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마라톤 대회와 달리기 친구

달리기가 놀이가 되는 순간

by 막시

달리기 좀 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몇 달 전까지 부상에서 허덕인 데다 춘천마라톤이 몇 달 남지도 않았으니 허풍쟁이라고 생각했다. 달리기 경력이 짧은 사람은 무조건 좋은 기록을 내기 힘들다는 편견이 한가득 느껴졌다. 누구나 열심히 하면 330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첫 풀코스에서 다리를 끌던 안타까운 추억은 수시로 되살아났다. 무릎 부상이 재발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피할 수 없었다. 내게 330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어떻게 해야 330을 달성할 수 있을까?

중랑천에서 달리기를 하다 똑같은 클럽의 옷을 입고 무리 지어 달리는 사람을 발견했다. 달리기 클럽에 가입하면 330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러닝 클럽에는 숨은 실력자들이 많고 체계적인 훈련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줄기 빛이 내리는 느낌이었다.

춘천마라톤을 100일쯤 앞두고 동네 근처에서 정기 달리기를 하는 클럽에 가입했다. 집에서 가까워야 자주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리기를 좋아해서 나갔지만 어색했다. 그때 나는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제법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었다. 한쪽 모퉁이에서 달릴 때까지 기다렸다. 누군가의 구령에 맞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외침에 출발했다. 내가 클럽에 가입한 이유는 달리기 실력 향상이었지만, 유쾌하게 웃으며 함께 달리는 러너들을 보니 그들 속에 섞이고 싶은 마음이 싹텄다.

달리기를 끝내고 어색하게 서 있는데 어느 여성 회원이 다가왔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달리기를 한다고?

달리기는 남자들과 남자처럼 생긴 여자들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정다감한 말투로 클럽에 대해 알려주며 달리기 하는 여자들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지웠다. 친절하기만 해도 좋은데 예쁘기까지 했으니 클럽 가입을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후 누군가가 나를 도와준다는 느낌은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해피러닝은 매주 네 번 정기모임을 했는데 세 번은 일반적인 10km 달리기였고 한 번은 풀코스 마라톤 대회를 위한 훈련을 했다. 훈련은 언덕 달리기와 장거리 달리기, 인터벌 달리기와 실전 달리기 등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마라톤 훈련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내게 신세계를 선사했다.

정모 공지는 일찌감치 온라인 카페에 올라왔다. 춘천마라톤을 위해 당장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공지를 보면 도저히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서 달리면 춘천마라톤에서 330을 하며 웃는 모습이, 나가지 않으면 지난 대회 때처럼 꼬꾸라지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해피러닝 클럽에서 굉장한 사람을 만나며 연일 감탄했다. 42.195km를 3시간 이내에 달리는 건 놀랄 일이 아니었다. 나이 60이 되어서도 복근이 있는 형, 몸무게 100kg으로 한 달에 두 번씩 100km 마라톤을 달리는 형, 나이 50이 넘어 100km를 달리는 누나, 풀코스를 4시간 이내에 뛰는 손녀를 둔 할머니, 이런 형들과 누나를 볼 때마다 뇌는 몸을 가만두지 않았다. "너는 이렇게 가만있으면 안 돼. 뭐라도 해. 네가 제일 어려."

달리기 고수들의 조언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평일에는 10km, 주말에는 20km나 30km를 달리며 330 달성을 위한 노력을 아낌없이 이어갔다. 춘천마라톤을 앞두고 달리기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지난 대회가 남긴 부상에 대한 트라우마는 여전했다. 다행히 많은 선배 러너가 용기를 주었다. “걱정하지 마. 계획된 훈련만 빠짐없이 소화하면 충분히 330 할 수 있어. 너를 믿어. 꼭 할 수 있을 거야."

그들의 믿음과 응원은 엄청난 힘이 됐다.


춘천마라톤 대회 당일 클럽의 고수 선배들은 나에게 하나만 강조했다. “모든 훈련을 빠짐없이 마무리했으니 충분히 330을 할 수 있다. 대신 절대로 오버페이스를 하지 마라. 더 잘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더라도 30km까지는 원래 계획했던 페이스로 달리고 정말 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면 35km 이후에 좀 더 속도를 높여라. 마라톤 이번 한 번만 할 거 아니니까 꼭 명심해라."

주위의 우려와 달리 나는 330 이상 더 잘 달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첫 실패의 교훈과 고수 선배의 조언을 철석같이 믿고 로봇처럼 달렸다. 30km를 넘기며 여지없이 벽은 찾아왔다. 나와의 싸움이 시작됐고 40km가 가까워지면서는 다리에 경련이 올라왔다. 쥐가 나를 이기면 또 실패다. 속도를 늦추며 쥐가 더 이상 전진하지 않도록 달랬다. 적당한 운과 노력으로 쥐와의 싸움에서 내가 이겼다.

