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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시 May 17. 2021

결항된 비행기와 부서진 태블릿

여행도 새옹지마


제주로 떠나는 날이었다. 오후 반차를 내고 집으로 오는 길은 설렜다. 여행 백팩을 둘러메고 아들이 기다리는 학교로 갔다. 막 학교를 마친 아들과 함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아빠"라고 부르는 아들의 목소리는 소프라노였다.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제주 날씨가 별로인가 봐. 결항 편이 생기네."

설레는 마음에 미세한 펑크가 났다. 아내가 보내준 한국공항공사 사이트에 들어갔다. 제주 날씨가 좋지 않았다. 몇 개의 항공편은 이미 결항됐다. 우리가 탈 비행기의 결항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중에도 후속 비행기의 결항 소식은 계속됐다. 마치 재난 지역의 긴급 속보 같았다. 내가 탈 비행기는 수속 중단이었다. 마음의 결심을 할 차례였다. 공항에서 무작정 대기할지, 다음날 떠날지. 공항에 도착해서 앉을 자리를 찾고 있을 때 카톡으로 메시지가 왔다. 결항 소식이었다. 인생 첫 경험이었다.


비행기 결항은 매우 불운한 사건이었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다음 할 일은 언제 출발할 수 있을지 판단하는 것이었다. 어플로 제주 날씨를 보니 다음날 새벽부터는 바람이 잠잠해지고 비행기 이착륙도 문제없어 보였다. 얼른 첫 비행기를 예약했다. 다음은 집에 돌아갈지 근처에서 잘지만 정하면 됐다. 이왕 시작한 여행,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김포공항 근처에서 놀기로 했다. 우리는 김포공항은 알지만 김포는 처음이었다. 낯선 곳에서 머무는 게 여행이라면 김포에서 머무는 것도 여행이었다.


부킹닷컴에서 제주 호텔을 취소하고 김포 호텔을 예약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제주 호텔은 수수료 없이 취소했다. 결항을 부득이한 사유로 인정해 준 호텔의 배려 덕이었다. 호텔이 돈을 다 받아도 어쩔 수 없었기에 고마웠다. 로얄스퀘어 호텔에 짐을 던져놓고 산책하러 나갔다. 비가 살포시 내렸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마침 근처에 공원과 롯데아웃렛이 있었다. 파릇파릇한 공원에서 사진을 찍고 롯데아웃렛에서 사람과 물건 구경을 했다. 산 거라고는 연필이 전부였다. 숙제할 학습지는 가져왔는데 연필은 두고 온 아들이 필요하다고 해서였다.


그러는 사이 벌써 저녁식사 시간이 됐다. 고깃집에 들어갔다. 한우는 아니지만, 소고기 갈빗살과 차돌박이를 먹기로 했다. 소주와 맥주도 한 병씩 주문했다. 아들은 설레는 여행을 절친에게 생중계했다. "나 비행기 결항돼서 제주 못 가고 오늘 김포에서 잘 거야. 지금은 저녁 먹으러 왔어. 저녁 다 먹고 전화할게."

고기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고 있었다. 아들은 직접 고기를 굽고 싶어 했다. 집게로 고기를 불판에 얹고 뒤집었다. 아이가 자랄수록 내가 할 일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들에게 말했다. "아빠 술 한잔 따라볼래?"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 술을 따랐다. 아들에게 말했다. "어른한테 술을 따를 때는 두 손으로 하는 거야."

"예"

장난이 섞인 대답이었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히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아들에게 처음 술잔을 받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뿌듯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솟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술을 따라드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잠깐 감상에 젖었지만 재빨리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세상 누구보다 밝은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있는 아들 덕분이었다.


첫 비행기를 타려면 일찍 일어나야 했다. 호텔에서 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취소된 항공사에서 문자가 왔다. 내일 아침 7시 비행기로 예약이 변경됐다는 내용이었다. 6시 출발보다 여유 있는 7시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공사도 중요했다. 아들은 태극기가 그려진 비행기를 좋아하니까. 다행히 예약 당일 취소는 수수료가 없었다. 내 손가락만 몇 번 수고하면 될 일이었다.


아들과 베개싸움을 하고 샤워를 했다. 나란히 누워 TV도 봤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이 들었다. 비행기 결항으로 예기치 않은 여행을 시작했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을 받아들이니 여행의 시작은 꽤 괜찮았다.  


제주에 도착해서 둘째 날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도착했다. 스쿠터에 넣은 네 개의 가방을 앞뒤로 메고 한 발짝 내디뎠는데 앞으로 멘 크로스백에서 물건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 안에 아들의 태블릿이 들어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 태블릿에 금이 거미줄처럼 생겼다. 화면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들은 망부석이 됐다. 그 안에 아들의 즐거움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나를 따라왔다.


아들은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염소똥 만한 눈물을 흘렸다.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었다. 근처에 대형마트나 가전 판매점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사주고 싶었지만, 호텔 근처에는 그런 곳이 없었다. 가전제품 매장은 제주 공항이나 서귀포까지 가야 있다. 서귀포로 가는 모레 사준다고 했다. 깨진 태블릿은 3년 전 10만 원을 주고 산 중고 제품이라 바꿀 때도 됐다. 아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피었다. 아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재빨리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들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빠, 보통 아빠들은 그냥 이참에 게임을 끊으라고 할 텐데, 우리 아빠는 좋은 아빠니까 안 그러네. 아빠가 최고야."


아들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아들에게 게임하라고 태블릿을 사주는 아빠가 좋은 아빠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내가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들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는 아빠가 됐기 때문이다. 내가 아들이었다면, 아빠가 일백 번도 더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원망 대신 아빠를 칭찬해 준 아들이 오히려 고마웠다.


잠시 뒤 아들이 말했다. "아빠, 옛날에 어떤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새옹지마 이야기였다. 헌 태블릿이 망가지고 새 태블릿이 생겼으니 아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새옹지마였다. 아들이 벌써 이만큼 자랐나 싶었다. 언제나 아이들은 부모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빨리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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