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알게 된 그림의 매력
"그림이 제일 어려웠어요."
제가 그랬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우미양가 중에 '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미'를 보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기점수로만 보면 항상 하위 10% 안에 들었으니 미술 저능아였습니다. 그림을 못 그리니 그림에 관심도 재미도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수학여행으로 미술관에는 갔을 수는 있겠지만(그것조차도 기억에는 없는)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그림을 보러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이건 시골 아이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시골은 문화 소외지역이기도 하고 부모님들이 대부분 농사를 짓다 보니 미술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지요.
보통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연애를 하면 데이트하러 미술관에도 다니고 한다던데 저는 미술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적 경험과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지요. 늘 그림은 남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때는 여자 친구였던 지금의 아내도 한 번도 미술관에 가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미술에는 관심 없기는 저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시절 교양과목으로 미술을 한번 들어봤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그림이 좋다거나 그림을 보러 미술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여전히 그림에는 관심이 없었던 거지요. 그러다 첫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딸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그림을 잘 그리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던 사람인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더란 말이지요. 둘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태어났어요."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아이들은 색칠놀이를 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재미있는 놀이로 생각했으니까요. 첫째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면 아이의 성향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둘째도 똑같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니 '세상 아이들은 모두가 그림을 좋아하는구나.'라는 착각도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며 제 어린 시절을 생각해봤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 수업시간 외에는 그림을 그려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을 바꿨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그림 그리기를 아무리 좋아해도 그림이 바로 저의 관심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모'라는 이름이 참 희한한 게 아이들이 그림을 좋아하니 덩달아 기분이 좋았고 또 내 아이들은 그림을 좀 즐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그림책을 샀습니다. <명화로 키우는 아이의 감성>이라는 책이었지요. 그 책을 샀을 때는 아직 아들이 글자를 읽지 못하던 때여서 제가 아들과 함께 그림을 보고 읽어주었습니다. 학창 시절 미술시간에 한 번은 봤던 고흐, 르누아르, 김홍도 같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아이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읽었는데 몇 번 읽다 보니 그림이 눈에 익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그림에 대해 조금씩 호감이 생겼습니다.
우리 가족은 1년에 한두 번은 양평으로 1박 2일 여행을 떠납니다. 그림에 조금씩 관심을 가질 무렵 한 번은 우연히 양평군립미술관을 발견하게 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여행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양평군립미술관에 들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보고 미술관과 붙어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카페에 갔더니 아이들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크레파스와 종이가 준비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즐겁게 그림을 그리고 우리 부부는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길 수 있었지요.
"여보 여기 좋네. 양평에 올 때마다 집에 갈 때 오면 되겠다."
"그러게, 미술관도 좋고 커피 마시는 여유도 좋고."
우리가 대화를 하는 그 시간에도 아이들은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처음 미술관을 간 기억이 좋아 양평에 갈 때마다 양평미술관에 들렀습니다. 그래서 양평 여행은 '미술관이 있는 테마여행'이 된 거지요. 양평군립미술관은 갈 때마다 다른 그림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 때마다 오늘은 무엇을 보게 될지 기대되는 미술관입니다.
딸이 3학년일 때 양평군립미술관에 갔더니 전시연계 현장미술 실기대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딸이 그걸 보고는 자기도 그림대회 참가하고 싶다며 그림을 그려 제출했습니다. 딸이 그린 그림은 웃는 호박 그림이었는데 '제법 잘 그렸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미술관 옆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여행을 마감했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후 한 달쯤 지난 시점에 낯선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서영 아버님이시죠? 여기 양평군립미술관인데 박서영 학생이 현장미술 실기대회에서 입상을 했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시상식에 참석 가능하신지 확인 차 전화드렸습니다."
지난달 아이가 그린 그림이 떠올랐고 저의 얼굴엔 이내 미소가 그려졌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나눠주는 상 이외에 그림으로는 딸이 받은 첫 공식적인 상이었습니다. 뿌듯하고 흐뭇했습니다.
"참 신기하네, 누구를 닮아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까지 잘 그릴까?"
벌써 5년이 지났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한참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그때는 미술관이 좋아서 갔다기보다는 "남들 다 가는 곳이니 가본다."라는 생각으로 갔습니다.
미술관은 건물부터 멋졌습니다. 제가 가끔 가던 양평군립미술관을 진짜 동네 미술관으로 만들 만큼 규모도 컸습니다. 들뜬 분위기에서 낯선 이방인들과 뒤섞여 오랜 시간 미술관 여기저기를 다녔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림을 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던 그림 앞에선 꽤 오래 머물렀습니다.
