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에 권태기가 찾아왔다.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던 연인도 막지 못하는 권태기를 내가 무슨 수로 필할 것인가? 더군다나 달리기는 사랑처럼 뜨겁지도 않다. 영원하기엔 한계가 분명한 달리기의 단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달리기와 다른 운동의 기원을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운동은 인간이 즐기기 위해 만든 놀이로 출발했다면 달리기는 잡거나 잡히지 않기 위한 생존으로 시작했다. 누구나 건강해졌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달리기 횟수가 줄어드는 건 당연한 순서다. 달리기를 하면 세로토닌과 도파민 같은 천연 마약이 생성돼 기분이 좋아지지만, 조금이라도 핑계가 생기면 달리기를 하지 않는다.
쌀알처럼 많은 달리기의 장점도 권태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권태기가 찾아올 환경은 하나씩 갖춰졌다. 나는 건강해졌고 달리기는 일상이 됐다. 대회조차 특별하지 않았으며 달리기 친구들도 한결같은 열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달리며 만나는 공간도 시들해졌다. 2년여 동안 매주 네다섯 번씩 밥 먹듯 달렸더니 어느 순간 생활 반경에서 달리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웠던 까닭이다. 달리기가 설레지도 재미있지도 않았다.
그러던 주말 어느 날 친구들과 중랑천에서 달리고 있었다. 직장 선배가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해 이야기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달리기를 좋아해. 알고 있니? 달리기에 관한 책도 썼는데, 제목이 뭐더라……."
세계적인 작가가 러너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루키의 책 제목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며칠 뒤 그 책을 단번에 읽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 달에 300km를 뛰어본 적이 없는데 하루키는 수시로 그렇게 달렸다. 그는 예상을 뛰어넘는 대단한 러너였다.
하루키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상실의 시대」라는 책을 우연히 보게 된 중학생 때다. 그 이후 그는 잊을만하면 새 책을 내고 또 잊을만하면 노벨상 후보로 각종 신문과 방송에 등장했다. 중 고등학생 시절 형들과 누나들이 읽던 책을 한 번씩 훑어보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휘리릭 넘기다 눈에 띄는 단어가 나오면 그쪽을 집중해서 읽고, 그러다 마음이 동할 때는 완독 하기도 했다. 내 눈을 사로잡은 단어들은 대체로 '그녀', '그', '뜨거워졌다' 같은 가슴 뛰는 단어였다. 대체로 일본 작가들이 쓴 책에서 그런 단어들이 많이 나왔는데, 너무 빨리 휘리릭 넘겼는지 「상실의 시대」를 볼 때는 한 번도 두근거리지 않았다. 훗날 알게 됐지만 조금이라도 천천히 넘겼다면 반드시 가슴 뛰는 장면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루키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그의 책을 읽는 순간 러너에 대한 무한 신뢰가 하루키에게 향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멋지고 예쁜 남녀 배우가 달리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도 그곳에서 달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들처럼 달리면 나도 영화배우처럼 멋질 것 같았다. 희한하게도 그런 바람은 TV나 영화를 볼 때만 유효했고 TV 전원을 끄거나 영화관을 나올 때면 예정된 것처럼 신기루가 됐다.
하루키의 책은 영화나 드라마와 달랐다. 그의 이야기는 앞으로 내가 달려야 할 미래의 달리기가 됐다. 그는 책에서 도쿄, 아테네, 하와이, 뉴욕에서 달린 이야기를 했다. 그가 달린 모든 곳은 내가 한 번은 가고 싶었던 여행지, 언젠가는 한 번은 달려야 할 코스가 됐다. 그렇다고 당장 하루키처럼 도쿄에서, 뉴욕에서, 아테네에서 달릴 수는 없었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적당한 돈과 시간이 있어야 하고 돈과 시간을 넘어설 딱 그만큼의 용기도 필요하다.
해외여행에 갔을 때만 달릴 것이 아니라 국내 여행에서 먼저 달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꿈만 꾸다 할아버지가 되기 싫었고, 어디든 설레는 여행지라면 해외든 국내든 그리 큰 차이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얼마 뒤 영덕으로 여행을 떠났다.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바다에 대한 로망이 크다. 바닷가 달리기를 계획했다. 사촌 형이 블루로드에 대해 알려주었다. 블루로드는 부산에서 강원 고성에 이르는 해파랑길의 일부로 영덕 대게 공원을 시작으로 고래불 해수욕장에 이르는 60km가 넘는 해안 길이다.
