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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시 May 23. 2021

제주도 부자 여행 5화. 길에서 받은 호의

제주 도민께 감사하며

에코랜드 티켓을 네이버로 예매했다. 10% 할인을 받았다. 사람은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비합리적이다. 맛 차이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커피를 살 때는 몇 천 원을 아무렇지 않게 더 쓰면서 천 원 할인을 받으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검색 노력 덕분에 둘이서 2천 원가량 아낄 수 있었지만 웃음이 났다.

대부분의 할인 티켓은 당일 적용을 못 받는데 에코랜드는 예매 한 시간 후부터 사용할 수 있었다. 그곳까지 스쿠터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20분이라 가는 도중 점심을 먹으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입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들은 자동차 타기를 꺼려한다. 가까운 거리는 별문제 없지만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메스꺼워하고 때로는 멀미를 한다.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면 이렇게 해서 여행을 해야 할까, 가끔은 혼돈스러워진다. 그에 비해 스쿠터는 매력만점이다. 멀미를 할 이유가 없어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아들이 스쿠터를 이동 수단이 아닌 놀이기구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타야 할 만큼 장거리 여행이 아닐 때만 가능하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긴 하지만.  


스쿠터를 타면 풍경이 360도다. 운전을 해야 하는 나는 전방을 주시해야 하지만, 뒷좌석에 앉은 아들은 나를 안고 있는 동안에도 전후좌우 360도를 바라볼 수 있었다. 길에서 만나는 풍경, 길을 가는 사람, 옆에서 지나가는 자동차 모두 아이의 눈에 들어갔고, 호기심이 되었고, 질문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어릴 때부터 질문이 많았던 아들은 지금도 여전하다. 가끔씩 "그 입 다물라"라는 말이 내 목구멍을 넘어 입안 가득 채워지지만, 아이들은 부모가 귀찮아하는지조차 귀신같이 알기 때문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기 일쑤다. 심호흡 후 차분히 아들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스쿠터의 시끄러운 엔진 소리 때문에 대화가 되지 않았고, 아들은 수시로 노래를 불렀다. 아들이 좋아하는 노래는 트로트다. 간혹 스쿠터가 멈추거나 속도가 느릴 때 가사가 들렸다. 아들이 영탁의 <막걸리 한 잔>을 부르고 있을 때였다. 하필 아들이 부른 가사는 이렇다.

"아빠처럼 살기 싫다고~"

웃으며 물었다. "아빠처럼 살기 싫다고? 진짜로?"

아들은 무슨 뚱딴지 소리냐며 웃으며 답했다. "그냥 가사야, 가사라고~ "

출발할 때까지 우리는 함께 웃었다.


유현준 교수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을 읽었다. 여행자로 국내와 해외를 가리지 않고 다니는 나는 건물, 공간,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이 책을 읽기 전과 후 공간과 도시를 이해하는 나의 안목은 달라졌다. 여행을 좋아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여행 갈 때 들고 가도 좋다. 여행에서 얻는 것과 느끼는 것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 책에는 '불편한 교회, 편안한 절'에 관한 내용이 있다. 그 부분을 읽는 동안 나는 얼마나 공감했는지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인형이었다. 여러 가지 알찬 해설이 있었지만 폐쇄적인 교회 예배당과 개방적인 절의 마당에 특히 수긍했다. 당신이 아는 아무 교회와 절을 떠올려보라. 교회에는 내부와 외부 사이에  굳건한 문이 버티고 있으니 들어가기 꺼려지지만, 절은 늘 열려있고 개방된 마당으로 연결되어 있어 들어가기 편하다. 어린 시절 여름 성경학교 때 교회를 다닌 이후 한 번도 교회에 들어간 적이 없지만, 절에는 산에 갈 때 수시로 드나든다.

아, 해외여행 갔을 때 관광 삼아 간 성당은 예외다.    