참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림에 소질도 없고 그림을 보는 안목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미술관이 참 좋았습니다. 프라도 미술관에 방문한 이후 저의 그림에 대한 관심도는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서점에 가면 그림책에 눈길이 갔습니다. 점심시간에 한 번도 가지 않았던 회사 근처 덕수궁 현대미술관에 갔습니다. 내 주위 친한 사람 중에 누가 그림을 좋아하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제가 그림에 관심이 없었을 때는 남이 그림을 좋아하든 말든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는데 제가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 누가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면 더 관심이 가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그림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그림책을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그즈음 <그림 속 경제학>, <그림 읽는 CEO> 같은 책을 사서 읽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림이 조금씩 제 삶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예르미타시 박물관전>을 보고 미술관의 매력에 제대로 빠지게 됐습니다. 어느 날 점심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 예르미타시 박물관전> 광고를 보게 됐습니다. 이때도 저는 <예르미타시 박물관>이 세계 3대 미술관인지 알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광고를 보면서 광고 속의 그림을 어디선가 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즈음 저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는 아들에게 <쫑알이 세계문화>라는 책을 읽어주고 있었습니다. 그 광고를 본 며칠 후 <쫑알이 세계문화> 러시아 편을 다시 읽어 주는데 광화문에서 본 그 광고의 그림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이 나왔습니다. 그 광고 속의 예르미타시가 러시아에 있는 박물관이란 것을 알게 됐지요. <쫑알이 세계문화>에는 겨울궁전이 이렇게 소개돼 있었습니다.
『겨울궁전을 왜 보물 창고라고 할까요?
겨울 궁전에 살았던 예카테리나 여왕은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아서 궁전에 걸어 놓았어요. 이를 본 왕족과 귀족들도 자랑하려고 앞 다퉈 예술품들을 모았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들어서자 예술품들은 모두 국가의 차지가 되었어요. 그러면서 귀족들이 모은 유명한 예술 작품들이 겨울 궁전에 모이게 되었지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고흐, 고갱, 피카소, 르누아르 등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어요.
이제 왜 겨울 궁전을 보물 창고라고 하는지 알겠지요? 』
그 주 주말에 바로 <예르미타시 박물관전>을 보러 갔습니다. 전시관에 도착해서는 아이들에게 오디오 가이드를 하나씩 주고 아내와 둘이 그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그날 미술관이 데이트하기에도 정말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좋은 그림은 기본이고 마치 외국에 여행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요.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으로 떠나고 싶은 욕망이 용솟음쳤습니다.
오디오 가이드를 하나씩 챙긴 아이들도 그림 감상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림을 제법 즐길 줄 아는 딸은 그림 감상에 집중했고 목표 달성을 좋아하는 아들은 오디오 가이드가 설명해주는 그림은 다 듣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림의 숫자를 찾아 여기저기를 다녔습니다. 딸은 홀로 유유자적 그림을 감상했고 아들을 숫자를 찾지 못할 때만 우리를 찾았지요. 그래서 우리는 느긋하게 그림을 보며 데이트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아이들과 동선이 겹쳤고 그때마다 열심히 그림을 보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흐뭇했습니다.
아이들을 보며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거겠지요? 제가 어릴 때 좋아하던 것을 아이들도 좋아하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제가 좋아하지 않던 것을 아이들이 좋아하면 신기하고 더 기분이 좋습니다. 저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아이에게 '청출어람'을 발견하는 기쁨이 저 혼자만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이 같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좋아해서, 그런 아이들이 좀 더 그림을 잘 그렸으면 하는 마음에, 아이들이 세계적인 화가들의 그림을 알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시간이 쌓여 몇 년이 지났더니 제가 그림을 좋아하고 미술관을 찾아 나서는 날이 왔습니다. 제가 그림과 미술관에 찾아 나서는 날이 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내와 예르미타시전을 보고 국립중앙박물관을 나서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술관 참 좋다. 그치?"
"가끔 와야겠다. 미술관이 이렇게 좋은 곳이었다는 것을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미술관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일부러 미술관을 찾아 나섭니다. 양평 여행 때만이 아닌 서울에서도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저는 세계 3대 미술관 중 프라도 미술관과 예르미타시 미술관은 벌써 가본 사람이 됐습니다. 비록 예르미타시전은 한국에서 반쪽으로만 봤지만요. 이제 루브르 박물관만 남은 셈입니다. 거기에 오르세 미술관을 가야 할 이유도 있습니다. 마침 내년에 유럽여행을 할 계획이니 프랑스에서 가서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은 꼭 일정에 포함해야겠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을 가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지요?
프랑스로 가족여행을 다녀온 지인을 만났습니다. 그림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밀레가 그린 <만종>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해설사의 해설을 듣는데 본인의 삶이 겹쳐서 눈물이 났다는 거지요. 그림은 정말 사람을 위로하는 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저도 거기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눈물이 나는지 안 나는지 확인하고 싶으니까요.
저도 해설이 있는 <만종>을 보며 눈물을 흘릴까요?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