3시간 28분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뭉클했다. 지난여름 내내 땀 흘렸던 모습이 떠올랐다. 모든 영역에서 그렇진 않지만, 최소한 달리기만큼은 노력한 만큼 결과로 이어졌다.


기쁨과 성취감을 안겨준 춘천마라톤은 또 다른 문제를 남겼다. 목표 기록을 달성했더니 열정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달리기는 야구와 달리 그다지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일단 나가서 달리면 기분이 좋았지만, 막상 나가기 전까지는 의지의 몫이었고 머리가 다리를 끌고 가야 했다. 누군가 문밖을 나가기가 제일 힘들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달리기를 멈췄더니 다시 살이 슬금슬금 올랐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평일 정모는 바쁘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았고 토요일 훈련은 다음 대회 때까지 중단됐다. 대신 일요일 정모는 꾸준히 나갔다. 기록을 목표로 하는 달리기가 아니었으니 회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달리게 됐다. 어느 날 지인들과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며 10km를 달렸더니 1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리기에서 재미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함께 달리면 재미있구나!

안타깝게도 함께 달릴 친구가 없었다. 러닝 클럽 회원들과 친해졌지만 달릴 때마다 재미있게 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친한 사람 중에는 왜 이렇게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까?

두 사람의 얼굴이 스쳤다.


"참 까칠하네" 직장 선배의 사무실에서 나오며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점잖은 욕을 속으로만 했다.

그의 사무실에 찾아간 이유는 달리기 클럽 가입을 권하기 위해서였다. 달리는 의사를 소개해준 호의에 대한 보답 차원이기도 했다. 얼마 전 중랑천에서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달리다 혼자서 달리는 그를 보았다. 그는 <나 힘들어> 딱지를 얼굴에 붙이고 힘 빠진 다리를 밀대 삼아 바닥 청소를 하고 있었다. 연민을 느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며 며칠 동안 고민한 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그는 나의 호의를 단칼에 잘랐다. "글쎄, 난 별로 관심 없어. 너는 열심히 하던지…."

그는 10년간 ‘보스턴’을 외치던 마라토너였다. 보스턴 마라톤은 올림픽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기록으로 참가 제한을 두는데, 그는 참가 기록을 달성하지 못했다.

내가 클럽 가입을 권한 지 보름쯤 지났을 때 그가 정기모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가 없었다. "이럴 거면 내가 말했을 때 가입하던지..."

시간은 모든 섭섭함을 날렸다. 우리는 함께 달리는 시간을 쌓아가며 거친 호흡과 굵은 땀방울을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별로 친하지 않을 때 보였던 까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섬세하고 친절한, 세상에서 가장 살가운 사람이 됐다. 달리면서 농담하며 웃고, 달리기를 주제로 대화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때론 가볍게 때론 격하게 서로를 격려하며 선의의 경쟁자가 될 씨앗을 뿌렸다. 달리기 친구가 된 그는 홍시기다.

동네 형을 처음 만난 건 갓 태어난 아들 덕분이다.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친해진 엄마 넷이 의기투합해 동네 엄마 모임을 만들었다. 얼마 뒤 아빠들도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나보다 두어 살 많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형님, 안녕하세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앞으로 계속 볼지 안 볼지도 모르는데 굳이 내 나이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나를 실제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으로 본 그에게 소심한 복수를 했다.

시간은 그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줬고 우리는 조금씩 남다른 관계가 됐다. 제법 친해졌을 무렵 그에게 해피러닝 가입을 권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웃기만 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여자는 프러포즈하는 남자에게 승낙 대신 웃음을 주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웃음만 날리는 여자와 그가 무엇이 다른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억지로 달리기를 권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분기에 한 번 정도 달리기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몇 차례 권하기가 더 반복된 어느 날 그가 정기모임에 나왔다. 그는 나와 달리 첫 만남에서도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달리기 실력 향상을 위해 클럽에 가입한 나와 달리 그는 사람이 좋아 달리기에 빠져들었다. 달리기 친구가 된 그는 올레다.


우리 셋은 죽이 잘 맞았고 주말에는 수시로 함께 달렸다. 달리기가 친구를 만나는 순간 달리기는 더 이상 의지로 하는 운동이 아닌 재미있는 놀이가 됐다. 주말에 시간이 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께 달리자는 연락을 했다. 달리기 친구는 멈추려던 달리기를 완전히 일으켜 세웠다.