펜션이 해변에 있어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다가 보였다. 여행 가서 처음 달리기를 하는 역사적인 날, 동해 앞에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는데 뭐가 그리 설레던지…. 8월 중순이었지만 시원한 바닷바람에 더위를 느낄 수 없었고 바다를 보면 늘 그렇듯 마냥 기분이 좋았다. 내가 선 곳은 블루로드 A~D 코스 중 B 코스 어느 지점이었다. B 코스는 블루로드 중에서도 바다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라 '환상의 바닷길'이라고도 불린다. 확 트인 바다 앞에 서니 우쭐해졌다. 상기된 마음으로 천천히 걷다가 바다와 풍경에 익숙해졌을 무렵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 뛰는 소리에 '흔들다리 효과'가 떠올랐다. 1974년 컬럼비아대학교의 아서 아론과 도널드 더튼 박사가 안정된 다리와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만난 이성에 관한 비교 연구를 했다. 흔들리는 다리에서 만난 이성에게 더 끌린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은 흔들리는 다리 위에 있을 때 심장이 뛰고 뇌는 이것을 상대가 좋아서 설레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 실험 결과의 요지다.
재미있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앳된 청년이 버스를 타고 소개팅에 가고 있다. 마침 시내에 집회가 있는지 도통 버스가 움직이지 않는다. '큰일 났네. 이러다 늦겠는데, 어쩌지….'
급히 내려 지하철로 갈아탄다. 지하철에서 내려 전속력으로 뛴다. 약속 시각보다 3분 늦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그녀가 물 잔을 건네며 말한다. "뛰어오신 것 같아요. 차가 막히죠? 물 한 잔 드세요."
심장은 쿵쾅쿵쾅 통제할 수 없다. 그녀의 친절한 태도와 매력적인 외모에 첫눈에 반한다. 그녀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묻는다. “요즘 이 영화 좋다던데, 혹시 봤나요?"
"아니요. 아직..."
그녀의 말에 날아갈 듯이 기뻤다.
사실은 그녀도 조금 전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사고가 있어 조금 뛰기도 했는데 결국 늦었다. 아직 그가 오지 않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물을 마시며 창밖을 보니 뛰어오는 그가 보였다.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달리는 모습이 건강해 보였다. 그가 나타났을 때 이마에 송골송골 맺은 땀방울은 왠지 그를 더 빛나게 했다. 그가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 생각했다. '이 남자, 꽤 적극적이다.'
그녀는 한눈에 반할만한 외모는 아니고 특별히 친절하지도 않았다. 남자가 조금 늦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헐레벌떡 뛰어왔으니 물을 따라 줬을 뿐이다.
둘은 영화를 보고 저녁 식사도 했다. 다음 약속 장소를 정하고 헤어졌다. 만난 횟수는 점점 더해졌고 몇 년 뒤 예식장에 나란히 섰다.
상상은 미소를 남기고 사라졌다.
청춘 남녀가 첫 만남에 호감을 느끼고 결혼한 비밀은 흔들다리 효과에 있다. 둘은 모두 약속 장소에 달려왔고 덩달아 심장이 뛰었다. 남녀의 뇌는 심장이 뛰는 이유를 달리기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호감으로 착각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아내와 첫 키스를 한 곳이 바로 흔들다리 같은 놀이기구가 많은 놀이공원이었다.
달리기로 생기는 '흔들다리 효과'는 여행을 더 사랑하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늘 뛰어놀았다. 주로 누군가를 잡거나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놀이를 했다. 달리기가 일상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전혀 달리지 않았다. 그 생각이 들자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어린 시절 뛰어놀던 추억이 떠올랐다.
블루로드는 러너에게 최고의 코스였다. 달리는 내내 탁 트인 풍경이 눈을 사로잡았다. 뒤로 사라지는 풍경을 잡으려 두 눈동자는 양옆 끝까지 갔고 급기야 뒤로 넘어가려고 아우성쳤다. 푸르게 늘어선 가로수와 나무 뒤에 우뚝 솟은 풍력발전기는 웅장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풍력발전 특유의 소리는 블루로드의 숨소리 같았다. 바다와 연결된 기암괴석을 만난 순간 감탄했다.
언덕과 내리막을 번갈아 만났다. 달리기 대회라면 힘겨운 구간일 테지만,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여행에서 만나는 언덕은 다양하고 설레는 풍경 중 하나였다.
놀이터에선 어린이는 아니지만 한때 누구보다 놀이터를 좋아한 사람으로 놀이터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미끄럼틀과 그네를 타며 땀을 식혔다.
