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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시 May 31. 2021

아빠와 아들의 스쿠터 타고 제주 한 바퀴 6화

새 것만 좋냐? 헌 것도 좋다.

새것만 좋으냐 헌 것도 좋다. 무슨 말인가 하면 헌 것의 장점이 있다는 말이다. 새 차를 사면 혹시 누가 내 차에 해코지를 할까 신경 쓰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무뎌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누가 긁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헌 차가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항상 새것이 좋은 건 아니다.


우리가 타고 있던 스쿠터는 무거워 누가 들고 갈 일은 없었다. 풀 커버 보험을 가입해서 누군가 긁어도 문제없었다. 하지만 헬맷은 달랐다. 누가 마음만 먹으면 들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린 아무 걱정이 없었다. 누가 탐낼 만큼 깨끗하거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헬맷의 턱끈은 고정도 잘 되지 않았다. 좀 더 꼼꼼히 살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여행 내내 신경 쓰일 만큼. 덕분에 아무 곳에나 던져놓아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는 스쿠터를 빈 공간에 세우고 헬맷을 대충 걸어놓고 에코랜드로 들어갔다.


무엇이든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이런저런 스쿠터를 탔고 요런조런 경험을 해봤지만 제주에서 선택한 스쿠터는 처음 타는 기종이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당기면 움직이는 스쿠터라 운전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스쿠터 대여소에서 삼양해변까지 한 번, 삼양해변에서 스타벅스까지 한 번, 스타벅스에서 에코랜드까지 한 번, 총 세 번을 운전하는 동안 나는 스쿠터에 익숙해졌다. 에코랜드에 다다를 즈음에는 예전부터 내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인생도 세 번이면 원래부터 내 인생인 것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질까? 더 멋지게 살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에코랜드서 관광객은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기차는 막 출발하려고 했다. 기차는 10분 간격으로 출발했지만 뭔가 딱딱 들어맞는 느낌이 들었다. 신호빨이 좋을 때의 기분이었다. 다섯 살 정도 되는 아이와 엄마가 앉은 칸으로 들어갔다. 내 맞은편 엄마를 보는 순간 내 눈은 갈 곳을 잃었다. 그녀의 가슴은 70% 정도 노출되어 있었다. 외모, 몸매, 가슴이 미스코리아 뺨치는 수준이었지만 나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첫 번째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 나를 쫓아오는 것처럼 서둘러 내렸다. 노출은 누구에게나 자유지만, 내가 이런 질문을 하면 누군가 '꼰대'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꼭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모든 이의 공간에서 꼭 그렇게 여성미를 드러내야 하나요?


날씨가 여행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나는 최소한 70% 이상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대부분 야외에서 이루어지고 해가 사람들의 마음까지 좌지우지하는 걸 감안하면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에코랜드에선 날씨가 다 했다. 화창한 날씨를 머금은 에코랜드는 마치 원색 물감을 뿌린 듯 초록초록 예뻤다. 나무와 잔디, 숲과 호수는 더없이 푸른 오월을 선사했다.


첫 번째 정거장에 내려 모터보트를 탔다. 어린 시절 놀이기구를 즐겼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어지러워졌고,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됐다. 우리가 탄 모터보트는 빙글빙글 돌기가 주특기였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어지러웠고,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지러운 만큼 아들은 즐거워했다. 아들은 어느새 용기와 모험으로 충만한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나이를 먹고 자란다더니, 우리가 딱 그랬다.


모터보트에서 내려 너른 들판으로 이동하는 중간에 말을 탄 돈키호테 모형과 풍차가 있었다. 돈키호테가 주로 활동했던 스페인 라만차 지역을 재현했을 것이다. 스페인에 가고 싶었다. 스페인에 두 번 갔지만, 그곳은 계속 가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다른 서유럽에 비해 물가도 저렴하고 먹거리도 풍부하다. 거기에 볼거리와 즐길거리도 충분하니 어찌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코로나가 사라지면 제일 먼저 가고 싶은 나라다.

