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에 빠지면 러닝화와 러닝복 같은 달리기 장비에 관심이 간다. 달리기에 무슨 장비가 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의외로 다양하다. 매주 한두 번 하는 축구나 골프 같은 주말 운동에 비해 매일 운동인 달리기는 다양한 구색도 필요하다. 달리기 장비가 비싼 편은 아니지만, 소비자는 가능하면 좋은 물건을 싸게 사고 싶어 한다.
장비에 대한 욕심은 열정과 비례한다. 괌 여행을 떠날 때 열정은 괌 날씨만큼이나 뜨거웠다.
괌에는 원주민 차모로 연인의 슬픈 사랑이 깃든 '사랑의 절벽'이 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아름다운 차모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원주민 청년을 사랑했다. 그녀가 너무 스페인 장교가 그녀에게 빠졌다. 그녀에게 연인이 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스페인 장교의 회유와 협박이 계속되면서 차모로 연인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고 더는 버틸 수 없게 됐다.
둘은 절벽에서 서로의 머리를 묶으며 다짐했다.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은 저승에서 이루자"
마지막 입맞춤을 하는 동안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하늘도 바다도 바람도 슬피 슬펐다.
수많은 연인이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사랑의 절벽에는 사랑의 메시지가 담긴 열쇠로 가득했다. 지금은 가족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지만, 한때는 신혼부부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한 여행지였다.
사랑의 절벽은 나를 신혼여행으로 데려갔다. 14년 전 호주에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전설이 없었다. 기억나는 건 고작 코알라와 사막 썰매 정도다. 아름다웠던 골드코스트와 시드니 해변은 세월 속에 먼지가 됐다.
1521년 마젤란은 지도만 보고 괌을 발견했다. 그에 비해 훨씬 여건이 좋았던 나는 자유여행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아쉬움이 내려앉았다.
시드니와 골드코스트에는 늘 달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을 보며 엄지를 세웠지만, 정작 나는 그러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뛰었다면 어땠을까?
여행지를 두 다리로 뛰어다니면 발자국으로 찍은 장소와 풍경이 가슴에 새겨진다. 더 많은 추억이 생기고 훗날 행복을 추억하는 시간도 많아진다.
이른 새벽 비행기에서 내렸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며 숨을 막았다. 열대지방 공기의 맛은 유쾌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비몽사몽이었다. 멀쩡한 정신으로 내렸다면 날씨가 왜 이러냐며 구시렁거렸을 것이다.
렌터카를 찾으러 갔다. 해외에서 처음 빌리는 렌터카라 기대 반 설렘 반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생각보다 작은 차는 아쉬웠다.
렌터카를 인수하는 사이 괌 공기에 익숙해지며 사람의 적응력에 놀랐다. 액셀을 밟는 순간, 설렘과 기대는 자동차 시속처럼 솟았다. 우리나라와 반대인 운전석도 익숙해졌다. 역시나 걱정은 미리 할 필요가 없었다. 부딪히면 저절로 해결된다.
아이들을 침대에 눕히고 짐 정리를 하는 사이 동이 텄다. 창밖으로 보이는 남태평양 풍경에 감탄했다. "캬아아아"
말로만 듣던 에메랄드빛 남태평양이었다. 손에 잡힐 듯한 알루팟 섬은 화룡점정이었다.
워터파크가 있는 리조트를 예약했다. 휴양지 여행의 기본 콘셉트는 먹고 쉬고 놀기다. 워터파크 이용료는 숙소 값에 포함되어 있다. 한국에선 반드시 돈을 내고 빌리는 물놀이 용품까지 모두 무료였다. 괌 리조트는 워터파크 비용을 하나도 포함하지 않은 국내의 리조트 가격과 비슷했다. 국내 여행할 돈에 조금만 더 보태면 해외여행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국내 리조트가 괌의 리조트처럼 바뀌길 기대한다. 백 보 양보하더라도 생명과 직결되는 구명조끼만이라도 무료로 하면 좋겠다. 구명조끼 없이는 워터파크에 들어갈 수도 없는데 대여료를 받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무한 무료 워터파크에 갔다.
유수풀, 파도풀, 짚라인, 슬라이드, 수영, 수구 등 온갖 놀이를 서너 시간 했더니 지겨워지고 딴생각이 났다. 알루팟 섬까지 무료 카약을 타기로 했다.
무료를 쏟아내는 리조트는 어디서 돈을 벌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대기업 걱정이라는데, 내가 그러고 있었다.
네 명이 한 카약에 타고 설렁설렁 노를 저었다. 구명조끼를 입었지만, 입지 않아도 될 만큼 물 깊이는 얕았다.
