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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시 May 19. 2021

삼양해수욕장에서 물 피하기 놀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부모

"아빠, 난 하늘색 바다가 좋아!"

삼양해변을 마주한 아들이 한 말이었다. 아이와 어른의 단어가 서로 다를 때가 있다. 아이의 하늘색은 어른의 에메랄드 색과 같다. 하늘과 에메랄드는 자연과 보석이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늘은 아이의 꿈이고 에메랄드는 어른의 꿈이라고 여기면 지나친 해석일까? 보통의 아이들과 어른은 특별한 생각 없이 하늘색과 에메랄드 색이라고 말하지만, 처음 에메랄드 색이라고 이름 붙인 사람의 의도는 분명할 것이다.

보석!


어른을 아이로 만들어주는 장소는 부모와 자식을 좀 더 가깝게 이어준다. 바다에서 나의 마음은 타임머신을 타고 몇십 년 전으로 돌아갔다. 새치가 하나씩 생기는 나이지만 마음은 어린이가 되어 아들의 수준과 비슷해졌다. 내 마음은 썰물에만 드러나는 백사장 같았다. 아들은 이런 나를 더 가깝게 느꼈다. 내 마음이 어린이가 되고 내 생각이 아이 수준이 되는 장소를 자주 찾아야 하는 이유였다.


둘이 걷고 뛰면서 바다 주위를 맴돌았다. 날씨가 더운 여름이었다면 당장 바닷가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용암처럼 솟구쳤지만, 차가운 바람이 끓어오르는 용솟음을 식혀주었다.


무턱대고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이제 아들이 제법 자라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면 옷이 젖고, 모래를 털어야 하고, 빨래를 해야 하고, 빨래를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아이가 자랐다는 증거이자 아빠를 배려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괜찮아, 물에 들어가서 놀고 빨래는 나중에 생각하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스쿠터에는 젖은 빨래를 넣을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영은 수영장에서 하기로 했다.


"아빠, 물 피하기 놀이하자." 해변으로 밀려 나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아들이 말했다. 아들의 말은 나를 괌 건비치와 부산 해운대로 데려갔다. 몇 년 전 괌에 갔을 때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리면, 돌아오는 비행기 시간이 자정쯤이었다. 넉넉한 시간에 우리는 괌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답다는 건비치로 갔다.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던 건(gun)이 곳곳에 유적으로 남아있다고 해서 건비치다. 우리 가족은 수많은 연인들과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우리 눈에는 아이들만 보였다.

딸과 아들은 해변에서 물 피하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지는 태양 아래 두 아이들이 뛰는 모습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인생 최고의 석양이다. 그 자리에 두 아이가 없었다면 평범한 석양 또는 당시에만 가장 아름다운 노을일 수도 있었다. 최고의 석양으로 만든 건 두 아이였다. 내 아이들이 만든 석양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해운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딸과 아들을 바다에 풀어놓으면 둘은 늘 알아서 뛰어다닌다. 파도 피하기 놀이는 필수다. 그러다가 꼭 한 명은 신발을 물에 빠뜨린다. 어른의 마음으로 보면 말려야 하는 일이 생긴 거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잠시 차갑고 불편할 뿐, 그 순간을 금세 잊는다. 이왕 빠졌으니 두 신발 모두 물에 풍덩하거나 아예 신발을 벗고 더 과감히 물 가까이 들어간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다. 세상의 모든 행복이 찾아와 얼굴에 퍼진다. 아이들이 더 깔깔댈수록 행복은 봄날의 벚꽃처럼 더 화사하게 피어난다.


아들과 본격적인 물 피하기 놀이를 시작했다. 아직까지 내가 아들보다 빠르고 순발력도 낫지만, 내게는 아들을 생각하는 아빠의 마음이 있다. 물 피하기 놀이에서 이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둘 다 메쉬로 된 러닝화를 신고 있어서 금방 마를 테니 신발이 좀 젖는다고 해도 문제가 되진 않았다. 누군가 곁에 있었다면 "신발을 벗고 놀지 그래요?"라고 훈수를 뒀겠지만, 물 피하기 놀이는 신발이 젖어야 제맛이다.

작은 파도는 물을 멀리 보내지 못한다. 큰 파도만 물을 멀리 보내며 우리를 달리게도 신나게도 했다. 간혹 예측하기 힘들 만큼 물을 더 빨리 더 멀리 보내는 파도가 있었다. 잠깐 방심하는 사이 네 짝의 신발 중 한 짝은 물을 피하지 못했다. 신발이 하나씩 젖어나갈수록 아들의 입에선 웃음이 나왔다. 아들이 웃으면 나도 따라 웃었다. 제주는, 바다는, 파도는, 놀이는 우리를 웃고 떠들고 즐겁게 만들었다. 물 피하기 놀이는 내 신발이 먼저 젖고 아들 신발이 마저 젖을 때쯤 끝났다.


아들은 바닷가로 가서 바다를 바라보고 나는 그런 아들을 바라봤다. 그 모습이 꼭 부모와 자식의 앞날을 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자랄수록 더 세상을 향해 들어가고 부모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본다. 만만치 않은 세상을 마주해야 하는 자식들은 부모를 돌아볼 겨를이 없을 것이다. 멋진 인생을 살아가길 바라는 부모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응원할 것이다.


작년에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 그 책을 읽었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되어 그 책을 읽으니 180도 다르게 다가왔다. 소년은 자식이었고 나무는 부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어른 입장에서 보면 나무에게 끊임없이 바라는 소년이 야속했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이해되고도 남았다.

자식인 동시에 부모인 나는 그 책을 읽으며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됐다. 자식이 아무리 원해도, 내 모든 걸 아낌없이 주어도, 부모는 아깝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줄 것이 남아서 기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던 아들은 혼자서 모래 밟기 놀이를 하듯 바다 쪽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뒷걸음질 치기도 했다.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른의 고정관념일 수 있어서다. 아들은 그저 하늘빛이 좋아서 바다 빛이 좋아서 바람이 좋아서 파도가 좋아서, 무엇이든 좋아서 바라보고 걷고 뛰어다닐 나이였다. 이제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이니까.


삼양해변은 우리가 찾은 첫 번째 해변이다. 앞으로 만날 함덕 해변, 월정 해변, 서빈백사, 협재 해변, 애월 해변은 더 하늘색 빛깔을 우리에게 선물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그곳은 예쁜 텀블러가 있는 스타벅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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