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속에서 클래식을 선물한 아이
지난여름 지인들과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을 듣게 됐습니다. 캐논 변주곡은 영화 <클래식>과 <엽기적인 그녀>의 OST로 나오기도 했을 만큼 대중적인 클래식입니다. 제목만 들었을 때는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이 어떤 음악인지 고개를 갸우뚱하실 테지만 실제로 들어보면 누구나 "아, 이 음악이 그거구나"라고 말하실 겁니다. 저도 지인이 처음 <파헬벨의 캐논>을 듣자고 했을 때 어떤 음악이었는지 몰랐습니다. 대신 클래식도 제법 좋아하는 음악 장르이기 때문에 어떤 음악일지 궁금해하며 음악을 들었습니다. 음악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 이 음악이 캐논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지인들과 즐겁게 들었습니다. 들을 때마다 괜찮은 노래지만 꽤 오랜만에 만난 <캐논 변주곡>이 참 좋았습니다. 마침 여행을 다녀온 바로 직후 아들과 어린이 뮤지컬 공연에 가게 됐습니다. 뮤지컬을 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을 틀었습니다. 옆에 앉아있던 아들이 그 노래를 듣더니 무심하게 말하더군요.
"이거 캐논인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도 그 음악의 제목이 캐논이라는 것을 그날 알았는데 고작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음악의 제목을 말하니 놀랄 수밖에요. 저보다 30년 이상 빨리 클래식을 아는 아들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저는 저 나이에 음악은 학교에서 배운 동요 몇 개와 TV에서 나오는 대중가요가 전부인 줄 아는 아이였으니까요. 어쨌거나 그날 <캐논>을 아는 아들이 신기했고 저와는 다른 아들의 모습을 보인 아들이 흐뭇했습니다.
처음 클래식에 관심을 가졌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클래식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아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였습니다. 많은 부모들은 임신을 하면 태교에 관심을 가집니다. 아이에게 좋다는 것을 찾아서 하나하나 실천하기도 하고요. 즐거운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태교여행도 많이 합니다. 우리도 다른 예비 부모와 같았습니다. 첫째를 가졌을 때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 행복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의 태명을 ‘행복’으로 짓고 태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거창하게 특별한 무엇인가를 한 것은 아닙니다. 좋은 것을 보고 듣고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것이 태교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때 클래식을 만나게 됐습니다.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이 아이에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누구나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클래식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대부분은 어렵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음악 어플과 유튜브가 없었을 때는 접하기 어려운 장르이기도 했고요. 아마 학교 다닐 때 클래식을 재미없게 배운 것도 한몫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그랬습니다. 저는 음악을 좋아했지만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내는 대학교 때 통기타 동아리 활동을 할 만큼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노래도 잘하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를 임신하기 전에 클래식을 듣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를 가지기 전에는 가요만 편식했던 부부였지요.
클래식은 학교 음악시간 외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 장르였습니다. 간혹 TV에서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하면 도대체 왜 이렇게 재미없는 방송을 하는지 어이없어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태교를 한다며 클래식에 관심을 갖고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음반매장을 찾았습니다. 그때 클래식 코너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다 앙드레 류의 DVD를 발견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앙드레 류 DVD는 정말 운명 같은 만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부터 우리가 흔히 아는 클래식을 CD로 들었다면 지금처럼 클래식을 좋아했을 리도 없고 꾸준히 듣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태교는 해야 했으니 임신기간 고작 몇 번 듣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를 CD로 들었더라도 지금처럼 클래식을 즐기는 사람이 됐을지는 의문입니다. 그의 음악은 단순히 음악이 아니고 거대한 쇼였으니까요. 그래서 그의 음악은 영상으로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 DVD를 산 건 우연치고는 너무나 탁월한 운명 같은 선택이었습니다.
앙드레 류는 네덜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오케스트라 지휘자입니다. 5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벨기에 브뤼셀 왕립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뛰어난 음악가입니다. 1987년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를 설립하여 지금은 전 세계에서 연간 100회 이상 공연을 하고 있는 열정적인 음악가이기도 하지요.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는 2004년 방한하여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2만여 명이 참석했을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높습니다. 그래서 클래식을 조금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몰랐지만요.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는 클래식만 고집하지 않습니다. 클래식은 물론 가곡, 행진곡, 팝을 넘나 듭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어렵지 않았고 들을수록 좋아지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 음악을 뱃속 태아를 위한 테마곡으로 정해 꾸준히 들었습니다. 금요일 밤이나 주말에는 어김없이 침대에 누워 편안한 기분으로 DVD를 봤습니다. 우리가 산 앙드레 류 DVD는 오케스트라 공연을 엮어 놓은 것이었는데 흔히 보는 고정된 공간에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연주자들이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형 공원이나 운동장에서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펼치는 한 편의 축제였습니다.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가 <봄의 소리>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을 연주할 때는 관객들이 흥겹게 왈츠를 추기도 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DVD를 보며 같이 춤을 추기도 했지요. 참 좋았던 기억입니다. 10년이 더 흐른 지금은 그 DVD가 없지만 유튜브로 그 영상을 보며 옛날 태교 하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태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좋은 클래식을 영영 모르고 살아갈 뻔했습니다. 그래서 태교를 위해 우리가 했던 좋은 생각과 행동은 우리가 아이에게 준 선물이 아니라 아이가 뱃속에서부터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몇 년 전 딸이 바이올린을 시작했을 때쯤 앙드레 류 음악을 들려주며 이야기했습니다.