해변은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다. 아니나 다를까, 현지인 아이들이 카약을 타고 우리 곁에서 어슬렁거렸다.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쯤 되어 보였다. 승부욕이 발동해 카약 레이스를 하자고 제안했다. 출발 준비를 하고 외쳤다. "Go"
우리 카약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아들 걱정에 기겁했다. 정신없이 찾는 사이 아들이 벌떡 일어나며 웃어댔다. 옆에 있는 괌 아이들도 따라 웃었다. 그제야 나도 웃었다. 승부욕은 썰물에 딸려 보내고 다시 노를 저었다. 앞서가던 아이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해맑은 동네 꼬마들과 대결하겠다고 온몸에 힘을 잔뜩 준 내가 우스웠다.
괌에서 가장 깨끗한 해변은 단연 리티디안이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국에서부터 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상상을 초월했다. 움푹 파인 물웅덩이가 수시로 나타나 자동차를 타는 건지 경운기를 타는 건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았다. 깊은 웅덩이를 지날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경운기가 더 어울리는 길이었다. 차가 멈추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SUV를 빌리지 않은 아쉬움이 들었다. 달리기 속도보다 느렸지만 꾸역꾸역 도착했다.
예상과 달리 인기척조차 없었다. 제대로 왔는지 걱정됐다. "사람아 보여라 보여라 보여라."
숲이 우거진 비포장길을 따라 들어갔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해리슨 포드가 됐다. 고릴라가 튀어나올까 봐 걱정했는데 주차된 차를 발견했다. 살며시 주차하고 먹거리와 물놀이 용품을 챙겨 바닷가로 갔다. 사람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걱정은 사라졌다.
완벽한 해변이었다. 바다로 풍덩 뛰어들었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소금 맛이 하나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닷물을 살짝 머금은 순간 나는 일그러졌다. 물은 순도 100% 소금이었다.
아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첨벙첨벙 뛰어다녔다. 물고기를 잡을 리 없었다. 달리기를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아빠 물고기"
물고기를 잡을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아이의 믿음에 보답하고자 최선을 다해 쫓아다녔다. 체코의 전설적인 육상 영웅 에밀 자토펙은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라고 했다. 땅에선 사람이 물고기를 이기지만 물속에선 물고기를 이길 수 없다. 결국,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픽업트럭에서 현지인 세 명이 내렸다. 남자 어른 두 명에 아들 또래의 여자 아이였다. 아이는 곧장 해변으로 달려왔다. 처음에는 우리 아이들과 따로 놀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가 좁혀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함께 놀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세 아이가 노는 걸 보니 신기했다.
우정에도 국경이 없었다.
서로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신기해 딸에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했어?"
"별로 한 이야기 없는데?"
”그럼 왜 웃었어?"
딸은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거? 그냥 웃었어."
나도 어릴 때 이유 없이 많이 웃었다. 어른이 될수록 웃음에도 이유를 찾는 내가 웃겼다.
아이와 함께 온 현지인들은 바비큐 준비를 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나를 불렀다. 고기를 좀 주려나 싶어 나갔더니 손가락으로 웬 악어 두 마리를 가리켰다. 깜짝 놀라 뒷걸음치다 넘어질 뻔했다. 당황한 그들은 나를 진정시켰다.
다시 보니 도마뱀이었다. 내 다리만큼 큰 도마뱀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별일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이들을 불렀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도마뱀을 가리켰다. 아이들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겁을 상실한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고기 한 점 먹어보라고 하지 않았다.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내와 여행 일정을 맞추지 못해 괌 마라톤 대회 기간에 오지는 못했지만 처음 괌 여행에 관심을 가진 건 괌 마라톤 덕분이다. 마라톤 출발 시각이 새벽 세 시라는 것을 알았을 때 괌은 얼마나 덥기에 이른 새벽에 출발하나 궁금했다.
새벽에 이파오비치를 향해 달렸다. 괌 마라톤 출발 시각이 왜 새벽 세 시인지 알 것 같았다. 덥고 습한 날씨에 인생 완주를 먼저 할 것 같았다.
리조트에서 이파오비치 방향으로 2km쯤 달렸을 때 힐튼 호텔이 보였다. 아름다운 여성이 달리고 있었다. 공원을 낀 바닷가를 달리는 영화 속 여주인공 같았다. 여자는 영화 속 여주인공 같은데 나는 왜 동네 아저씨 같을까? 금방 답이 나왔다. 그녀는 휘황찬란한 러닝복에 모자와 선글라스까지, 모든 러닝 용품을 장착했다. 화장으로 치면 풀메이크업을 한 상태였다. 거기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카락이 모자 뒤에서 찰랑찰랑하며 조명이 되어 그녀를 더욱 빛내고 있었다.
