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4시간 중 9시간, 3분의 1 이상을 직장에서 보낸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 직장 동료와 보내는 시간이 많다. 직장 동료와 친해지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선후배는 물론이고 함께 입사한 동기도 마찬가지다. 직장은 일 중심이고 평가와 승진처럼 관계를 저해하는 요소도 많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터운 관계가 되기는커녕 멀어지기 일쑤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직장 동료와도 친구처럼 친해질 수 있고 퇴직 후에도 만나는 직장 동료가 열 명쯤은 될 거라 믿는다. 그런데 희한하다.
직장 생활을 10년도 더 했는데도 친한 사람은 고작 한둘이 전부다.
도대체 직장 생활을 어떻게 했길래 친한 사람이 이 정도밖에 안 될까 하는 자괴감이 들 때도 있지만, 남들도 나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떠올리면 위안이 된다.
홍시기는 나를 회사 달리기 동호회로 이끌었다. 총무에서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나도 일반 회원에서 총무가 됐다. 회사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풀코스 마라톤은 언감생심이었다. 1년에 한두 번 하는 동호회 행사는 10km 마라톤 대회나 여행 달리기였다.
총무로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리는 대회를 검색하다 <속리산 단풍 마라톤 대회>를 발견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고 마침 가을이라 단풍놀이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금요일 오후 휴가를 내고 이동했다. 동호회라고 해봤자 네 명으로 모두 한차에 탈 수 있었다. 대전에서 오는 후배는 펜션에서 만나기로 했다. 교통체증을 걱정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두 시간 반 만에 보은에 도착했다. 읍내 마트에서 각종 채소와 쌈장, 과일과 술을 샀다. 바비큐 파티에서 제일 중요한 고기는 고깃집을 하는 지인에게 부탁해 소 갈빗살을 준비했다. 속리산 송이버섯은 고향이 보은인 홍시기가 미리 펜션으로 배송해놓았다. 평소에는 이렇게 고급스러운 여행을 하지 않는데 금의환향(?)한 홍시기가 맘껏 기분을 낸 덕분이다.
몇 년 전 직장 동료들과 제주에 갔을 때다. 지금은 퇴직한 선배가 우리를 식당으로 데려가며 말했다. “제주에 왔으니 말고기를 먹어야겠지?”
그는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며 진정한 선배의 모습을 보였다. 머리로 아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선배가 멋졌다. 그때 홍시기도 그렇게 느꼈는지 선배의 모습을 따라 했다.
시장을 다 봤을 때 시간은 막 오후 5시를 지나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기엔 일렀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자연산 송이와 갈빗살, 토속주와 각종 먹거리가 상상돼 입에 침이 고였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대전에서 출발한 후배가 펜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비큐 준비를 서둘렀다. 일부는 숯에 불을 피우고 일부는 야채를 씻고 일부는 그릇을 준비했다. 회사에서는 주로 아랫사람이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도맡아 하지만 동호회에선 각자 한다. 순식간에 준비를 끝내고 고기와 송이버섯이 익기를 기다렸다.
돼지고기는 노릇노릇 잘 익어야 하지만 쇠고기는 대충 핏기만 없으면 먹어도 된다는 누군가의 말을 실천했다. 핏기가 사라진 쇠고기는 누군가의 입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핏기'대신 '레어'라고 하면 그럴듯하다. 송이의 운명도 쇠고기와 다르지 않았다. 석쇠에 잠깐 머물렀다 사라졌다.
송이와 소고기는 다섯이 먹고 넘칠 만큼 충분했다. 원래 오기로 한 사람이 세 명이나 빠져서다. 평소에 구경하기 힘든 좋은 안주가 차려졌지만, 술잔의 속도는 나무늘보 수준이었다. 달리기 대회를 앞둔 러너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이야기의 향연이 펼쳐졌다. 모두의 관심사가 다양했다. 같은 회사지만 하는 일도 다르고 취향도 달랐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악기와 클래식에 관해 이야기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이야기를 했다. 홍시기는 법주사와 속리산에 대한 전문지식을 뽐냈다. 신입 후배는 요즘 청년들의 취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두의 관심사인 달리기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내일 코스는 생각보다 언덕이 심하다는 누군가의 말에 엄살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고 전의를 불태우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달리기를 갓 시작한 후배는 진지한 모습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훗날 <알쓸신잡>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봤다. 작가 김영하, 가수 유희열, 전직 정치인 유시민,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과학자 정재승 씨가 출연해 여행하며 느낀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펼쳤다. 그 프로그램을 보는 순간 직장 동료들과 했던 속리산 달리기 여행이 떠올랐다.