"서영아,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이 노래를 DVD로 들었단다."
딸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들었던 그 클래식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요?
딸이 7살쯤 됐을 때 피아노는 칠 줄 아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피아노 학원에 보냈습니다. 그렇게 음악에 입문한 딸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방과 후 수업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4학년 때는 자선공연이었지만 오케스트라 공연단 바이올린 연주자로 엄마 아빠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오케스트라 공연을 준비한다고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연습하러 나가는 딸이 신기하고 대견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 뒤 크리스마스쯤 우리는 딸아이의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성인과 함께 구성된 오케스트라단이라 공연 중에는 아이가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부모인 우리는 즐겁고 기뻤습니다. 카메라 줌으로 딸의 사진도 찍고 마치 오케스트라 공연의 바이올린은 우리 딸의 독주처럼 느껴지기도 했지요.
뱃속에 있는 딸아이로 인해 클래식에 입문했고 10년이 지난 뒤 딸아이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게 됐으니 그날의 기쁨과 감격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클래식이 뭔가 있어 보여서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태교가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장르입니다. 그리고 그럴 운명이었는지 마침 선택한 공연이 앙드레 류의 공연 DVD이었고요. 우리 부부와 결이 맞는 공연이었던 것이지요. 클래식을 처음 시작하시는 분이나 태교를 염두에 분들이 계시면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를 적극 추천합니다. 누구나 그의 매력에 빠질 것입니다. 태교로 앙드레 류를 만난 이후로는 클래식이 꾸준히 듣는 음악 장르가 됐습니다. 출퇴근 시간에 책을 읽으면서 듣거나 저녁이나 주말에 여유롭게 듣기 딱 좋은 음악이니까요.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음악이 흐르고 음식 냄새가 나는 집이 참 좋다.’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며 굉장히 공감했습니다. 음악소리가 들리고 음식 냄새나는 집이 진짜 가족이 사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그 글을 보고 나서 집에서 음악을 좀 더 자주 듣습니다. 가끔은 클래식도 듣고요.
운동에도 수영, 축구, 야구, 탁구, 등산 등 다양한 종목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운동이 많을수록, 즐겨 보는 운동이 많을수록 삶이 즐겁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대중가요도 듣고 재즈도 듣고 클래식도 들으면 삶이 더 즐겁습니다. 몇 년 전 우연히 판소리 공연을 눈앞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TV에서 볼 때는 ‘세상 이런 따분한 음악이 어디 있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2~3미터 앞에서 직접 판소리를 보니 완전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경험으로 판소리 공연 관람을 메인 테마로 전주 한옥마을 1박 2일 여행을 기획한 적이 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어느 숙소에서 판소리 상설공연을 했었는데 그때 고향 친구 가족모임을 그 숙소에서 했고 저녁에 은은한 달빛 아래서 판소리 공연을 봤습니다. 다들 저처럼 판소리 문외한이던 친구들이었지만 반응은 최고였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명장면입니다.
음악만큼 사람을 위로하기도 하고 즐겁게도 하는 것이 있을까요? KBS 프로그램에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을 많이 보실 텐데요. 한 번은 회사 선배가 이 프로그램만큼 세대 간 소통이 되는 프로그램이 없다고 하더군요. 예전 부모세대가 좋아하던 노래를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부르니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기에 이만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들어보니 공감이 됐습니다. 음악이 부모와 자녀 간 소통의 다리 역할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춰 온 가족이 TV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좋은 음악을 아이들과 함께 즐기는 다른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 가족은 자동차 안에서 함께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동차로 이동 중일 때 돌아가면서 신청곡을 듣습니다. 이렇게 하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아이들이 어떤 가수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신청 차례가 됐을 때는 아이들에게 음악의 장르를 넓혀줄 수도 있고요. 이때 저는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를 신청곡으로 정하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좋은 음악도 있지만 귀에 익어야 좋은 음악도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클래식은 귀에 익을수록 좋은 음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의 포도주라고나 할까요? 곧 명정을 맞아 고향으로 떠납니다. 보통 자동차에서 5시간 이상 보냅니다. 자동차 안에서 아이들과 돌아가면서 신청곡을 들으며 보낼 생각을 하니 5시간이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음악의 포도주인 클래식도 들어야겠지요. 앙드레 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도 당연히 들어야겠지요. 아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클래식도 모르고 살 뻔했습니다. 그래서 태아일 때 클래식을 선물한 우리 딸이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