나는 고작 시커먼 러닝 팬츠에 난닝구를 입었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한쪽은 눌렸다.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화장과 조명은 예식장 신부만 빛나게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모자라도 쓰리라 다짐했다.
영화 속 주인공 같은 그녀와 함께 달리고 싶었지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나의 길을 달렸다.
괌에 오기 전 누군가 괌은 쇼핑 천국이며 쇼핑하는 만큼 돈을 버는 거라고 했다. 정말 그런지 확인하러 갔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가격에 놀라며 그 말이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러너의 쇼핑을 말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러닝화와 러닝복부터 눈에 들어온다. 발걸음이 자동으로 그쪽으로 향한다.
러닝복의 가격은 상식을 거부했다. 이것저것 고를 필요 없이 치수만 맞으면 쇼핑백에 담았다. 생각이 없다는 아내의 러닝복도 샀다. 지름신을 하해와 같이 맞이했다. 달릴 때마다 각양각색 다른 러너가 된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숙소에서 하나씩 입어보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에 쏙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내는 초지일관 별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다음에 입어볼게"
마음에 안개가 자욱했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건비치에서 일몰을 봤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사방을 메웠다. 가족들, 연인들은 지상낙원의 일몰을 바라보며 사랑과 행복을 속삭였다. 아름다운 풍경과 연인들의 애정 행각은 더없이 어울렸다. 아내와 나는 뛰어다니는 남매들을 바라보며 잔잔한 행복을 느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은 더 많이 모였고 떠나야 하는 우리는 더 아쉬워졌다.
건비치의 일몰을 마지막에 보려고 일부러 남겨둔 건 아니었지만, 괌은 원래 그럴 계획이었던 것처럼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했다.
시원한 맥주를 한잔하고 싶었지만 운전이 발목을 잡았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이 했던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잔할까?"라는 대사가 생각났다. 무알콜 칵테일 두 잔을 사서 아내와 건배를 했다. 신혼여행 느낌이 났다. 그 느낌으로 연인들의 흉내를 냈다. 아이들은 곧 돌아가야 하는 사실을 잊은 듯 신발까지 벗어놓고 뛰어놀았다. 무릉도원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괌에서 산 옷을 모조리 꺼내 다시 입었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 도대체 마음에 드는 옷이 하나도 없었다. 며칠 전에 산 새 옷을 버릴 수는 없었다. 옷들은 장롱에 들어가며 몇 주간 근심이 됐고 한 달쯤 지나고는 완전히 잊혔다. 1년 이상 장롱 속에 있다가 고스란히 재활용 통에 들어갔다.
괌 데데도 벼룩시장에서 산 'Guam' 로고가 박힌 옷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잠옷으로 입는데 '나이키', '아디다스'라고 찍힌 러닝 옷들은 한 번도 입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았다.
훗날 미식축구 선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따뜻하고 감동적인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를 보았다. 극 중에 샌드라 블록은 상류층 여자로 인성과 지성은 물론 정의로움까지 갖춘 완벽한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다 완벽한 패셔니스타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한 번도 샌드라 블록이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영화를 보면서 완전히 반해버렸다. 여주인공 샌드라 블록은 내가 괌에서 얼마나 어리석은 쇼핑을 했는지 깨닫게 했다. 그녀가 말한 쇼핑의 지혜는 이렇다. "매장에서 입었을 때 마음에 쏙 드는 옷이 아니면 사고 난 후에도 절대 입지 않는다. 정말 마음에 드는 옷을 사라."
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는 뭐니 뭐니 해도 러닝화다. 아름답고 멋진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 러너가 추천하거나 신고 있는 멋진 러닝화를 보면 신어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람의 발은 의외로 이름만큼이나 다양하다. 신발을 사는 목적이 빨리 달리기 인지 천천히 달리기 인지 내 발에 맞는지 아닌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단지 예쁘다, 싸다, 누가 추천한다는 등의 이유로 사면 어느 순간 신발장에서 근심 덩어리로 남는다. 그리고 버려진다.
얼마 전 많은 러너가 추천했던 나이키 러닝화를 하나 샀다. 신발을 신으며 발볼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양도 예쁘고 성능도 좋다는 말을 믿었다.
완벽한 실패였다.
3km를 지나면 어김없이 발바닥이 뜨거워졌다. 서너 번 신어본 후에도 똑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러닝화는 근심 덩어리가 된 채 신발장 깊숙이 박혔다. 1년쯤 뒤 재활용 통으로 들어갈 운명이다.
최근에 내 발에 꼭 맞는 운동화를 샀다. 발 볼이 넓고 가벼운 러닝화다. 달리면서는 더 만족스러웠다. 샌드라 블록이 알려준 쇼핑의 지혜는 참으로 쓸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