직장 동료들은 <알쓸신잡>에 나오는 어느 출연자였다. 평소엔 옆에서 일하는 동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각자의 관심사에 대해 말하는 순간 전문가의 향기가 났다.
나는 예외였다. 여전히 송이와 소 갈빗살에 침이 고이는 파블로프의 개와 다름없었다. 송이는 숯불에 얹자마자 쇠고기는 핏기가 가시자마자 입으로 사라졌다.
지인들과 여행을 가서 바비큐 파티를 하면 혀가 꼬이는 사람이 한 명은 등장한다. 좋은 사람들과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면 한 잔 들어가고 또 한 잔 들어가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술이 술을 먹는 상황이 나온다. 이날은 그렇지 않았다. 달리기 여행의 장점이다. 특히나 내일 달리기는 대회 참가라는 목적이 뚜렷했다.
숯불의 힘이 약해지고 대화가 뜸해지자 풀벌레들이 대화를 이어받았다. 우리의 목소리에 숨죽였던 풀벌레들이 각자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우리는 풀벌레들의 쇼 타임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에서 만날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반짝였다.
어린 시절 어느 여름, 옥상에서 잘 때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와 부채 바람이 생각났다. 그때는 당연했던 풍경이 이제는 서울에서 차로 두어 시간은 달려야 겨우 만날 수 있게 됐다. 아쉬움이 밀려왔다.
단체여행에서 잠잘 때 중요한 건 코 고는 사람을 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할 방은 셋, 코를 고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네 명은 2인 1실을 사용하고 코를 고는 한 사람만 1인 1실을 이용했다. 코골이가 좋은 건 아닌데 이날은 혼자 독방을 차지했으니 의문의 승자가 됐다.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마침 룸메이트인 입사 동기도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슬쩍 말을 건넸다. “1년에 한 번 하는 직장 동료와의 여행이 좋다. 평소에 몰랐던 모습도 발견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니 이전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그도 맞장구쳤다. “오늘 먹은 송이와 쇠고기는 정말 맛있었어. 내일 달리기는 대충하고 멋들어진 단풍을 즐기자.”
“당연하지. 이 좋은 날에는 달리기보다 단풍놀이가 우선이지.”
서울에도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같은 명산이 여럿 있지만, 살다 보면 가을에 단풍놀이 한번 제대로 못 하고 계절을 보낼 때가 많다. 마침 우리는 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속리산에 왔으니 단풍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뀐 자연을 느끼는 것, 그것이 진짜 행복이 아닐까?
새벽 일찍 눈을 떴다. 지난밤 동기와 나는 누가 먼저 잤는지 모른다.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 순간 잠들었다. 일어난 순서대로 씻고 바나나와 카스텔라 같은 간편식으로 식사를 했다. 배고픈 사람은 이동하면서 떡을 먹기로 했다. 출발지인 말티재 꼬부랑길에 도착하니 이미 차들로 가득했다.
차 안에서 대회 복으로 갈아입고 대회장으로 가며 몸을 풀었다. 시골 대회치고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체조를 하고 출발선에 섰다. 빨리 뛸 마음이 없는 나는 긴장하지 않았는데 주위 선수들은 달랐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들은 출발 총성이 울리자 스프링처럼 튀어 나갔고 나는 멈칫하다 굼벵이처럼 움직였다. 출발 지점부터 가파른 경사에 숨이 차올랐다. 직접 달린 꼬부랑길은 지도보다 더 꼬불꼬불했다. 다행히 언덕은 길지 않았고 임도로 바뀌었다. 그제야 절정의 단풍이 눈에 들어왔다. 주최 측의 택일에 감탄했다. 어쩌면 그들의 정성에 하늘이 보답했는지도 모른다.
