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올림픽 마라톤이 심은 리우데자네이루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일까?/제주
리우 올림픽이 다가오며 올림픽 열기도 달아올랐다. 손흥민 선수가 출전하는 축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러너인 나는 마라톤에도 관심을 뒀다. 그즈음 일본 출신의 캄보디아 마라톤 국가대표 다키자키 선수를 알게 됐다. 개그맨이던 그는 <무한도전> 같은 도전형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풀코스 마라톤을 처음 완주했다. 그것이 계기가 돼 올림픽 출전의 꿈을 꾸며 매일 30km를 달렸다. 캄보디아로 국적을 바꾸고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하며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뤘다. 마라톤은 큰 체구보다 작은 체구가 유리하다지만 147cm 초 단신인 그가 이뤄낸 업적은 인간승리다.
서브3를 목표로 달리기를 할 때는 일상이 달리기였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었다. 살면서 한 번은 서브3를 하겠다는 소망을 아내가 받아들여 별문제 없이 대회 준비를 했지만, 주말이나 퇴근 후에 어김없이 달리기부터 챙기는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이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했는데도 서브3를 하지 못했다면 어쩔뻔했을까 싶다.
그때처럼 또 달리기만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휘몰아칠 가정의 폭풍이 걱정되지만, 대회가 끝나자마자 더 좋은 기록을 내고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키자키를 알게 된 순간 나도 그처럼 매일 하루 30km 이상 달리면 어느 날 어느 나라의 국가대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현 불가능한 상상을 시작했다.
리우는 브라질 최대 도시인 상파울루나 수도인 브라질리아보다 유명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리우 카니발 덕이 크다. 브라질의 인류학자인 호베르투 다마타는 "브라질이 카니발을 만든 게 아니라 카니발이 브라질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는데, 그중에서도 리우 카니발은 다른 카니발을 압도한다.
리우 올림픽 중계방송을 볼 때마다 첫 영상은 코르코바도산 정상에서 양팔을 벌리고 우뚝 선 예수상으로 시작했다. 높이 38m나 되는 예수상은 브라질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웅장하다. 예수상을 왜 저렇게 크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인구의 90% 이상이 예수를 믿고 1931년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었다는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는 예수상 다음 대체로 경기장을 향했는데 간혹 끝없이 펼쳐진 코파카바나 해변을 비추기도 했다. 코파카바나 해변의 마지막 장면은 언제나 손바닥만 한 비키니 위에 손가락을 얹고 사인을 하는 미녀였다.
올림픽의 열기가 한창 뜨겁던 8월, 리우 대신 제주로 향했다. 제주에서도 가장 예쁘다는 협재해변을 베이스캠프로 정했다. 협재해변 앞에는 해변을 더 멋지게 하는 작은 섬 비양도가 있는데, 제주가 지구라면 비양도는 달이다. 달이 없는 지구를 상상할 수 없듯 비양도 없는 협재해변도 상상할 수 없다.
비양도는 「어린 왕자」에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을 닮았다. 상상 속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 비양도를 바라보며 어린 왕자가 되는 꿈을 꿔도 좋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한달음에 협재해변으로 갔다. 협재해변은 처음이라 숙소보다 바다가 먼저 보고 싶었다. 협재해변을 마주한 순간 터져 나오는 감탄사를 막을 수 없었다. “와아아아아."
빨리 바다에 들어가자는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얼른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닷가로 달렸다. 물 만난 고기가 아니라 물 만난 어린이가 되어 아내에게 말했다. “일단 수영부터 좀 하고 올게.”
바다 앞에 보이는 섬이 보아 뱀을 닮아서인지 아이들은 어린 왕자와 공주, 부모들은 호위무사와 상궁으로 보였다. 대형 고무보트를 타는 사람들을 본 아이들은 자기들도 그걸 타겠다고 보챘다. 다음에 타자고 몇 번이나 달랬지만, 호위무사의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총알같이 달려 보트를 빌려왔다. 대형 튜브였지만 모두 다 앉을자리는 없어 아이들만 태웠다. 뒤에서 밀어주니 기분이 좋은지 바다로 좀 더 들어가자고 했다.
보트를 한 시간은 타야 돈값을 하는데 고작 10분도 안 돼 그만 탄다고 했다. 왕자와 공주로 둔갑한 아이들의 변덕은 죽 끓듯 했다.
비싸게 빌린 튜브를 10분도 안 타고 돌려주긴 아까웠다. 보트에 누워 보니 의외로 재미있어 아내를 불렀다. 아이들도 따라왔다. 엄마와 함께 탄 아이들은 좋다고 까르르댔다. 엄마가 아빠보다 좋다고 온몸으로 표현했다. 심술 난 내가 물었다. “아빠가 엄마랑 놀면 안 될까?”
아이들은 단칼에 거절했다. 정말 답답하고 이기적인 왕족들이었다. 30분쯤 탄 뒤에 아이들은 아내의 손을 잡고 해변으로 나갔다.
