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다시 일어나는 아이들
작년 2월 9일은 평창올림픽 개막식이 있었던 날입니다. 그때 아들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린이집에서 평창올림픽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는지 "우리는 올림픽을 어디서 봐?"라고 몇 번 묻기도 했습니다. 올림픽을 현장에서 보면 좋겠지만 그럴 여건이 안 돼서 우리는 TV로 올림픽을 보기로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평창올림픽 전까지 1년 이상 TV 없이 살았습니다. TV 없이 사는 것도 좋았지만 4년에 한 번씩 하는 올림픽의 재미와 감동을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이다 보니 아이들도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니까요. 올림픽 개막에 맞춰 TV를 사고 치킨을 주문해서 아이들과 치킨을 먹으며 개막식을 봤습니다.
세상 모든 둘째처럼 우리 집 둘째인 아들도 유난히 재롱도 많이 떨고 애교도 많습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내와 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동시에 놀랍고 기쁜 발견을 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여보, 아들이 눈을 깜빡하지 않아."
그날의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들이 더없이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신에게도 감사를 표했습니다. 종교가 없으니 오히려 감사해야 할 신들이 많았습니다.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마리아님 정말 감사합니다."
반년 이상 우리 부부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아들의 눈 깜빡임 증세가 사라진 순간입니다. 당연히 그날의 치킨과 맥주는 그 어느 때보다 맛있었고 평창올림픽 개막식은 지금까지 봤던 어떤 개막식보다 아름다웠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평창올림픽 개막식 때 자원봉사자들이 보여준 무한 댄스는 정말 멋졌습니다. 저도 그날 기쁜 마음으로 덩실덩실 대며 무한 댄스를 따라 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흐뭇해지는 장면입니다.
평창올림픽 개막식은 성화 봉송 마지막 주자 김연아 선수, 오륜기 드론 쇼, 자원봉사 무한 댄스, 입장식 통가 근육맨 등 숱한 화제를 남겼습니다. 그 멋졌던 기억도 세월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하나씩 잊히겠지요. 하지만 우리 부부는 아들의 눈 깜빡임이 없어진 날로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물론 평창올림픽 개막식의 멋진 명장면도 함께 말이지요.
아들은 일곱 살 가을쯤부터 눈을 제법 깜빡이기 시작했습니다. 신경 쓰였지만 아들이 아프거나 불편하다고 하지 않아 우리 부부도 그러려니 하고 한두 달을 그냥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눈 깜빡임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알레르기성 결막염이라고 했습니다. 아이를 키워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알레르기성’이란 처방이 정말 골치 아픕니다. 원인이 정확하지 않으니까요. 마음이 무거웠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어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이의 눈에 넣었습니다. 약은 약이었습니다. 안약을 사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눈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병원에서는 안약을 꾸준히 넣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아내와 저의 마음은 괜찮지 않았습니다.
'약이 몸에 뭐가 좋겠어?'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래서 아이가 괜찮아지면 약을 넣지 않고 아이가 다시 눈을 깜빡이면 병원에 가서 다시 약을 처방받아 눈에 넣기를 반복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부의 소극적인 대처에 아이가 좀 더 오래 고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눈을 깜빡하는 아이에게 익숙해져 갔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말이죠. 그렇게 다시 몇 달이 지나 연말이 됐습니다. 매년 연말이면 어린이집에서 재롱잔치를 했습니다. 아들의 재롱잔치가 있던 날 서둘러 퇴근해 재롱잔치 행사장으로 갔습니다. 귀여운 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타났고 우리 아이도 무대로 등장했습니다. 반가운 마음 가득 담아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들도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곧바로 아이들의 춤과 장기자랑이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들은 유난히 눈 깜빡임이 심했습니다. 아이의 눈이 신경 쓰였습니다. 나중에는 아들의 재롱잔치는 안 보이고 깜빡이는 눈만 보일 지경이 됐습니다. 재롱잔치가 끝났어도 아들의 눈 깜빡임은 그치지 않았고 아들의 모습이 더 안쓰럽고 미안했습니다.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아들에게 무심했구나. 이게 뭐냐, 내 아들이야 내 아들.’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제게 늘 어머니 같은 존재였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를 자주 했습니다. 할머니는 제가 잔병치레를 할 때마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나을 때까지 치료해주셨습니다. 병원, 약국, 각종 민간요법까지 동원하셨지요. 한 번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두드러기로 제법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말이지요. 그때 할머니가 탱자를 삶은 물에 목욕을 시켜주셨습니다. 30년이 더 지난 기억이지만 탱자 물에 목욕하던 순간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할머니가 제게 준 사랑이기에 가슴에 박혔나 봅니다. 탱자 물에 목욕을 한 후 저는 나았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제가 병치레를 할 때마다 나을 때까지 무엇인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할머니의 노력에 부응해서 언제나 나았습니다.
