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에필로그, 옥희는
나는 기생집 식모로 팔려갔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식모 대신 기생이 되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당대 최고의 배우가 됐다. 내가 죽은 지 반백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시대로 보면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연예인이 된 셈이니 빛나는 삶이다. 그로 인해 평범한 삶을 살지는 못했으니 기생이 되었다 배우가 된 삶의 그림자다.
기생이 되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을 때부터 삶의 갈림길에선 언제나 나는 내 뜻대로 살았다. 나를 만난 직후부터 순애보 사랑을 보여준 남자의 사랑을 모른 체하고 보잘것없는 남자였던 인력거꾼 청년을 끝까지 사랑한 것도 오롯이 내 선택이었다. 나의 선택에 일말의 후회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다시 살라고 해도 내 선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본능과 감성이니까.
내가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면 나를 사랑했던 남자가 만주로 떠나며 나와 하룻밤을 보낸 그날, 나는 그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날부터 당장 사랑하지는 않았더라도 노력은 했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나는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옥희였으니까.
훗날 그가 만주에서 돌아왔을 땐 반갑고 고마웠다. 그가 나를 여전히 사랑하는지 궁금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이제 와서 그와 내가 다시 만나 무엇을 하겠냐 싶기도 했고, 여전히 그는 나에게 애인이 아닌 친구다. 좋은 친구.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우정이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에게 우정을 느꼈지만 사랑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가 만주로 떠난다고 찾아온 그날은 그와 보낸 첫날밤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나는 절정에 이르렀던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건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연민에서 시작해서 욕망으로 불타올랐고 끝내 가쁜 숨을 몰아쉬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내 내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사랑하지 않는 그에게 나를 내어준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그건 내가 기생으로서 종종 하던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국회의원이지만 공산당이라는 누명을 쓴 그를 위해 내가 평생 사랑했던 사내, 한때는 인력거꾼이었다가 대한민국 최고의 사업가가 된 사람을 찾아갔던 건 내가 힘겨울 때 항상 내 곁에서 나를 도왔던 그에 대한 인간적 보답이자 연민이었다. 그를 그렇게 죽게 두어선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나는 그런 여인이었다.
그가 끝내 사형을 당한 후 내가 제주로 내려간 건 또 다른 삶을 위한 선택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거기서 내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 아이를 만났다.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 주었다. 나를 사랑했던 남자에게 주지 못했던 사랑과 내가 사랑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 아이에게 주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에게 내가 가진 모든 사랑을 주었다.
아이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가 엄마라고 부를 땐 한없이 행복했지만, 아이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이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자랄수록 목엔 주름이 머리엔 흰 머리카락이 하나씩 늘었다. 내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이와 오래도록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은 커져만 갔다.
아이는 자라면서 때로는 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나를 사랑했던 남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항상 내 곁에 있고 나를 지켜주었을 땐 나를 사랑하는 남자였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고 바라만 보아도 행복할 땐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은 남자였다.
어느 날 아이는 나에게 서울로 가자고 했다. 나에겐 여전히 아이였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를 청년이라 불렀을 때다. 아이는 넓을 세상을 보고 싶다고 했다. 아이와 함께 서울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가 선택한 마지막 땅, 제주에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여전히 서울에서 살고 있었고 내가 연락하면 여전히 반겨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지만, 이제 와서 그를 다시 대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같은 땅을 밟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가 떠나자 마음이 허물어졌다. 몸도 예전 같지 않았다. 먹고 싶은 음식도 하나씩 사라졌고 하고 싶은 일도 조금씩 없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밖에 있는 시간은 짧아지고 집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졌다. 하루 두 끼 먹던 밥도 한 끼로 줄었다가 얼마 전부터 하루 한 끼 먹는 날도 드물어졌다.
아이는 떠난 그해는 두 번 왔다. 그다음 해에는 1년에 한 번, 또 시간이 흐른 뒤에는 2~3년에 한 번씩 찾아왔다. 아이가 떠난 지 벌써 10년, 아이가 다녀간 지 3년이 지났으니 올해는 올 차례다. 아이가 보고 싶은 마음에 종종 전화를 했지만, 아이는 도통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나의 사랑에 응하지 않았던 것처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수십 번의 전화 끝에 가끔 아이와 통화가 됐다. 왜 이렇게 연락이 없냐고 물으면 아이는 항상 같은 말이었다. 바빴다고. 무얼 하느라 그렇게 바쁜지 말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밥 잘 챙겨 먹고 건강 잘 챙기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어느 날부터 아이와 전화를 끊을 때에는 눈가가 습해졌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아직 밤 아홉 시도 되지 않았는데 잠이 들어 있었다. 뉴욕에 사는 월향 언니였다. 서울로 출장 오는 딸과 함께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딸은 서울에 머물고 언니와 연화는 곧장 제주에 온다고 했다. 머리카락이 까맣고 이마에 주름 하나 없었을 때 헤어진 월향 언니가 수십 년이 지난 뒤 나를 만나러 제주에 온다고 한 것이다. 마음은 날아갈 듯 기쁜데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월향 언니와 연화가 올 때까지는 보름이나 남았다. 그토록 빨리 가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일분이 한 시간 같았고 하루가 열흘 같았다. 얼마 전부터 몸이 급격히 무거워졌고 종종 까무러치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마룻바닥이기도 했고 부엌이기도 했다.
도통 입맛이 없었지만 앞 짚 아낙이 만들어준 자리돔 젓갈에 누룽지를 하루 한 번이라도 먹으려 애썼다. 어릴 때 단이 이모가 종종 해주던 누룽지가 지금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음식이다. 자리돔 젓갈은 제주에 와서 처음 먹어본 음식인데 제법 입에 맞았다. 앞 짚 아이를 종종 돌봐준 덕인지 원래 심성이 고와서인지 아이 엄마는 젓갈 단지를 수시로 확인하고 떨어질라치면 채워놓는다.
월향 언니의 전화 뒤 더딘 시간을 참고 참아 열흘쯤 지난 어느 날 눈을 뜨니 앞집 아낙이 곁에서 물수건으로 나의 얼굴을 닦고 있었다. 날짜를 물어보니 내가 정신을 잃고 누워있은지는 사흘이나 됐다. 사흘 전 저녁에 말동무나 하려 들렀는데 와 보니 정신을 잃고 있었고 의원도 다녀갔다고 했다. 부종이 가라앉으면 의식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말에 아이와 아낙이 번갈아가며 밤낮으로 지켰다고 했다.
앞집 아낙이 정신을 잃었다고 한 시간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에서 단이 이모가 나타났다. 이모는 옛날 그대로였다. 엄하지만 얼굴에선 광채가 빛났고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향기가 주위를 감쌌다. 나는 월향 언니와 연화와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 마당에 있던 장독대를 깨트려 벌을 받고 있었다. 한차례 꾸지람을 마친 이모가 나가자마자 우리는 서로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함께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다. 환하게 웃는데 잠이 깼다.
문득 삼일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낙에게 부탁해 서울에 있는 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음은 들렸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아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낙은 내 입에 미음을 넣어주었지만 나는 음식을 넘길 힘이 없었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아낙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월향 언니와 연화가 머리를 땋고 한복을 입은 채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도 언니와 친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 사이는 가까워지는데 월향 언니와 연화의 모습은 희미해졌다. 언니와 친구를 부르는 내 목소리도 나를 부르는 언니와 친구의 목소리도 조금씩 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