혼자 보트를 타고 하늘을 향해 누웠다. 맥주가 생각났다. 삼바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면 이곳이 리우의 코파카바나 해변이 될 것 같았다. 당장 맥주를 사러 갔다.
아들과 딸은 모래놀이에 정신이 팔렸고 아내와 나는 파라솔에 앉아 여성 그룹 'Bellini' 버전의 <Samba de brazil>을 들었다. 소리가 큰 블루투스 스피커가 흥을 더했다. 얼음에 동동 떠 있던 캔맥주에 손이 시렸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발끝까지 시원해져 감탄사를 토해냈다. “크아아아”
눈을 감으면 리우의 코파카바나 해변이 떠올랐지만 눈을 뜨면 어린 왕족들로 가득한 협재해변을 벗어나지 못했다. 미남 미녀들로 뜨거울 리우의 코파카바나 해변은 잊기로 했다.
아이들을 바라봤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딸이 동생을 툭 치며 도망갔고 아들은 “누나 잡아”라고 외치며 따라 달렸다. 둘이 노는 모습이 귀여워 얼른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했다. 대체로 아이들의 장난은 동생이 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넘어져 우는 아들을 일으켜 파라솔로 데려왔다.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서 안겼다. 금세 웃음이 돌아온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스피커에서 오빠 오빠 오빠라는 소리가 흘렀다. 'oba oba oba'라는 가사가 '오빠 오빠 오빠'로 들리는 <Mas que nada>라는 삼바 곡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 아내에게 '오빠'라고 부르라 했더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듯이 핀잔을 줬다. “아빠가 웬 오빠?”
그러거나 말거나 보챘더니 선심 쓰는 척 말했다. “오빠”
혼자 킥킥댔다. "아빠는 아빠대로 오빠는 오빠대로 기분 좋은 말이야."
아내는 여전히 철이 안 들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웃으며 가사를 흥얼댔다. "오빠 오빠 오빠"
스마트폰에 찍힌 아이들의 사진을 훑어봤다. 코발트 빛 바다와 보아 뱀을 닮은 비양도를 배경으로 찍힌 아이들의 사진은 작품이었다. 사진을 넘기다 달리는 아들의 사진에 눈길이 멈췄다. 달리기를 한 번도 가르치지 않았는데 달리기 좀 한다는 아빠보다 더 좋은 자세였다. 사진이 잘 찍히기도 했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달리는 누군가를 본 적이 없다. 멋지게 달리는 사람이 많지만, 굳이 관심을 두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좋은 자세는 자연스러워 눈에 띄지 않고 이상한 자세로 달리는 사람은 드물어서 보이지 않는다. 아들의 자세를 뚫어지라 본 건 단지 내 아들이라서 그랬다.
지난 5년간 크고 작은 대회를 수십 번도 더 나갔지만 특이한 자세로 뛰는 사람은 달랑 두 명이었다. 한 사람은 남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여자였다. 남자는 내가 본 가장 특이한 자세로 달리면서도 나보다 빨라서, 여자는 노란 머리 파란 눈의 외국인이라서 그렇다. 두 사람은 내가 참가하는 풀코스 대회 때마다 참가했고 최근 대회에선 익히 아는 사람처럼 친근해 응원을 담은 '화이팅'을 외친다.
다른 운동과 달리 달리기는 자세가 좋거나 나쁘거나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무슨 운동이든 달리는 자세가 좋으면 더 멋진 건 사실이고 자연스러운 자세는 부상 방지에도 탁월하니 킵초게 같은 선수의 영상을 보며 좋은 자세를 만드는 건 권장할만하다.
일몰이 다가왔다. 해가 지기 전에 간단히 저녁을 먹고 해변에 돗자리를 깔았다. 해가 떨어질 무렵의 협재해변은 뜨거운 햇살이 작열하던 몇 시간 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바다 뒤로 넘어가던 태양은 바다로 한 줄기 붉은색 길을 내며 탄성을 자아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가 있는 가족 여행객은 줄어들었고 친구와 연인들이 늘어났다. 선남선녀들은 바다에서 물놀이하며 뜨거운 열정을 불태웠다. ‘청춘의 열정은 영원하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태양은 조금이라도 더 사람들을 비추고 싶은지 시간조차 더디 가게 했다. 그래도 시간을 이기지는 못하고 바다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그 순간 수평선 위로 펼쳐진 노을은 선명하게 빛났다. 태양이 남긴 여운이었다. 더운 여름이지만 저녁의 시원한 바닷바람에 후덥지근함은 물러가고 상쾌함이 찾아왔다.
차분해진 기분에 보사노바의 대표곡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The girl from Ipanema)'를 틀었다. 보사노바는 삼바에 재즈를 가미한 감미로운 음악으로 부드러운 달콤함이 녹아 있다. 이 곡은 리우 올림픽 개막식 때 지젤 번천이 펼친 워킹 쇼의 배경음악이기도 하다. 브라질 출신이자 모델계의 전설인 지젤 번천은 리우의 마라카낭 경기장에 단독으로 올라 10만 관객의 환호성을 받으며 아우라를 뽐냈다. 역시 올림픽 개막식은 자국이 배출한 스타를 전 세계에 자랑하는 무대다.
