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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시 Jun 02. 2021

아빠와 아들의 제주도 한 바퀴 스쿠터 여행

7화. 여행이라는 그림

여행을 할 때 한 번 와 봤던 곳은 밑그림이 그려진 곳에 색칠을 하는 느낌이다. 과거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르는 탓이다. 처음 가는 여행지는 밑그림부터 시작해서 색칠까지 한 번에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새로운 경험을 하고 그 기억을 생생하게 담아 가기 때문이다. 제주는 여러 번 왔지만 함덕 해변은 처음이다. 나는 아들과 밑그림을 그리고 파랗고 노랗고 빠알간 색을 칠해 빛나는 추억을 담으리라 계획했다. 스쿠터가 호텔로 들어서는 순간 드넓게 펼쳐진 함덕 해변이 먼저 우리를 반겼다. 호텔에 들어가기 전에 해변 옆에서 멈췄다. "우와" 감탄사를 먼저 쏟았다. 마치 그래야 하는 의식처럼.


바로 해변 산책을 나가려고 했으나 의도치 않게 내가 아들의 태블릿을 부수는 바람에 30분가량 늦춰졌다. 내가 태블릿을 부수는 순간 오후 여행은 날리나 싶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행에서 아들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2019년 가족들과 한 달간 유럽여행을 갔을 때다. 제일 먼저 도착한 도시는 런던이었다. 런던 시티 공항에서 내려 지하철을 탔다. 출근시간이라 서울의 지하철만큼 복잡했다. 캐리어를 바닥에 두고 백팩은 뒤로 메고 지갑이 든 크로스백은 앞으로 메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건드리며 영어로 구시렁댔다.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백팩이 자기를 불편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방을 벗어 바닥에 내리며 말했다. "I'm sorry"


고개를 앞으로 돌리니 크로스백의 열려있었다. 그 순간에는 지갑이 사라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하철 티켓을 구입하고 가방을 잠그지 않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면서 지갑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돈을 여러 군데 분산해 놓아 큰돈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한화로 40만 원 정도였다. 그래도 분했고 진정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데는 1시간 정도 걸렸다. 1시간 만에 마음에 평정을 찾은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들은 20분 정도 만에 평상심을 찾았다. 청출어람이었다. 아이의 마음이 어른보다 더 몰랑몰랑해서 그런 걸까?  


함덕 해변의 바다색은 아들이 좋아하는 하늘색이었다. 양말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옷을 젖지 않고 누가 더 멀리 가나 내기를 했다. 승부는 해보나 마나였다. 아들보다 키가 큰 나는 이겼다고 만세를 불렀고 아들은 아빠도 젖어야 한다며 물을 뿌렸다. 승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의 마음에도 손상을 주지 않았다. 아들이 하늘로 뿌린 물방울은 구름 한 점 없는 제주 하늘이 쏟아낸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며 떨어졌다. 물방울은 바다와 섞여 사라졌지만 영화 같은 순간은 나의 마음으로 들어왔다. 아들의 얼굴은 온갖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부서진 태블릿에 눈물을 흘린 순간이 있었나 싶을 만큼. 똥꼬에 털이 날 상황이었다.  


어린이날이었다. 휴일을 맞아 여행 온 관광객들이 함덕 해변을 수놓았다. 가족들 연인들 친구들, 그들의 얼굴엔 행복이 춤추고 있었다. 우리가 바닷가에서 모래사장으로 나오는 사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가족의 아빠가 사진을 부탁했다. 거절할 내가 아니다. 가족의 사진을 찍는 건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보는 것이자 그들의 행복을 영원히 저장하는 순간이다. 내가 개고생 하는 동안 누군가 웃고 떠들고 즐기면 싸다구를 날리고픈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여행에서 그런 경우는 없다. 누군가의 행복을 보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넉넉한 마음을 담아 여러 장을 찍었다. 누군가는 눈을 감았을 수도 있으니까, 세 사람 모두의 표정이 좋아야 하니까, 목포 가족이 세 명이라 인원수에 하나를 더해 네 장을 찍었다.


