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샌프란시스코에선 자전거보다 달리기

오늘 스타벅스에 가는 이유/샌프란시스코

by 막시

'저긴 어딜까?'

초등학생 시절, 누나가 만든 광섬유 액자를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액자 안에선 만화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다리가 주인공이었고 한쪽 모퉁이에는 ‘Sanfrancisco’가 작게 적혀 있었다. 전원을 연결하면 휘황찬란한 불빛이 들어와 반짝반짝 빛나기도 하고 흘러내리기도 했다.

시골에 살던 촌놈에게 그곳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신세계였다. 그곳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가고 싶다는 생각과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시간이 흘러 Sanfrancisco를 읽을 수 있게 됐고 더 시간이 흘러 그 다리의 정체가 골든 게이트 브리지라는 것도 알게 됐다. 한 동안 나는 열병을 앓는 아이처럼 샌프란시스코 골든브릿지를 끙끙댔다.

몇 년 후 액자는 어디론가 치워졌고 샌프란시스코를 향한 마음도 빨래가 마르듯 사라졌다. 그 후 이십 년도 넘는 세월이 흐르며 어릴 적 로망은 완전히 봉인됐다.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떠올린 건 달리기를 시작한 후 만난 어느 에세이 덕분이다. 런던에 사는 저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나이키 우먼스 마라톤에 참가한다. 그녀가 출발할 때부터 나는 알 수 없는 설렘으로 두근거렸고 골든 게이트 브리지를 막 들어서는 순간 이십 년 이상 봉인됐던 골든 게이트 브리지를 향한 로망이 해제됐다.

그날부터 샌프란시스코에 대한 영상과 사진을 찾아보며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빨리 샌프란시스코에 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샌프란시스코는 대서양을 건너야 하니 그만큼의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직장, 가정, 시간, 돈, 여행을 위한 조건 중 무엇 하나 내 맘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묵묵히 제 갈길을 갔다.

애타는 마음을 하늘이 알아챈 걸까?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까운 실리콘밸리에 출장 갈 일이 생겼다. 쾌재를 부르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음은 그곳을 달리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지도가 눈에 익을 즈음 떠나는 날이 찾아왔고 기대는 풍선처럼 부풀었다.


홀리데이 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해변으로 달렸다. 샌프란시스코에 오기 전부터 찜해둔 자전거숍에 들러 나를 빤히 쳐다보는 자전거를 골랐다. 골든게이트 브리지를 향해 페달을 굴렸다. 골든 게이트 브리지 위에 서자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났다.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에서 과거로,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내가 방문한 미국의 첫 도시가 샌프란시스코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액자를 만들어 집에 걸어 둔 누나가 고마웠다. 자전거를 잠깐 세우고 고맙다는 메시지를 누나에게 보냈다.

소살리토로 향했다. 연예인들의 휴양지란 이야기에 얼마나 예쁜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고 골든게이트 브리지를 건너는데, 신이란 신은 모조리 내게 온 듯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이 난 나는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도 어떤 힘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순간 옛날 LG 트윈스의 특기였던 신바람은 나의 특기가 됐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바람에 관광객들이 옷깃을 여몄지만, 나는 두 팔을 벌려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다리 길이는 3km나 됐지만 자전거가 거리를 압축했다. 자전거가 내리막길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구름 위에 올라앉았다.


소살리토는 언덕 위 집들과 나무들이 오밀조밀 모인 해안 마을이었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아기자기한 매력을 뿜어냈다.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돌리며 상점과 사람을 구경했다. 유독 소살리토에 어울리는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잔 샀다. 입안을 지나 식도로 넘어간 얼음 커피는 갈증을 없애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예술적 감각이 없는 나는 카페의 소품을 보는 대신 밖으로 나갔다. 커피를 마시며 소살리토의 낭만적인 풍경을 바라봤다. 실내 인테리어보다 바깥에서 사람과 풍경을 보는 재미가 더 좋았다. 언덕 위로 겹겹이 쌓아 올려진 주택을 보니 파리의 몽마르트르와 부산의 달맞이고개가 떠올랐다. 도시는 알게 모르게 서로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샌프란시스코 피어로 돌아올 때는 크루즈를 탔다. 배를 타는 시간은 휴식이었고 각양각색의 외국인은 나를 더 깊은 여행 속으로 데려갔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골든 게이트 파크를 향했다. 해변에서 공원으로 가는 길에 언덕이 하나둘 나타났다. 완벽한 여행에 조금씩 금이 갔다. 언덕 다음에 또 다른 언덕이 연이어지며 이 언덕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순간, 온몸의 세포가 아우성쳤다. "이건 아니야"

세포와 대화를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사과를 하고 싶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전동 자전거를 탄 여행자가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세상에 없는 맑음, 나의 얼굴은 세상에 없는 흐림이었다.