해가 뜰 시간이 됐다. 바다 앞에서 일출을 보고 싶었다. 일출의 순간을 놓칠까 봐 바닷가를 향해 힘차게 달렸다. 일출 명소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심장은 여전히 쿵쾅쿵쾅 뛰었다. 태양이 바다를 뚫고 힘차게 솟았다. 1년에 365번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바다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이다.
벅찼다.
돌아오는 길은 좀 더 빨리 달렸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바다가 나를 불렀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풍덩 뛰어들었다. 어린 시절 냇가에서 뛰어놀던 아이처럼 푸른 바다를 몇 번이고 뛰어내렸다.
첫 여행 달리기는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경쾌했다.
여행은 또 하나의 달릴 이유가 됐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달리기는 가정식이 아닌 외식이 된다. 눈을 거쳐 뇌로 들어간 새로운 풍경은 추억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여행의 횟수만큼 달리기 횟수도 증가한다. 꼭 해외여행이 아니어도 된다. 살면서 한 번도 달려보지 않은 공간과 길이 있는 곳이면 그곳은 어디든 여행지가 된다.
여행을 계획하는 동안 러너는 달릴 곳을 찾는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길은 나에게 말을 건다. 나도 길을 찾고 길도 나를 찾으니 도대체 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달리기 여행자로 산 지 십 년이다. 어느 곳이든 여행하며 달리면 설레고 즐거웠다. 새로운 길을 만난다는 설렘에 여행이 기대됐고 여행 가서 달리려면 평소에도 꾸준히 달려야 했다. 달리기와 여행은 주거니 받거니 서로를 이어주는 훌륭한 한 쌍이 됐다.
여행이 달리기 권태기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건 훗날 알게 됐다. 우리가 누군가와의 관계나 일상에서 권태기를 느낄 때 여행하며 벗어나듯이 달리기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러너로 살 수 있게 한 힘이 꾸준히 여행하며 달린 덕이라 생각한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내가 만나는 사람과 공간이 고마워지고 다시 달릴 힘이 생긴다. 달리기가 새로워지고 도망갔던 설렘도 다시 찾아온다. 여행과 일상의 반복은 달리기는 물론 권태기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가끔은 혼자 달리기 여행을 했지만 대체로 가족이나 친구가 함께 있었다. 혼자보다 함께 달릴 때가 훨씬 좋듯이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보다 완성도가 높다. 여행 가서 달렸더니 여행이 더 풍성해졌다. 남들보다 더 심장 뛰는 여행이 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여행 가서 얼마나 달리는지는 누구와 함께 달리는지와 여행지에서 만나는 길에 따라 결정된다. 보통은 평소처럼 적당한 달리기를 한다. 여행의 기본은 자유니까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달리고 여행한다. 달리기 친구들과 마음먹고 달리기 여행을 떠나면 20km, 30km 정도는 기본이다. 격하게 가슴 뛴다. 가족들과 여행할 때도 달리기를 한다. 건널목에서 파란불이 깜빡이는 것을 보면 아들이나 내가 외친다. "뛰자."
딸이 엄마를 재촉하듯 바라보며 달린다. 아내는 "에잇!"이라고 말하지만 웃는다. 적당히 가슴 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진화의 비밀은 죽음과 시간에 있다.’라고 했다. 한 번밖에 죽을 수 없는 러너로서 나는 진화의 비밀에는 사람과 시간, 그리고 길에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와 함께 달리는 시간이 누적되고 다양한 길에서 달리는 경험이 축적될수록 러너는 진화한다.
나에게 달리기 여행을 깨우친 하루키는 최근 또 하나의 선물을 주었다. 이번에도 그 선물을 전달한 건 선의의 경쟁자인 홍시기다. 어느 토요일 한강으로 달리기 소풍을 떠났다. 경춘 철교에서 출발해 한강까지 20km를 달렸다. 세빛둥둥섬 옆에 있는 한강 편의점에서 끓여 먹은 라면 맛은 일품이었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두 발로 달리는 사람과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을 바라보니 근심은 모두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1km를 더 달려 동작대교 구름카페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마트24 편의점과 문학동네가 운영하는 작은 서점이 있다. 홍시기는 하루키의 책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선물했다. 책에서 하루키는 보스턴에서 달린 이야기를 한다. 찰스강에서 달리는 그를 상상하며 설렜다. 보스턴에는 보스턴 마라톤만 있는 줄 알았던 내게 하루키는 보스턴 달리기 여행을 심었다. 달리는 작가 하루키는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다. 벌써 일흔이 넘은 그를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