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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시 Mar 16. 2021

달리기하며 주고받는 티키타카

트레일 러닝을 하며 하는 대화


이봉주 아니면 황영조, 그도 아니면 킵초게 정도는 되어야 달리기를 본업으로 하며 살아가지 그들에 비하면 달리기 수준이 거북이 정도 되는 나는 재미나 건강을 위해 달린다. 주말을 맞아 함께 달린 동네형도 마찬가지다. 주말은 평일과 달리 시간을 내기가 아주 좋아 달리기 시간을 여유롭게 잡는다. 달리는 시간이 많은 만큼 주고받는 대화는 자연스럽게 쌓인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은 <미스트롯 2>에서 은가은 씨가 부른 노래 <티키타카>를 흥얼거리게 하거나 스페인 축구를 전성기로 이끈 티키타카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대화의 첫 패스는 가볍고 부담 없어야 정상인데, 그가 건넨 포문은 학교폭력이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인 그는 올해 옮긴 학교에서 학교폭력을 담당하게 됐다고 한다. 새로 간 학교에서 똥도 몇 번 싸지 않았는데 벌써 사고 친 학생이 생겼다는 말은 힘겨운 비탈길을 떠올리게 했다. 가해자는 장난이었고 사과를 하려고 했다지만, 피해자의 성토에는 날카로운 바늘과 칼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진실일까? 십중팔구 가해자의 사과는 악어의 눈물이다. 사건의 결론은 눈에 보인다. 가해자는 전학을 가고 학교폭력의 가해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의 앞날은 내가 달린 불암산이나 수락산의 어느 오르막일 거라는 생각은커녕 나조차 가보지 않은 히말라야나 파타고니아의 어느 암벽이거나 빙벽 정도는 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학생에게 나는 동정심이라고는 1도 갖지 않았다.


알고 보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괜찮은 사람이다. "그 사람도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시로 하거나 듣는 건 인간의 법칙이다. 이미 가해자 학생을 알고 있는 선생님의 입에선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가해자의 부모는 이혼했고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오히려 귀찮아했다고 한다. 기가 찰 노릇이긴 했다. 했으면 책임져야 하고 낳았으면 제대로 된 사랑을 주어야 한다. 그래도 혹시나 그가 가해자를 측은하게 여길까 봐 한마디 했다. "그 아이를 용서하면 다음에는 더 큰 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다행히 그는 "요즘은 절대 그럴 수 없다"라고 쐐기를 박으며 나의 불안한 그림자를 한 방에 날려주었다.


무거운 패스를 받은 나는 기분 좋고 경쾌한 패스를 했다.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이 경쟁하듯 유혹하는 4월에 북한산 둘레길을 한 바퀴 하자고 했다. 북한산 둘레길이 60km니까 토요일 일요일 30km씩 한방에 조지자고 했다. 둘레길 30km가 만만치 않은 거리지만 봄이라는 설렘과 오랜만에 반바지와 반팔을 차려입고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오른다는 기대감이 온몸을 감쌌다. 트레일 러닝을 하는 두 남자의 계획은 거침없었으나, 숨쉬기가 곤란한 오르막을 오르는 순간 꼬리를 거침없이 내렸다. 한 주에 한 번, 두 주에 완주하기로 했다.


요즘은 대한민국 사람 둘 이상만 모이면 집 이야기 주식 이야기를 한다는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씩 주고받는 완벽하고 화려한 티키타카를 선보였다. 나는 집 그는 주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내가 먼저 집 이야기를 꺼냈다. "이 집에 이사 온 1년 반쯤 전부터 계속 층간 소음 문제로 시달리고 있다. 급기야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주위의 집을 알아보는데, 우리 집값보다 남의 집이 훨씬 더 많이 오른 머피의 법칙에 기분이 지하로 내려간 건 물론이고 새로운 집을 사는데 드는 세금만 수천만 원이 든다는 사실에 말문이 막힌다. 앞으로는 이사 가지 말고 살던 집에 계속 살라는 느낌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집값 상승이냐?"라고 나는 외쳤고 "그러게 말이여"라고 그는 답했다.   