보사노바는 협재해변의 이국적인 저녁노을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맥주를 마시며 흥얼대는 아내의 노랫소리도 달콤했다. 그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웬일인지 조용하다 싶던 아이들이 돌연 왕족으로 변해 서정적인 분위기를 깼다. "그만 들어가자!"
제주까지 와서 일찍 잘 수 없었다. 여행지에서만큼은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야식을 먹기로 했다. 해변 앞 붉은 노을이 만들어내는 멋진 분위기는 아니지만, 술이 만들어내는 적당한 분위기가 생겼다. 여행지에서 마시는 술은 들뜬 기분을 더 돋운다.
치킨을 먹던 아들이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올림픽 마라톤 중계방송에서 멈췄다. 다른 걸 보자는 엄마의 요청을 가볍게 흘렸다. 내심 관심 있던 경기라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리우 올림픽 마라톤의 관전 포인트는 세 개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우리나라 선수의 기록과 순위였다. 메달권과는 거리가 멀어 별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어떤 기록을 낼지 궁금했다. 두 번째는 킵초게 선수가 런던마라톤에 이어 올림픽 2연패를 하느냐였다. 마지막은 개그맨 출신 다키자키 선수의 선전 여부였다. 우리가 중계방송을 보기 시작했을 때 40여 명의 선두그룹은 이미 하프를 지나고 있었다. 그 안에 한국 선수와 다키자키 선수는 없었다. 킵초게 선수는 선두그룹에서도 당당히 맨 앞에서 질주하고 있었다.
중계방송이 높은 곳에서 선수들을 비추면 보타포구 해변과 플라멩코 해변의 멋진 풍경이 드러났다. 선수들은 도로를 달리지만 내가 저곳에 가면 도로 옆 가로수 길과 해변 사이 조깅로에서 달리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잠이 든 후 리모컨은 아내의 차지였다.
선수들이 들어올 2시간에 맞춰 마라톤 중계방송을 봤다. 예상대로 킵초게가 1위로 질주했다. 몇 분 뒤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며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뒤이어 에티오피아 선수와 미국 선수가 2위 3위를 기록했다. 흑인 선수가 휩쓰는 마라톤에서 백인 미국 선수가 3위를 한 건 의외였다. 한국 선수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한국 남자 선수들에 대해 한탄하며 맥주를 마시는데 아내가 한마디 했다. "좀 고만하시지."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들었다. 뉴스에선 한국 선수를 제목으로 다룬 기사는 아예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달리기로 날리기로 했다. 달릴 코스는 협재해변부터 신창 해변까지 왕복 20km다.
여름에는 해가 뜨면 더위가 몰아치니 바로 출발했다. 제주에 올 때마다 달리지 않은 지역에 숙소를 정하는데 이렇게 제주도 여행을 열 번 정도 하면 제주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멀리서 풍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풍차와 가까워질수록 발소리는 풍차 소리에 묻혔다. 해상 다리의 끝에서 잠시 온몸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 왔던 길로 향했다. 올 때와는 반대로 경쾌한 운동화 소리가 풍차 소리를 덮었다. 삼바와 보사노바를 번갈아 들으며 인터벌 달리기를 했다. 몇 달 뒤에 있을 춘천마라톤에서 서브 3보다 더 빨리 다리고픈 마음이 제주에서도 이어졌다.
올 때는 미처 보지 못한 마라톤 거리 표지판을 발견했다. 교통신호등처럼 반영구적인 표지판을 본 순간 제주는 달리기 도시가 됐다. 표지판의 도움으로 1km 빨리 뛰기와 천천히 뛰기를 번갈아 했다. 훈련 같은 달리기를 했더니 뿌듯함이 솟았다. 샘물처럼 솟아나는 땀을 티셔츠로 닦아냈다.
고양이 발로 살그머니 방에 들어갔다. 내 옆에 자던 아들은 어느새 엄마에게 찰싹 붙어 있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아침 풍경은 평화로웠다. 욕심을 내서 더 오래 달렸다면 보지 못할 단란한 모습이다. 더 좋은 기록을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아내와 아이들이 자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빠의 시간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아이들이다.
삶의 우선순위를 달리기에 두면 누구나 감탄할만한 좋은 기록을 낼 것은 분명하다. 그와 비례해 잃는 것도 클 것이다. 시간은 저축하거나 멈출 수 없으니 잘 사용하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러너보다 더 소중한 삶의 이유가 떠올랐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정리되며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불편함도 사라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양도 가는 배를 타려면 모두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아내를 먼저 깨우고 아이들을 간지럼 태웠다. "얘들아! 어서 일어나. 배 타러 갈 시간이야"
실눈을 뜨는 아이들을 보며 어느 나라의 국가대표가 되는 상상을 완전히 접었다. 아이들과 함께 리우데자네이루로 달리기 여행을 떠나는 꿈을 펼쳤다. 현재에 충실한 러너로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