꾸역꾸역 기어 골든 게이트 공원에 도착했다. 달리기 코스로도 안성맞춤이라 여행 전부터 기대했던 곳이다. 기대를 즐거움으로 바꿔야 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푸드트럭에서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서 공원 벤치에 널브러졌다. 음식과 휴식으로 도망간 힘이 조금 돌아왔을 때 페달을 굴렸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숲 공원은 과학관, 미술관, 정원 등 다양한 볼거리로 가득했다. 다음에 이곳에 온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달려야 할 곳이었다.


마트에서 먹거리를 잔뜩 사서 해변으로 갔다. 에너지를 채우는 데는 음식과 휴식이 최고다. 해변에 앉아 돼지보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치우고 배를 두드리며 슬그머니 누웠다. 어린 시절 집에서 키우던 돼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베이커 비치에서 바라본 골든게이트 브리지를 혼자 보기는 아까웠다. 슬그머니 일어나 감탄사를 중얼대며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훌러덩 벗고 뛰어노는 청춘 남녀들에게 정신을 뺏겼을 때 자전거를 탄 시커먼 청년이 내게로 다가왔다. 더럭 겁이 난 내게 그는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얼떨결에 악수하긴 했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는 없었다.

시종일관 웃던 그는 자기소개를 했다. “마약중독 퇴치 운동을 위해 서부 시애틀에서 동부 오하이오까지 자전거 횡단을 하고 있다. 자전거를 타는 너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은데 괜찮나?"

그는 주요 도시의 랜드마크에서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다고 했다. 골든 게이트 브릿지를 배경으로 나와 사진을 찍고는 그 자리에서 페이스북에 올렸다. 생김새를 보고 동네 건달은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한 내가 부끄러웠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하이 파이브를 하며 그의 뜻깊은 자전거 횡단을 응원했다. 알 수 없는 힘이 샘솟아 나는 다시 신바람의 주인이 됐다. 이후 자전거 여행은 더 없는 맑음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이른 아침 풍경은 어떨까?'

기대라는 풍선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카드와 지폐 몇 장을 챙겼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시계를 보니 아직 5시도 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는 일출에 대한 설렘이었을까? 시차 적응이 덜 된 걸까? 다른 날보다 더 일찍 눈을 떴다. 호텔을 나와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추울 줄 알았던 날씨가 적당해 기분이 좋았다. 바람막이를 벗어 가방에 넣고 골든 게이트 브리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횡단보도 앞에서 맞은편 상가 정문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를 보았다. 쪼그린 자세가 불편해 보였지만 그는 익숙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는 세련된 도시’라는 등식에 금이 갔다.

샌프란시스코는 최첨단 기술 기업의 상징 실리콘밸리가 인근에 있는 세계적인 해변 도시다.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처음 만난 사람이 노숙자라니….

호텔을 예약하면서 비싼 가격에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고작 3성급 호텔인데도 지금까지 여행한 어떤 도시의 호텔 가격보다 비쌌다. 여행이 임박해서 예약한 것도 아니었다. 호텔 가격이 이러니 집값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에 다니는 고연봉 직장인도 샌프란시스코의 집값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어느 기자의 말이 생각났다. 기대라는 풍선에 바람이 조금씩 빠졌다.

노숙자가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살 집이 없으니 다른 선택이 없겠다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지나치면서도 머리는 노숙자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다리는 나를 북쪽으로 열심히 이끌었다. 어제 자전거를 빌렸던 바이크 숍을 지났다. 어제는 자전거로 오늘은 두 다리로 달린다. 해변 앞 갈림길에서 좌측 방향으로 달렸다. 골든 게이트 브리지를 반환점으로 돌아와 다시 베이 브리지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AT&T 파크까지 달릴 생각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도시가 크거나 복잡하지 않다. 해변 길을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달리는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났다. 러너는 도심과 해변을 구분하지 않았다. 러너에게 달리는 사람은 재미있는 구경거리이기도 하니 샌프란시스코는 러너들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란색 우레탄 위에서 근력운동을 하는 청년들에게 눈길이 갔다. 서울에서 새벽 달리기를 하면 종종 운동기구가 있는 공간을 지난다. 그곳엔 예외 없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있다. 한국과 달리 두 청년이 서로의 근력운동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면서도 샌프란시스코가 젊게 느껴졌다.


골든 게이트 브리지 전경이 코 앞에 보이는 벤치에 앉아 쉬었다. 새벽은 어제 낮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땀이 식으며 살짝 추워졌다. 얼른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무엇이든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다.