칭찬과 호의는 타인을 행복하게 한다. 돈 하나 들지 않고 누군가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목포 가족이 아들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어?"

아들이 대답했다. "서울에서 왔어요." 목포에서 온 가족의 엄마가 딸에게 말했다. "저 오빠는 서울에서 왔데"

아이의 엄마는 처음 본 남의 아이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라는 단어는 호의가 가득 담긴 단어였다.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는 서로에게 여행을 잘 보내고 즐거운 추억을 가득 만들라며 덕담했다.  


지금은 서울 사람이 맞지만 나는 30여 년간 지역에서 살았다. 경북의 어느 시골에 살 때는 대구만 나가도 설렜고 외삼촌이 사는 서울에 올 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막상 서울에 사니까 별 감흥이 없다. 그건 익숙해져서 일 수도 있고 미지의 세계를 더 좋게 바라보는 인간의 본능일 수도 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심리 말이다.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에도 공감한다. '성공'이나 '출세'에 관점에서 보면.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삶의 속도는 느려지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도 달라진다. 아직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느림의 가치가 내 몸속에 조금씩 싹튼다는 생각이 든다. 복잡하고 정신없는 서울보다는 있을 건 다 있지만 여유로운 소도시 생활을 꿈꾼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더 여유로운 시골생활을 꿈꿀까? 그건 좀 더 살아봐야 알 것 같다. 그런데 아마 실현하지는 못할 것 같다. 아내가 반대하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정말 시골 생활을 한다면 나 혼자 시골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는 삶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도 꽤 괜찮아 보인다. 양쪽 집 모두 낯선 마음이 들 테니 항상 여행하는 기분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목포 여행자를 만났을 때처럼 여행지에서 사투리를 들으면 고향에 온 느낌이 들어 급격한 친근감을 느낀다. 고향이 경상도인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들을 때 더 그렇다.


거제도에 있는 매미성에 여행 갔을 때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여성 네 분이 웃으며 여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친구 같았고 나보다 열 살 쯤은 많아 보였다. 미혼이었다면 여성 네 명을 상대로 말을 걸 생각조차 못 했을 텐데, 아저씨가 된 나는 급격한 친근감에 말을 걸고 싶어 졌다. 마침 그중 한 분이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서 사진을 찍으며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사투리로 묻지는 않았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 분이 말했다. "나는 거제가 고향이고예, 자랑 자는 거창, 자는 창원"

"와, 반가워요. 제가 거창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든요."

내가 고등학교를 밝히기 전까지 그녀들은 나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출신 고등학교를 밝히자 거창에서 왔다는 두 분이 호기심과 반가움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와 진짜라예? 나는 거창여고, 자는 거창고 나왔거든예"

혹시 독자들이 오해를 할까 봐 미리 밝혀둔다. 그 자리는 남자와 여자를 탐색하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눈빛이 입보다 훨씬 많은 말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나이를 밝히자 그녀들의 눈빛은 막내동생을 보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나도 고향 누나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짧은 대화였지만, 서로의 즐거운 여행을 진심으로 바라며 헤어졌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같은 공간을 공유했다는 것 자체가 서로에게 호감을 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함덕 해변 한쪽에 한눈에도 멋진 카페가 있었다. 그 앞에는 큼지막한 야자수가 있었다. 야자수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이국적인 나무다.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작가는 작가 인생 50년을 기념해 쓴 <혼자 읽고, 함께 살다>라는 책에서 여행을 하라고 권한다. 해외 여행지는 파리를, 국내 여행지는 제주를 추천한다. 파리는 모르겠고 제주를 추천한 건 그곳이 가장 낯설고 새로운 곳이라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아들은 가장 이국적이고 낯선 곳에서 부자 여행이라는 완성된 그림을 꿈꾸며 밑그림을 막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그림이 완성될지는 몰랐지만,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은 한가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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