그가 날린 패스는 주식이었다. 지난주 쿠팡이 미국 증시에 상장을 했는데 시가총액이 95조 원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빅테크 기업인 네이버가 62조, 카카오가 42조인데, 쿠팡이 이 두 기업을 능가했다는 현실이 말이 되냐고 나는 되물었다. 네이버와 카카오의 기업가치도 현재의 실적에 비하면 고평가라고 하면서도 네이버와 카카오의 실적은 계속 올라갈 것이라는데 입을 모았다. 하지만, 주가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둘 다 말꼬리를 내렸는데, 속에서는 '그걸 알면 얼마나 좋겠냐'하는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는 가벼운 패스로 티키타카를 이어갔다. 중간중간 멈춰 사진을 찍는 내게 왜 그리 사진을 자주 찍냐고 물었다. "무엇이든 기록해놓으면 그것이 글감이 된다. 사진에서 떠오르는 영감이 글이 되기도 하고 사진을 보며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라고 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록하는 건 참 좋은 습관이다."라고 했다. 그의 아내도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고 덧붙였다. 시와 그림을 좋아하고 잘 쓰고 그리니 동화책을 쓰면 훌륭한 작품이 될 거라고 하는 순간 얼굴에는 다양한 미소가 들썩였다. 팔불출이 떠올랐다.


평지와 내리막을 거침없이 달리다가 거대한 고래바위를 만난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고래 잡는 소년이 되어 고래 위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나의 인생 신조 중 하나가 <놀 때는 아이처럼>인데, 그 순간이 그렇게 할 때였다. 고래바위 위에서 나는 각종 오두방정을 떨고 그는 사진을 찍어주었다. 대단한 인생 사진이 나오진 않았지만, 재미있는 놀이를 포착하기엔 충분했다.


갑자기 둘레길 사이로 대로가 나타났고 그 앞에 식당이 하나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아직 2km는 더 달려야 계획한 도봉산역이 나온다. 문득 그가 거기까지 꼭 가야 하냐고 물었다. 그만 달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자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달리기 대회가 아니니 끝까지 달릴 이유는 없었다. 벌써 15km 넘게 달린 터라 다리는 "그만 달리라"라고 말했고 배는 "맛있는 거 먹자"라고 주장했다.


티키타카는 식당에서도 이어졌다. 이후의 일정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는 책 읽고 낮잠 자며 여유롭게 보낼 거라고 했다. 나는 오랜만에 커플티를 사고 저녁에는 아내와 와인을 한잔할 계획이라고 했다. "인생이 별거 있냐고. 맛있는 거 먹고 돈 벌었으니 돈도 쓰고 술도 한잔하고, 그러다 보면 인생이 풍성하게 채워진다고"했다.


밥값은 동네형이 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은 공짜 밥이 아니고 남이 해주는 밥이라 역시나 맛있었다. 밥 다음에는 커피가 필수여야 하지만, 시간 관계상 서양 누룽지 음료는 다음에 하기로 했다. 조금 걸어 내려오는데 집 앞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예상치 못한 버스가 반가워 서둘러 동네형과 헤어졌다. 문을 닫고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멈춰 세웠다.


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뿔싸 내 손에는 카드는 물론이요 현금 일푼도 없었다.  당황한 나를 본 기사님의 눈치는 이세돌 구단의 급수를 능가했다. "그냥 타고 가시죠."

그가 건넨 말은 그날 달리기의 티키타카를 마무리하는 멋진 패스였다. 이 행운의 상황과 미처 전하지 못한 고마움의 말을 동네형의 카톡에 남기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토요일 오전은 한가했고 사람들은 여유로웠다. 그 모습은 내 마음과 닮아있었다. 티키타카가 기분 좋게 마무리되어 내 얼굴에도 이런 미소 저런 다양한 미소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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