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막시 Mar 13. 2021

동성애에 대하여

소수자의 삶에 대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충무로 스타가 한 둘도 아닌 다섯 명이나 등장하는 영화가 있다. 배우의 출연료를 제외하면 영화의 제작비는 남녀 둘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영화와 비교될만하다. 차이라면 하나는 식탁에서 일어나고 하나는 침대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제작비가 많지 않았을 거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도 두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떼기 힘든 쫄깃함이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톱 배우는 이서진, 염정아, 조진웅, 김지수, 유해진이고 제목은 <완벽한 타인>이다.


영화에서 남자들은 속초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함께 자란 친구 사이이고 여자들은 그들의 배우자다. 성인이 된 그들은 조진웅 김지수 부부의 집들이에 모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게임을 한다. 그 게임에 이름을 붙이자면 핸드폰 공유하기 게임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든 전화가 오면 스피커폰으로 통화하고 문자와 카톡이 오면 모두에게 공유하는 것이 게임의 법칙이다. 게임시간은 집들이가 끝날 때까지니까 짧아도 3시간은 이어진다. 이 영화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들에겐 어떤 전화나 문자, 그리고 카톡이 올까? 문득 궁금하다. 글을 읽는 여러분은 그 게임에 동참할 수 있는가? 당신이 가진 비밀을 배우자와 친한 친구에게 공유할 수 있는가?


영화 속에서 상남자로 등장하는 영배는 부부모임에서 유일하게 배우자를 데려오지 않는다. 연인이 아파서 함께 못 왔다고 하지만, 알고 보니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게임을 하는 도중에 온 문자로 그가 게이임이 밝혀진다. 모두가 충격에 빠진다. 왜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친구들의 비난은 영배의 마음을 난도질한다. 그들 모두의 얼굴은 소금을 입에 한가득 넣고 어쩔 수 없이 삼켜야 하기 직전이다. 영배는 자신이 게이임을 왜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했을까?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여장을 하고 달리는 사람이 꼭 한사람 이상은 있다. 그것도 만명 이만 명이 모여 달리던 코로나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대체로 그들은 재미 삼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학창 시절 장기자랑할 때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고 긴 머리 가발을 쓰고 가슴에는 뽕 브라를 넣고 치마를 입은 채 친구들을 요절복통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해 온갖 지랄발광을 떨던 누군가를 본 사람이 다반사일 것이고 일부는 여장을 했거나 도왔을 것이다. 여장을 한 이유는 학창 시절이나 마라톤 대회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중에 진짜 여자가 되고 싶은 남정네는 없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마치고 결혼을 하고 직장에 다닌 40년 이상 내 주위에 성 소수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리서치 전문 업체 갤럽이나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동성애자의 비율이 1%는 넘는데 내 곁에는 어떻게 한 명도 없을까? 나와 꽤 오래 연락하고 지낸 사람이 족히 천명은 넘을 텐데 말이다.


혹시 또라이의 법칙을 아는가? 어딜 가나 또라이는 있다는 것이 또라이 제1법칙이고, 만약 주위에 또라이가 없다면 본인이 또라이라는 것이 또라이의 제2법칙이다. 이 또라이의 법칙을 성 소수자와 엮어 나에게 적용하면 내가 성 소수자라는 결론에 이른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도 땀이 나는 사우나를 제외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와 홀딱 벗고 땀을 흘린 적이 없다. 그럼 어떻게 된 연유일까? 그렇다. 내 주위에 있던 누군가가 성 소수자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유는 <완벽한 타인>에 나오는 영배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동성애자는 퀸의 프레디 머큐리일 것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흥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유명해지지 않았을 텐데, 천만 관객이 보고 SBS에서 설 특선영화로도 방영하다 보니 자타 공인 세계적인 동성애자가 됐다. 영화에서처럼 프레디 머큐리는 에이즈에 걸리고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그가 에이즈에 걸린 이유는 동성애자여서가 아니라 문란한 성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오지랖 넓게 프레디 머큐리를 비난한다면 원인을 제대로 말해야 한다. 단지 동성을 좋아한다고 지탄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문란한 이성애자가 지탄받아야 하듯이 난잡한 성생활을 지탄해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성관계를 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의 영역이니까.


장애인이나 이민자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수자는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으며 살아간다. 성 소수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갈까? 본인의 본능과 감정을 거부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소수자의 길을 가는 건 아닐까? 앞으로 살아갈 길이 험난한 가시덤불, 아니면 불구덩이가 뻔한데 굳이 성소수자의 삶을 선택할 리는 없다.  물론 호기심이 동해 동성애자 흉내를 내는 사람은 일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성소수자의 천국이라는 샌프란시스코에 간 적이 있다. 과연 명성(?) 대로였다. 각양각색 다양한 종족의 눈들이 번뜩이는 공원 한가운데서 남자 둘이 부둥켜안고 키스를 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보았다. 하지만, 그들을 남달리 보는 눈의 개수는 동양에서 날아온 키 작고 떴는지 감았는지 도통 구분조차 제대로 안 되는 남자의 두 개뿐이었다. 다른 모든 번득이는 눈은 그러든지 말든지 자신의 일을 했다. 한국에서라면 그 두 남자가 그런 행동을 했을 리도 없고, 만에 하나 그렇게 했다면 주위의 모든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을 테고, 어쩌면 '불신지옥'을 외치는 목소리 큰 종교인이 던진 돌에 맞아 머리통이 터져 피가 낭자한 머리를 부여잡고 울거나 돌을 피해 총알같이 도망갔을 것이 분명하다.


동성애자로 산다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소수자에게 에이즈 바이러스 전파자라는 딱지를 붙일까? 왜 지옥에 간다고 비난을 할까? 사회 전반에 퍼진 그들을 향한 혹한의 시선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인가? 과학적 근거는 충분한가? 이성애자인 나는 정말 다행이다. 만약 내가 동성애자였다면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수자의 편에서 살아가면 편하다. 세상의 상식과 편의시설은 모두 다수자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들은 모두 이성애자가 되길 바란다. 나왔다면 들어간 자와 들어갔다면 나온 자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혹시 누군가 지금까지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다면 한없는 연민을 느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사람의 감정이나 본능은 치료나 단념의 대상이 아니라 분명히 이해와 배려의 대상이다. 또한 남에게 함부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돌을 던지지 않으면 좋겠다. 만약 그 돌이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향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던질 것인가? 하일성 야구 해설가가 수시로 한 말이 "야구 몰라요."였는데,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사람 몰라요."


코로나가 옛날이야기가 되어 마라톤 대회가 다시 열리고 어느 남성 러너가 예쁜 여장을 하고 달리면 그냥 퉁명스럽게 지나지 않고 학창 시절 여장을 한 친구의 모습을 보며 포복절도했듯이 웃지는 않더라도 싱긋 웃거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거나, 그를 멈춰세워 사진이라도 같이 찍으면 어떨까 싶다. 대체로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축제를 빌어 본인의 성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은 누군가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를 향한 관심과 미소는 분명히 세상을 살아가는 위로와 용기가 될 테니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무가 인생사진을 만든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