속리산을 품은 보은은 세조와 인연이 깊다. ‘말티재’도 세조와의 인연으로 이름 붙여졌다. 세조는 신미 스님을 스승으로 삼았고 스님이 머물던 법주사를 찾았다. 가마를 타고 속리산을 넘어갈 수는 없어 말로 바꿔 타야 했다. 그래서 말티재가 됐다.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 드라마 같은 왕의 이야기는 야설과 버무려져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됐다. 역사 왜곡 논란을 일으킨 영화 <나랏말싸미>에도 세조가 등장한다. 영화는 주인공 역을 맡은 송강호, 박해일의 명성이 무색하게 백만 명도 채우지 못했다. 흥행 참패의 이유를 역사 왜곡이나 세종대왕을 깎아내린 데서 찾는 평론가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가 참패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법주사 입구에서 신미 스님이 머물던 복천암까지 2.5km 길이의 ‘세조길'이 있는데, 훗날 나는 그 길을 달리기 친구들과 함께 달렸다. 왕의 길이라 부르기에는 소박한 세조길은 권력에 눈이 먼 젊은 세조가 아닌 조선의 번영을 꿈꾸던 황혼의 세조를 닮았다. 젊을 때 사람은 앞만 보고 살지만, 세월이 흘러 어느 경지에 이르면 주위를 돌아보며 산다. 러너라고 다를까?
세조길은 인생행로는 물론 러너의 행로도 일깨우는 길이었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곤룡포를 입고 달리는 사람을 가끔 본다. 그런 복장으로 달리는 모습이 신기하지만, 나는 그렇게 불편하게 달리고 싶지 않다. 단풍구경을 하며 달렸더니 대회라고 말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느렸다. 곤룡포를 입고 달린 사람과 경쟁했어도 졌을 것이다. 달리기 반 단풍 구경 반으로 말티재를 한 바퀴 돌아 골인 지점으로 향했다. 초반부터 헤어진 동료들은 모두 들어왔을 거라 짐작했다. 달리던 속도 그대로 결승선에 골인했다. 동료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나보다는 빨리 들어왔지만, 얼마나 천천히 달렸는지 달린 기색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전에서 온 후배만 대회다운 달리기를 했다. 생각보다 빠른 기록에 놀랐다. 칭찬했다. "와우, 멋지다."
후배의 얼굴이 상기되며 뿌듯한 미소가 일었다.
우리 앞에 웬 외국인 한 그룹이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시골 대회에 외국인이 있는 자체가 놀라운데 한두 명이 아닌 그룹으로 있는 것을 보니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Where are you from?”
“Spain”
그들은 매주 한국의 마라톤 대회를 찾아다닌다고 했다. 그 순간 세상에서 제일 멋진 외국인 러너로 둔갑했다. 한국의 연간 마라톤 일정을 볼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를 알려주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우리도 외국인과 사진을 찍었고 그들도 외국인과 사진을 찍었다. 캠핑카를 타고 해외여행하며 매주마다 다른 달리기 대회를 뛰는 상상이 찾아왔다.
1박 2일 동료들과 달리기 여행을 하며 평소에 하지 않는 솔직한 이야기를 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쌓았다.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만들 수도 없는 인연이었다. 분명 일에서도 좋은 효과를 낼 것이며 훗날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만나는 인연이 될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간표가 생각났다. 시간표에는 국영수 같은 순수한 공부 시간이 많았지만, 체육, 미술, 음악 같은 노는 시간도 있었다. 체육 시간에는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뛰어놀고 미술 시간에는 만들기를 하며 놀고 음악 시간에는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달리기 여행도 직장 동료들과 함께 노는 거다. 직장 동료와 깊은 관계를 맺는 비결이 어쩌면 중고등학교 시간표에 있지 않을까? 회사의 시간표도 9시부터 6시까지 일로만 가득하지 않고 중간마다 놀이가 들어가면 누구나 퇴직 후에도 만나는 직장 동료가 열 명쯤은 생기지 않을까?
누군가 내게 "그게 회사냐?"라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언젠가 내가 회사를 운영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옆에서 선배가 말했다. “따뜻한 봄날에 남산 둘레길을 각자의 취향대로 달리고 함께 사우나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딱 좋지 않을까?”
모두가 동의했다.
식당으로 이동하는 길에는 보은의 특산품인 대추가 널려있었다. 얼마 전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본 '대추가 저절로 붉을 리 없다.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렇다. 저절로 되는 관계는 없다. 다행인 건 대추처럼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같은 고통과 고난을 겪어야 하는 건 아니다. 달리기 여행처럼 그저 함께 어울려 노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단풍과 대추처럼 아름답게 붉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