈이 엄청 커요. 제가 본 아기들 중 제일 예뻐요”
간호사는 초록색 보자기에 싼 아기를 데리고 왔다. 감았던 눈을 뜨자 얼굴에 눈이 반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예정일을 지나서인지 조카들처럼 얼굴이 주름지진 않았다. 분홍색 피부에 얼굴이 팽팽했고 간호사 말처럼 눈이 정말 컸다. 그 새까만 눈동자에 별도 들어있었다. 진짜 예뻤다. 그런데 머리가 고깔 모양처럼 삐죽했다.
‘다 주시는 건 아닌가?’
“아기가 나올 때 산모가 호흡을 길게 못하고 끊어서 그래요. 시간 지나면 돌아와요.”
내 걱정이 보였는지 수습하던 원장이 토닥이듯 말했다. 출산 시간은 오후 11시 30분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빠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갔다. 새벽 시간에 달려간 신생아실은 생각보다 많은 아가가 있었다고 했다. 입원 수속을 하던 중 한 간호사가 아기 발목에 달린 이름표를 유심히 보다 보호자를 찾았다고 했다.
“ㅇㅇㅇ산모 아기예요?”
그렇다고 말하자 간호사는 산모가 ㅇㅇ초등학교 나오지 않았냐고 물었고 남편은 대충 동네가 같으니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고 했다.
“저랑 동창이에요. ㅇㅇ이 아기구나. 걱정 마세요.”
독특한 성으로 학기 초마다 내 이름은 일 순위였다. 그래서 난 내 이름이 싫었다. 그랬던 나를 기억해준 간호사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다음 날 아침, 대학병원에 다녀온 남편은 내게 말했다.
“엄마 덕분에 아기는 햇살 들어오는 쪽으로 자리를 잘 잡았어. 잘 있으니까 걱정 말고.”
크게 문제가 없던 아가는 일주일 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내 품에 돌아왔다.
기억하고 싶지만 기억할 수 없는 내가 있다.
그 시절의 나.
나만 알 수 없는 '나의 옛날이야기'
그 기회를 놓친 나는, 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희들이 얼마나 귀하게 내게 왔는지. 또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