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막시 Feb 16. 2021

건강을 잃으면 사람도 잃는다

달리는 이유


대학에 들어가면 예쁜 여자들이 많아서 설레는 연애가 일상이라고 했다. 낚시를 할 때 운이 좋으면 물 반 고기 반일 때가 있는데, 캠퍼스를 떠올리며 그런 상상을 했다. 풍선에 바람을 넣듯 허파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고 캠퍼스를 밟았다. 꽃샘추위가 물러갈만한 3월이 됐건만 내 주위에는 칼바람이 떠날 줄 몰랐다.

그런데, 나를 조금만 벗어나면 살랑살랑 불어대는 바람에 예쁜 여대생의 치맛자락이 펄럭였고 진달래니 벚꽃이니 하는 꽃들은 그녀들을 방긋방긋 웃게 했다.


예쁘고 날씬한 여자들은 그들만의 리그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곁에도 사람은 있었다. 드럼통 몸매에 얼굴은 사방으로 구십 도였던 그는 만화에서 한 번은 봤음직한 얼굴로 불알 두 짝을 당당히 꿰차고 있었다. 간혹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 여자들과 어울릴 때도 있었는데, 결국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그와 나, 둘뿐이었다. 둘 다 '하필 너냐'라는 생각을 했던 건 한참 뒤 친해진 후에 알게 됐다.


드럼통도 자꾸 보니까 탄탄했고 구십 도였던 얼굴의 각도 조금씩 무뎌졌다. 그건 익숙함의 법칙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정이란 놈은 시간이 흐르며 우리 둘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와 나는 같은 과에 학회와 동아리도 같았다. 학과 학회 동아리, 세 종목의 주제는 모두 달랐지만 우리 둘 다 종목에 관계없이 열심히 했던 건 한결같은 술 마시기였다.

시험 기간이면 어김없이 집에다 뻥을 치고 학교에 남았다. 저녁 배가 꺼질 때쯤이면 배고프다는 핑계로 밖에 나가 소주병을 땄다. 학점은 소주 병을 어깨에 짊어지기라도 한 듯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잠수했다.


남들이 봤을 땐 덤앤더머가 분명한 우리는 늘 같이 다녔다. 하지만, 우리 앞에 군대라는 어처구니가 놓여 있었다. 1년이 지나고 나는 군대로 그는 집에서 방위산업체로 출퇴근했다. 내가 휴가 나왔을 때 술값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고 술에 한판패를 당해 전봇대나 아스팔트에 분풀이를 하려는 나를 말리는 역할도 늘 그의 몫이었다. 친구 덕분에 나는 전봇대와 아스팔트와 싸우는, 술이 깨면 후회할 게 뻔한 어이없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튼튼한 나무처럼 단단하던 우정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온 건 복학한 후의 일이다. 어느 날 그는 몸이 아프다고 했고, 한 해가 지나도 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롯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그는 온라인 게임에 몰두했다. 그건 우리 사이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한 번씩 툭툭 던진 그의 말은 은행나무보다 튼튼하던 우정의 기둥을 하나씩 잘라내기에 충분했다. 그때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의 말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하나씩 잘려나간 우정은 어느새 밑동을 훤히 드러냈고 더 이상 잘라낼 기둥은 아무 데도 없었다.


우정을 사이에 두고 그가 쏟아낸 공격을 피하지 않고 막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랬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직장 생활과 결혼 생활을 했다. 간혹 마음이 지치고 몸이 아팠다. 또한 아내와 직장 동료가 아픈 상황도 겪었다. 나와 누군가의 고통을 온몸으로 축적하고 나서야 옛 친구가 가슴을 후려파는 말을 쏟았던 이유를 알게 됐다.


나는 달리는 사람이다. 하루에 짧게는 5km, 길게는 20km도 달린다. 그렇다고 매일 달리는 건 아니지만 달리기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산다. 달리는 가장 큰 이유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다. 건강하면 이로운 수만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내가 건강해야 남을 배려할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건강하지 않으면 남을 배려할 여유가 달리기를 하며 내 몸에 묻는 먼지만큼도 없다.


애초에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면 주위에 사람도 없을뿐더러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중요하지도 않지만, 나처럼 사람에 웃고 우는 사람은 주위에 사람이 하나 사라지면 공허함이 태풍처럼 휘몰아친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아도 되지만, 전 세계에 그렇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번 생각해 보자. 배려할 친구나 가족도 없어야 하며 누구보다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 보통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갖추려야 갖출 수 없는 조건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누군가를 배려해야 하는데, 내가 아프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배려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몸과 마음의 아픔은 이중 삼중으로 커질 거라고 두말하면 잔소리요 세 말하면 하품 난다. 그러니 누군가를 배려할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우선 나를 위해 건강해야 한다. 건강하면 타인에 대한 배려는 따라오고 그러면 주위 사람이 덩달아 좋다. 달리기가 가져오는 이차적이고 부수적인 효과다.


달리는 사람들에게 왜 달리는지 이유를 물어보면 건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제일 많다. 오래 살려고 달린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러너인 나는 사는 동안 건강하기 위해 달린다고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달리는 사람치고 한 번도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달리다 보면 더 잘 달리고 싶은 본능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달리는 사람으로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달렸는데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면 달리기 실력이 전혀 늘지 않았거나 진작 달리기를 그만둔 사람이다.


부상은 실력이 쌓였다는 증거인 동시에 몸의 한계를 알려주는 신호다. 아픈데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으로 계속 달린다? 그건 부상을 장기화시키는 지름길이며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을 배려하지 않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길이다. 영화 <콜래트럴 대미지>를 봤다면 단번에 이해하겠지만, 보지 않았더라도 누군가는 당신에게 이유 없이 화를 입는다는 말이니 한 번쯤 새겨듣길 간곡히 바란다.


문득 궁금하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아픈 노환은 어찌해야 하나? 젊어서 아픈 건 내 책임이라 쳐도 나이 들어 아픈 건 내 책임이 아니니 죽어가는 세포를 탓하자. 그래도 누군가를 배려해야 하는 건 변함없으니 스님처럼 도를 닦아야 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건강할 때까지만 살고 싶은 마음도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 넘어 찾은 우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