브이~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길이 없다.  스쿠터는 달랐다. 문 없는 절처럼 스쿠터에도 문이 없다. 차벽은 물론 창문조차 없다. 스쿠터는 외부와 완전히 연결된 상태라 누군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면 그들과 우리 사이엔 벽이 없어지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만 남는다.

아무리 스쿠터가 개방됐더라도 어른 혼자 타고 있다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 남자 어른은 존재 자체로 벽이니까.

어린아이가 뒤에 타고 있는 순간 누군가는 궁금해한다. '저 둘은 제주도 사람일까? 육지에서 왔을까?'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냐 하면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아들과 함께 대구 처가에 간 아내가 지하철에서 전화를 했다. 전화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중요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질문을 해서 의아스러웠다. 한 시간쯤 뒤 아내는 다시 전화를 했다. 어떤 할머니가 아들과 함께 있는 자기에게 1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전화했다고 말했다. 드문 경우이지만 아이와 함께 길을 가다 보면 누군가의 관심을 받게 되는 건 확실하다. 이유는 단 하나다. 아이가 뿜어내는 매력 때문이다.


제주의 길에는 신호등이 많았고 그만큼 멈추는 순간도 많았다. 가끔 뒤에서 아들이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도 했는데, 엔진 소리 때문에 귀에 쏙쏙 들어오지는 않았다. 아들은 내가 모든 질문에 답하리라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시끄러워 안 들리는 줄 알면서도 아빠에게 말을 걸고 싶어 했다. 멈추고 나서야 아들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신호등 앞에 멈췄을 때 아들이 예의 바른 존칭을 쓰고 있었다.

"네, 여행 중이에요." 아들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까 우리 옆에 멈춰 선 1톤 트럭 운전기사분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분도 아이를 좋아하는 어른이 분명했다.

"학교에는 안 갔어?"

"네. 오늘 학교 방학이에요."

"방학이라 제주도 여행 왔구나. 어디서 왔니?"

"서울에서 왔어요."

"와, 멀리서 왔네. 좋겠다. 제주도 좋지?"

"네, 좋아요. 지금은 에코랜드 가는 중이에요."

"아빠랑 여행 다녀서 정말 좋겠다. 좋은 아빠랑 즐거운 시간 보내라."

"네. 고맙습니다."

듣고 있는 나는 흐뭇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잠자코 듣기만 했다. 신호가 바뀌었을 때 나는 운전기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트럭 기사분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즐거운 추억 많이 만들어 가세요. 운전 조심하시고요. 아주 멋진 부자입니다."

아들이 그토록 예의 바르고 인사성이 밝은지 처음 알았다. 아들에 대한 신뢰도가 천장을 찌를 듯 솟았다. 그때 이후 아들이 하는 행동을 곰곰이 지켜보았다. 식당에서 숙소에서, 여행지에서, 아들은 누구에게나 밝게 인사를 하고 어른들이 하는 질문에 공손히 대답했다. 여행이 알려준 아들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트럭 기사분의 호의 이후 우리는 수시로 누군가의 고마운 인사와 응원을 받았다. 문구점 주인아주머니, 식당 아주머니들, 함덕 해변에서 만난 가족 여행객, 카페 사장님, 그들 모두는 누군가의 엄마이거나 아빠였다.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다. 어디서나 비율의 법칙은 존재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비율,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사람들의 비율, 우리는 그 비율대로 호의를 받았다. 시끌시끌 정신없는 식당이 아닌 느릿느릿 어촌 식당에서, 복잡복잡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닌 놀멍쉬멍 카페에서 우리는 더 많은 관심과 호의를 받았다. 그건 여유의 법칙이었다.


스쿠터 여행자인 우리는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열려있었고 아이를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기분 좋은 소통은 나와 아이에게 세상을 더 열린 자세로 보게 했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피하라고 가르치는 각박한 요즘도 선하고 좋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준 제주 도민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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