시간이 흐르며 클럽 러너들과도 친해졌고 한 사람 두 사람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어느 날 누군가 여섯 명이 한 팀이 되어 42.195km를 달리는 릴레이 구간 마라톤 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운동회의 꽃은 400m 계주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 대회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클럽에 달리기 친구가 꽤 생겼을 때라 어렵지 않게 팀을 꾸릴 수 있었다.

여섯 명이 모여 우리만의 목표 기록을 정하고 주말마다 함께 달렸다. 훈련이 아닌 재미로 하는 달리기로 친해졌고 열심히 달릴 수 있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은 진리였다. 멈출 수도 있었던 나는 친구를 만난 덕분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달리기 배터리를 장착하게 됐다.

구간 마라톤 대회를 기분 좋게 끝내고 포토존으로 이동했다. 중년의 남성과 함께 있던 미모의 어린 여성 러너가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의혹에 가득 찬 내 눈길을 느꼈는지 그녀는 옆에 있는 남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가만히 있지 말고 좀 웃어봐.”

의심의 눈초리를 벗은 나는 부러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해 사진을 찍고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나중에 딸과 함께 달리는 유쾌한 상상을 했다.


달리기 친구 홍시기는 2년 뒤 보스턴 마라톤 기록을 달성했다. 대회가 끝나고 말했다. ”올림픽 주경기장에 들어서는데 눈물이 나고 입에서는 '에잇 18'이라는 욕이 튀어나왔어. 아직까지 이유를 모르겠네."

나는 알 것 같았다. 10여 년간 이어진 실패의 회한이 고스란히 떠올랐을 것이다. 입으로는 욕이 나왔지만 감격했을 것이다. 골인 지점에 통과한 그는 그를 도와준 100km를 100회나 뛴 전설적인 러너에게 큰절을 했다.

나도 그 대회에 참가했다. 그가 결승선에서 오두방정을 떨고 있을 때 나는 1초라도 더 빨리 결승선에 들어오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내 소개로 클럽에 왔을 때는 내가 달리기를 더 잘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가뿐히 넘어선 것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 괜히 데리고 왔나?

홍시기는 다음 해 보스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보스턴에 다녀온 뒤에는 끊임없는 자랑을 침 튀기며 쏟아냈다. “응원 나온 웨슬리 여대생들이 그렇게 예쁠 줄 몰랐다. 하하하”

무관심한 척했지만 부러웠다.

우리는 여전히 마라톤 기록을 위한 선의의 경쟁을 한다. 이것이 달리기를 멈추지 않고 지속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선의의 경쟁은 이기겠다는 마음이 아닌 서로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그래야 승부가 나도 상처 받지 않는다. 훗날 알게 된 달리기가 알려준 삶의 지혜다.

곁에 선의의 경쟁자가 있다는 건 러너에게 너무나 큰 행운이다. 조만간 그의 서브 3를 위한 한판 대결이 펼쳐질 것이다. 우리의 경쟁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나도 궁금하다.

동네 형에서 달리기 친구가 된 올레는 요즘 PD 생활을 청산하고 달리기 유튜브 채널 <마라닉TV>를 개설했다. 미래의 백만 유튜버로 예전부터 꿈꾸던 본인만의 진짜 영상을 만들고 있다. 덕분에 나도 가끔 유튜브에 등장한다. 그가 백만 유튜버가 되어야 나도 유명인이 될 테니 하루빨리 백만 유튜버가 되길 바란다.

달리기 친구는 달리기에 재미를 더해 운동을 놀이로 완전히 바꾸었다. 운동은 중간에 그만둘 수 있지만, 놀이는 살아있는 한 멈출 수 없다.

친구가 그냥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 먼저 다가갔을 때 우정은 시작되고 좋아하는 것을 함께 했을 때 우정은 굳건해진다. 누군가 먼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면 친구는 나타나지 않고 우정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 할 때 완전해진다는 것을 친구를 통해 알게 됐다. 무엇이든 어디서 어떻게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함께 달릴 친구가 있다면 누구라도 더 멀리 그리고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이제 나는 달리기에 완전히 빠졌다. 멈추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날이 좋으면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으면 날이 좋지 않아서 술 생각이 난다고 한다. 달리기에 대한 내 마음이 딱 그렇다. 날이 좋은 날은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은 날은 좋지 않아서, 우중충한 기분을 날리려고 달린다.

우리는 남들과 다를 것 같지만 정말 다르지 않다. 남이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달리기는 확실히 그렇다.

이제 여러분이 달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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