어린 시절 돈키호테 동화책을 읽어봤을 텐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풍자소설의 걸작이라 불리는 돈키호테를 어린이 버전과 어른 버전으로 사서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졌다. 아들이 책을 읽기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기차를 타고 다음 정거장에 내리자 푸른 들판이 펼쳐졌다. 초록 잔디 위에 서니 아들과 함께 달리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아들도 달리기를 좋아한다. 3학년 운동회를 앞두고 계주 대표 선발전이 있었다. 아들은 탈락했고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아들은 길을 걷다가 수시로 달리자고 한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달리자고 했다. "서준아 뛰자"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오케이"

"하나 둘 셋 출발"

아들과 함께 푸른 들판 위에서 달렸다. 아이들이 달리는 모습은 어린이날 영상의 단골손님이다. 아이들이 좋아하기 때문인지 어른들의 바람인지 알 수는 없으나 뛰어다니는 건 아이들의 특징이다. 파아란 하늘, 초록 나무, 연두 잔디는 마음에 쏙 드는 사진을 선사했다. 비록 그대가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푸르고 푸른 하늘 아래서 초록 숲이나 잔디를 걷고 있다면 아이와 함께 달려보는 건 어떨까요? 아빠와 아이는 달리고 엄마는 사진을 찍는 거지요. 길게 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10미터, 50미터, 100미터,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두고두고 생각날 추억이 되지 않을까요?


노오란 유채꽃이 펼쳐진 정원에 들어섰을 때 아들은 엄마에게 카카오톡 페이스톡을 걸었다. 우리는 제주도에 있지만 아내와 딸은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들은 달랐다. 벚꽃이니 개나리니 하는 꽃들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유채꽃을 본 순간 엄마와 누나가 떠올랐나 보다. 페이스톡을 하며 엄마와 누나에게 꽃을 보여주었다. 나에게 없는 모습을 아들이 보여주는 이유는 아들은 부모의 DNA를 반씩 타고나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이 통화를 하는 동안 나는 유채꽃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수록 나무와 꽃이 좋다. 그것들은 어릴 때는 관심조차 없던 자연의 일부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꽃과 나무가 좋아지는 건 자연으로 돌아갈 시간이 조금씩 가까워져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은 동물을 좋아한다. 유채꽃 옆에 말이 여섯 마리 있었다. 아들은 그들이 마치 자기의 오랜 친구인 것처럼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이 당근을 먹이로 주고 있었다. 아들도 하고 싶어 했다. 당근을 사려면 200m는 뛰어가야 했다. 아마추어 마라토너로 살아가지만, 왕복 400미터를 걷기는 싫었다.

"서준아 꼭 해야 돼?"

"어, 꼭 하고 싶은데, 내가 갔다 올게."

아들은 아빠가 귀찮아한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챘다. 아들에게 5천 원을 주었다. 말이 당근을 달라고 보채지도 않았는데, 무엇이 그리 급한지 아들은 달려갔고 달려왔다. 그러고는 헐떡이며 멈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들은 염소나 양, 토끼에게 먹이주기를 해봤지만, 말처럼 큰 동물에게 먹이를 준 적은 없었다. 말이 혹시라도 자기의 손을 물까 봐 주저했다. 아들은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해보라는 것 같았다. 내가 시범을 보여야 할 순간이었다. 당근을 어묵 꼬챙이에 끼워 말의 입에 갖다 댔다. 말은 당근만 먹고 아빠의 손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아들은 그제야 당근을 말의 입에 갖다 댔다. 말이 당근을 먹을 때마다 아들은 혼잣말로 감탄하고 웃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도 같이 웃었다.


에코랜드의 마지막 구간은 기차를 타지 않고 걸었다. 숲 속에서 아들과 나란히 걷는 자체가 좋았다. 중간중간 달리기도 했다. 아들이 앞설 때도 내가 앞설 때도 있었다. 어느새 아들은 아빠의 여행 친구가 될 만큼 쑥 자랐던 것이다.


주차장으로 갔다. 역시 헌것의 장점이 있었다. 헬멧은 우리가 둔 채로 있었다. 에코랜드에 다니는 동안 우리는 헬멧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도 그 이후 계속된 여행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소한 데 쓸 여력이 없기도 했거니와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낡은 헬멧 덕분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헬멧 턱끈의 잠금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건 좀 심하지 않나요? 스쿠터 대여점 사장님들이 이 글을 꼭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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