해 뜨는 시간이 다가왔다. 동쪽 베이 브리지에서 일출을 맞고 싶었다.

천천히 달려 땀이 날 즈음 바다사자로 유명한 피어 39가 보였다. 동물원이 아닌 곳에서 바다사자를 만난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꽤 많은 바다사자가 데크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떠들어댔다. 바다사자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엔 신기함과 재미가 가득했다.

달리면서 생각하니 무엇인가 이상했다. 사람이 바다사자를 구경한 것인지 바다사자가 사람을 구경한 것인지 헷갈렸다. 동물원에 갇힌 바다사자를 바라볼 때는 분명히 사람이 바다사자를 구경한 건데 바다에서 자유롭게 노는 바다사자를 떠올리니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터줏대감 바다사자들이 오늘은 어디서 누가 왔나 하는 생각으로 관광객들을 구경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바다사자는 불쌍한 동물이 아닌 놀고먹는 한량이 됐다.

이마에 솟는 땀방울은 러너임을 일깨운다. 자아도취에 빠지며 흐뭇한 웃음이 났다. 멀리 베이 브리지가 보였다. 베이 브리지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잇는 길이 14km의 거대한 다리다. 아침이 다가오며 달리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베이 브리지를 지나 2km를 더 달리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AT&T 파크가 나온다.

스타벅스가 보였다. 갈증과 허기가 찾아왔다. 여행 가면 일출 사냥꾼이 되는 나는 일출을 먼저 보고 뭐라도 먹기로 했다. 일출이 가장 멋질 것 같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10분쯤 지났을까? 여명이 밝아오며 태양이 힘차게 솟아올랐다. 뜨거운 무엇인가가 몸에서 차올랐다. 평생 길이길이 남을 일출이었다. 그 상황을 그대로 남기고 싶었다. 30m쯤 앞에서 달려오는 러너가 보였다. 자세조차 멋진 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러너여서일까? 그는 사진을 두 장도 아닌 십 여장을 찍어주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있으니 경계심은 사라지고 호감이 생겼음이 분명하다. 여행하며 만나는 러너는 언제나 친절했다.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가 떠나고서도 한참을 태양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베이 브리지 위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다시 갈증과 허기가 재촉했다.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매장을 둘러보았다. 샌프란시스코답게 골든 게이트 브리지가 그려진 한정판 머그잔이 눈에 띄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누군가는 세계 주요 도시로 여행할 때마다 머그잔을 기념품으로 살 것이다.

여전히 태양에 미련이 남은 나는 음식을 갖고 바깥으로 나갔다. 테이블에 앉아 샌드위치를 입에 넣으며 커피를 마셨다. 달린 뒤에 먹는 음식은 무엇이든 최고다. 샌드위치는 허기를 채웠고 커피는 갈증을 풀었다. 소소한 행복이 찾아왔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며 주위 풍경을 보았다. 낚시하는 사람들, 달리는 사람들, 걸어 다니는 사람들, 매장 안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내 마음이 그래서일까? 도시 전체가 생기로웠다.


AT&T 파크는 MLB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구장이다. 나만의 결승선인 AT&T 파크(오라클 파크)로 향했다. MLB 구장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AT&T 파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8회 우승에 빛나는 명문 구단이라 한국에도 팬이 많다.

많은 러너가 떼를 지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니 세상 어디에서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불끈 솟았다. 세계 어느 곳이든 러너가 있고 그들과 함께 달리며 호흡하면 누구나 친구가 될 것이다. 러너가 서로 스텝을 맞추듯 도시에 적응할 것이다.


어릴 적 누나가 심은 샌프란시스코의 로망은 현실이 됐다. 세월의 무게에 자칫 영원히 묻힐 뻔했지만, 달리기를 하며 읽게 된 어느 달리기 에세이 덕분에 되살아났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나는 신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준 선물을 놓치지 않았다. 비록 출장이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달리며 오랜 시간 꿈꾸던 샌프란시스코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누렸다. 세계 어느 곳에 떨어져도 살 수 있겠다는 의외의 자신감도 얻었다.

스타벅스는 나의 특별한 공간이 됐다. 오늘도 나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가장 편한 자리에 앉는다. 눈을 감고 베이 브리지 앞에서 보았던 일출을 떠올린다. 달리기, 일출, 베이 브리지, 커피, 샌프란시스코 해변, 다양한 조합이 스타벅스라는 공간과 한데 어우러진다. 벅차고 행복했던 순간이 되살아난다. 기분이 좋다. 문득 궁금하다. 그때 그 액자는 어디에 있을까? 그 액자는 성인이 된 지금 봐도 여전히 멋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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