할머니 생각을 떠올리고 나서 저도 다짐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이의 눈 깜빡임이 없어질 때까지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겠다.'
대학병원에 예약을 해놓고 한의원을 먼저 갔습니다. 양방과 한방의 치료로 안 된다면 다음에는 직장 선배가 추천해준 신경과에도 가기로 했습니다. 할머니가 했던 것처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로 한 거지요. 한의원은 알레르기성 결막염이 아닌 다른 원인을 제시하고 한약을 처방해주셨습니다. 대학병원은 동네 안과와 같은 처방을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한의원의 처방을 따랐습니다. 대학병원의 처방이 동네 안과와 동일한 처방이었던 영향도 컸습니다. 아이는 한약을 먹고 스무 날 때쯤 됐을 때 정말 기적같이 눈 깜빡임을 멈췄습니다. 그날이 바로 평창올림픽 개막일이었습니다. 아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사실 그날 들었던 가장 큰 감정은 기쁨이었습니다.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저는 무한 댄스 춤을 췄지요.
"에헤야 디야."
그날 이후 어떻게 아이가 나았을까 자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감정은 기쁨에서 고마움으로 바뀌었습니다. 한약은 맛이 써서 7세 아이가 먹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그 쓴 약을 아침저녁으로 꿋꿋하게 먹었습니다. 아들은 엄마 아빠의 간절한 마음을 느끼고 이 약을 먹고 꼭 나아야겠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렇게 아들은 오뚝이처럼 일어났습니다. 아이는 앞으로도 가끔 아픈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때마다 또 오뚝이처럼 나아서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하겠지요. 물론 부모인 우리도 아이가 나을 수 있도록 정성과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일은 아플 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동네에서 열린 5Km 마라톤 대회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아들은 평소 달리기도 좋아하고 태권도를 꾸준히 하여 체력도 좋습니다. 그래서 큰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회 신청을 했었지요. 모든 초보 마라토너들이 페이스 조절 실패로 애를 먹듯이 아들도 출발부터 빨리 뛰는 바람에 반환점까지 가는 동안 제법 힘들어했습니다. 처음이니까 당연한 상황이었습니다. 천천히 뛰라 했지만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더군요. 다른 때처럼 일단 스스로의 경험으로 배우도록 더 이상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반환점까지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며 아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반환점까지 갔을 때 아들은 체력을 회복했고 돌아오는 구간에는 다시 열심히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암초를 만났습니다. 골인 지점으로 돌아오는 중간에 아들이 발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신발과 양말을 벗겼더니 발가락에 물집이 잡혀있었습니다. 3.5.km 지점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참고 뛴 아들이 기특했고 이제 설렁설렁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아들이 한마디 했습니다.
"아빠, 나 신발 벗고 뛸래."
저와 아내는 깜짝 놀랐습니다.
"괜찮아?"
"신발 벗으니까 괜찮네, 끝까지 해야지."
아들은 양말만 신고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그렇게 맨발로 뛰어오는 아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주고 손뼉 쳐준 것은 물론입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고 아이는 본인을 믿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먼저 "이제 그만 뛰자, 물집이 생겨서 더 못 뛰어."라고 이야기했다면 아들은 거기서 멈췄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늘 넘어졌다가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습니다. 사소한 잔병치레부터 몇 날 며칠씩 앓으며 누워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아플 때는 마음 졸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훌 털고 일어났을 때는 또 그만큼 기쁘고 아이들이 고마웠습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몸도 자라고 마음도 자랐습니다.
아들은 태어난 지 100일에 맞춰 모세 기관지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우는 것뿐인 아이였습니다. 간호사가 혈관을 찾지 못해 수차례 바늘 찌르기를 했을 때 우리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이도 백일밖에 안됐지만 우리도 백일밖에 안 된 부모였습니다.
딸은 여덟 살 때 가평 쁘띠 프랑스에서 계단에 넘어져 이빨이 입술을 뚫을 만큼 크게 다쳤습니다. 입술이 피범벅이 되고 입술은 짓이겨져 너덜너덜해졌지요. 딸이 다친 그날은 군군 병원, 대학병원 두 곳, 그렇게 병원만 세 군데를 갔습니다. 부모의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때가 정말 그랬습니다. 아이도 많이 울고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니 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웃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겠지요. 백일부터 넘어졌다 일어섰다 반복하며 오뚝이처럼 자란 아이들이 초등학교 6학년, 초등학교 2학년이 됩니다. 씩씩하게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말합니다.
‘아빠는 너희들이 지금까지 보여줬던 것처럼 앞으로도 멋진 오뚝이가 되리라 믿는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